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형적으로 볼 때 분노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분노의 감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육신의 감정이 자극되어 일으키는 분노도 있겠지만 영적으로 참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분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때로는 분노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한 분노, 그리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동전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분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많은 해악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잠언은 이 일들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 걸쳐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1. 분노하기를 더디하라
잠언에서는 분노에 대하여 금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노함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노를 더디 하는 자는 명철이 있는 자이지만 영이 조금한 자, 즉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분노하는 자는 결국 어리석음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4:29).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을 맞거나, 혹은 우리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는 사건이 발생되었을 때에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만 더 참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분노할 만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마음에 삼키라고 말합니다. 또한 어떤 유명한 철학자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분노의 감정을 분출하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감추면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흔하게 걸리는 신경정신과 관련된 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지나치게 분노의 감정을 표출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어울리지 않게 불경건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분노하는 일을 자제하되 불의와 불법한 일에 대하여는 사안에 따라서 드러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허물을 드러내고, 그들을 실족시킨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분노의 감정을 숨기고, 주님의 선하신 일을 위하여 때때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상대방의 분노를 유발시키지 말라.
자신이 분노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지만 상대방을 자극하여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더욱 잘못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품성을 지닐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이들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 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결국 서로가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부드러운 대답은 진노를 돌이키거니와 가혹한 말들은 분노를 일으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15:1).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다면 그는 상대방에 대하여 부드러운 말투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 교양 있는 자세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자극한다고 해서 그대로 감정을 표출하려고 한다면 결국 상대방은 분노의 감정을 드러낼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상대방을 자극시키는 말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말로서 상대방의 마음을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가혹한 말을 하기보다는 복된 말로서 그들을 진노로부터 돌이킬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전해지는 말 한마디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3. 분노하는 자와 교제하지 말라
잠언에서는 분노하는 자들에 대하여 더욱 엄격하게 경고하고 있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화를 품는 자와 함께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22:24). 분노의 감정을 가진 자와는 교제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분노하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을 버리고 순수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분노하게 되면 그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듣는 이들조차도 그릇된 판단을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성경을 잣대에 비추어 모든 상황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감정적인 대응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대부분 그릇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을 피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분노의 감정을 가지는 것은 결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의 감정을 취할 수도 있는 자였지만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결국 죽어갔지만 그의 기도는 돌을 던지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심겨져서 이후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순교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온유한 품성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4. 분노는 다툼과 범죄의 원인이 된다.
매사에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다툼은 순간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낼 때 일어납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결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수많은 범죄들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잠언은 이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죄를 많이 짓느니라”(29:22)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결코 그들이 감정이 없고,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분노로 인하여 오게 될 다툼과 범죄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분노의 감정 그 자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이후에 오게 될 결과들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죄와 상관없이 살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자극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원한다면 끊임없는 육신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마음을 움직여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려는 세력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라앉히고, 그 앞에서 순종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힘써야만 합니다. 우리 안에서 분노의 감정을 몰아내고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