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적(12)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눅7:11-16)
그 날 뒤에 그분께서 나인이라 하는 도시로 들어가시니 그분의 제자들 중에서 많은 이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가더라. 이제 그분께서 그 도시의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보라, 죽은 사람이 실려 나오는데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요, 그녀는 과부더라.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도 그 여인과 함께하거늘 [주]께서 그 여인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녀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 나아가사 관에 손을 대시니 그를 나르던 사람들이 멈추어 서니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그가 앉아서 말하기 시작하거늘 그분께서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넘겨주시니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하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큰 대언자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더라. (눅7:11~16)
성경 안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장면이 세 차례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고, 또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이며, 마지막으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특별한 의식이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말씀으로 살리셨다는 것인데, 나사로에게는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는 “달리다쿰” 즉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으며,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는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안겨다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의식이나, 행위들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새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목격한 모든 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마음 안에 품고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세대를 통해서 과부는 가장 연약한 존재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곧 머리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엡5:23).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육신을 입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놓여 있으며,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롬3:10,23,6:23,요8:44). 그렇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붙들며, 소망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는 비록 소망이 없는 자였지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이 과부에게 커다란 위로였으며,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었을 때 과부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외아들이었으니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녀로서는 더 이상 삶에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통곡하였고, 그녀가 슬프게 우는 모습은 예수님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나인성 과부와 같은 처지는 아니지만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도 그녀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직 외아들을 의지하고 살았던 과부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권세와 지식에 매여서 그것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되었을 때 스스로 절망의 늪에 빠져버리는 모습을 봅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대부분 자신이 소망 삼고 있었던 것들이 무너지면서 삶의 희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과부의 모습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고 나르던 사람들을 멈추어 세우십니다. 그리고는 청년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녀에게 청년을 넘겨 주십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울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다시 그녀에게 소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잃었던 외아들을 다시 품에 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의 말이나, 물질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되찾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들을 살리시는 모습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문제를 보시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물질이나 명예, 권세와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매우 일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들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죄인의 신분에서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모습을 통하여 부활의 신앙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볼 수 있게 합니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대언자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났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광경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하였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리스도로서 지금은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시고, 다가 올 세상에서는 만왕의 왕이 되시겠지만 공생애동안 사역을 하시면서 대언자로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충격적인 고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전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하여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 담아 두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출석하고 있지만 막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은 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같습니다.
부활신앙은 교회 안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장면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셨던 이유도 바로 그들에게 부활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활신앙을 통하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을 통하여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능력만을 생각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진리를 무시하는 자들을 경계하십시오. 주님께서는 기적을 보고 믿었지만 막상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참 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