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께서 다시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떠나 데가볼리 지방 한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이르시매 그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그분께 나아와 그에게 안수하여 주실 것을 그분께 간청하거늘 그분께서 그를 무리에서 떼어 따로 데리고 가사 자신의 손가락들을 그의 두 귀에 넣고 침을 뱉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그것은, 열리라, 는 뜻이라. 곧 그의 두 귀가 열리고 그의 혀를 묶는 줄이 풀려 그가 분명하게 말을 하더라.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하사 그들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시되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하면 명할수록 그들이 더욱 더 그것을 널리 알리고 또 한량없이 놀라 이르되, 그분께서 모든 것을 잘하셨도다. 그분께서 귀먹은 자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자도 말하게 하신다, 하니라. (막7:31~37)
인생을 살면서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비극적인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들음에서 온다는 사실(롬10:17)을 생각한다면 더욱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고 일도 할 수 있는 자들이지만 복음의 신비들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인생들입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들을 위하여 수화를 가르치고, 글도 읽을 줄 알도록 하기 위해 힘쓰는 많은 선생들을 통하여 최소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소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도 하지만 예수님 당시를 생각한다면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여기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무리들의 손에 의해 예수님께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소경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사역에 관하여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사역을 보고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바르게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실제로 눈을 뜨고는 있지만 들을 수 없었고, 또한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소경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했던 성경의 기록에서 보는 것과 같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였습니다(사6:9,마13:14,막4:12,행28:26). 비록 볼 수는 있어도 듣는 귀가 없다는 그는 소경과 다름이 없는 인생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는 보고 있지만 듣지 못해서 구원의 길을 포기하고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습니까? 마치 홍수와 같이 수많은 경로를 통하여 사람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복음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과 그들 스스로의 인생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복음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여기 소개되고 있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곧 이 시대의 수많은 영적 소경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무리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는 비록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 올 수 없었습니다.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끌려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소경들도 무리들의 손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필요로 한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볼 수는 있지만 듣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그들의 귀를 열어 줄 책임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로 데려가셔서 치료하십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자주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원치 않으셨고, 또한 이 기적을 통하여 주님의 오신 목적을 보이시기를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는 더욱 많은 기적과 능력들을 보이심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결국에는 그들의 왕국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기적을 보임으로서 전능하신 분으로서 힘을 과시함으로 그분의 사역을 완수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린 양이 되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것만이 성경에서 예언된대로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심에 있어서 손가락을 두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단순하게 사람들의 병을 말씀으로 치료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복잡하기도 하며, 또한 혼란스러운 방법으로 치료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손가락을 두 귀에 넣으신 것은 그의 막혀 있는 귀를 뚫으시는 모습을 연상케합니다. 그리고 침을 뱉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는 장면은 비록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청결하지 않은 모습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혀에 대심으로 그의 혀가 말씀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통하여 말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말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바다’ 즉 ‘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탄식 후에 두 귀가 열리고 그의 혀를 묶는 줄이 풀려 그가 분명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표현을 빌리자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이전에 두 귀는 닫혀 있었고, 혀는 줄로 묶여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닫힌 귀를 열고, 줄로 묶여 있는 혀를 풀어주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귀가 닫혀 있고, 혀는 묶여 있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지 않으려는 자세도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불신자를 향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더욱 큰 탄식은 아마도 믿는 자들이 귀를 막고, 스스로 혀를 묶어 두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면서 가장 마음 아파했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손에 성경을 들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지만 정작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또한 신앙의 양심을 따라 말하지 않고, 권력자들과 군중들이 두려워 그들에게 끌려다녔던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들으려 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탄식하실 것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향한 탄식이 결코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신 후에 그를 돌려보내면서 알리지 말도록 권면하십니다. 그 의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하는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치료가 된 후 그들에게 명하면 명할수록 그들이 더욱 더 그것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소문으로 인하여 수많은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이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람들 사이에 더욱 퍼져만 갔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이 소문이 퍼져가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