일반적으로 학문의 기초는 왜(Why)?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욱 나은 지식을 얻게 하는데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유익한 것(전12:9,요5:39,행17:11,벧전1:10)이기도 합니다. 탐구의 과정에서 많은 지식과 영적으로 깊은 비밀들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피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지식들을 가져다 줄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믿음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익하고 헛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야 하는 것 중에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변론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롭다 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해가되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변론은 파당을 일으키고, 많은 분쟁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변론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가지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족보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족보를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베드로, 바울, 아볼로,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졌던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는 자세를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그들만의 교리, 즉 칼빈이나 알미니안, 혹은 웨슬리안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바로 족보를 주장하는 자들이며, 그들의 자세는 그들의 믿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논쟁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논쟁을 일삼는 자들을 보면 그들의 주장이 결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논리적이며, 심지어는 더욱 정당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들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의 논리나 주장만으로 어떠한 일들을 결정하고, 실행할 수 없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장 정당한 것이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많은 부분에 걸쳐서 순종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많은 이단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 중에 하나는 율법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식물을 삼가하고(딤전4:3),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도록 가르치며(갈4:10), 율법으로 정죄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많은 다툼을 일으키고, 급기야는 커다란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도 이러한 사건(갈2:11-14)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율법의 문제는 모든 세대에 걸쳐서 다툼의 원인이 되어 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율법은 이미 완성되어졌고(마5:17), 우리는 이제 그분을 믿고 영접함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일만 남았습니다.
변론과 족보와 논쟁과 율법에 관한 다툼은 이미 무익하고 헛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신실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주장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기는 않습니까? 그것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눈을 돌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