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전문)

조회 수 5079 추천 수 0 2010.06.09 18:03:29

 

예수님의 비유(서론)

 

 

예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천국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에는 제자들마저도 예수께서 직접 풀어주셔야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다가올 세상과 천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들이었지만 사람들은 오직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관심만을 가지고 예수님께 접근을 했기 때문에 이해되기 쉽지 않은 말씀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4:33-34)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8:10)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일들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헤롯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 주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기대를 가진 자들이 다가올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이 친히 하신 비유의 말씀을 다시 제자들에게 설명하심으로써 비유로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비유에 대한 이해는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므로 그것은 결코 비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유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비유가 이 세대에 결코 풀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미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풀어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분명하게 오늘날까지 가르쳐지고 있는 그분의 나라(kingdom)에 대한 교훈들입니다.

 

둘째는 모든 성경이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왔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모든 성경을 비유로 해석하려 한다면 성경은 신비에 싸여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은 기준 없이 성경을 해석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성경을 읽고 영적 삶을 풍성히 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게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비유로 말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고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누구도 풀 수 없는 신비(mystery)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모든 말들을 비유로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목적하신 내용이 있으며, 예수님은 그 모든 가르침들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29-33)

 

예수께서 모든 사역을 마치실 때에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말로서가 아니라 그 몸으로 직접 말씀들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인 것을 믿는 순간 완성된 것입니다.

 

복음서안에는 약 40 여 회에 걸쳐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다가올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데 충분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비유의 말씀들을 이해하는데 묵상하는 시간들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큰 소망을 갖게 만들어 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부디 이 비유의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 삶에 큰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1. 등잔대 위의 등잔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5,16)

 

우리는 이 등잔불의 비유를 통하여 흥미로운 구절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너희 빛이라는 표현을 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제자들 자신이 바로 빛의 역할을 하는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빛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등잔불의 비유가 마태복음뿐만이 아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빛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한 중요한 교훈들임을 말해주려는 것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4:21)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8: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11:33)

 

빛의 역할은 당연히 사람들에게 비추어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빛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감추어져 있다면 그 빛은 역할을 다할 수 없습니다. 빛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비출 수 있는 위치에 놓여져야 하며, 가장 구석까지도 비출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집 안에서 전등의 위치를 천정에 매달아 놓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역할과 관련하여 빛을 선한 행위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행위를 보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선한 일들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선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선한 행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선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선한 행위의 전부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굳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선한 것은 무엇일까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우리는 먼저 선한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9:17,10:18,18:19).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선한 것을 담아 그것으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12:35, 6:45).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담은 선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있다면 역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한 이후에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하여 선한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4:9).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선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것이 의와 희락과 화평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4:16-18). 우리가 선한 것을 말할 때에는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사람의 잣대로 계산하여 선과 악을 나누려 한다면 우리는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권면한 말씀에 또 한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1:14)

 

우리가 주님의 명령대로 세상의 빛을 비추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세상의 빛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성령을 의지했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함께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또한 그분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2.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15:14)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6:39)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눈먼 인도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눈먼 인도자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손에 성경을 들고,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많은 사람들의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눈먼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지도자가 되는데 있어서 바른 자세를 촉구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56:10)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2:8)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 대한 표현을 맹인, 무지한 자, 그리고 벙어리 개와 같은 자들로서 바르게 말하지 못하는 자, 그리고 게으른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속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자들이지만 오히려 그들의 열심이 더욱 많은 자들을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23:15)

 

그들은 결코 게으르거나 나태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했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눈먼 지도자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들은 반복되고 있으며, 그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지만 더욱 지옥자식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의 지도자들이 무엇에 눈이 멀었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23:16)

 

눈먼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지만 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물질에 모든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지도자, 교회의 재산으로 능력을 평가하는 지도자, 매주 드려지는 헌금의 액수로 믿음을 평가하는 지도자, 이러한 지도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생겨난 풍조가 아니라 이미 모든 역사를 통해 있어져 왔던 일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람들이 희생물을 드리기 위해 고기를 가져오면 고기를 삶을 때에 갈고리로 꺼내어 자신들이 취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에 대하여 성경은 그 죄가 매우 큰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삼상2:12-17). 결국 하나님은 엘리를 통하여 그들을 죽일 것이라고 경고를 하시고((삼상 2:34), 그들은 곧 죽게 됩니다(삼상 3:11).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이 언약쾌를 가지면 싸움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결국 언약쾌도 빼앗기고 죽음도 당했던 사건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결국 자신도 죽고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도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쾌가 그들 옆에 있었지만 그들을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결코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율법의 틀에 자신을 가두어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자들도 아닙니다. 진정한 지도자의 가장 첫 번째 자질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만일 눈을 뜨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23:24)

 

맹인 된 인도자는 사소한 일들에는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성경 안에서 강조되지 않은 일에는 매우 열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큰 가르침에 대하여는 외면합니다. 그들은 분명하지 않은 진리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들에는 익숙하지만 정작 큰 가르침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것이 나타나면 매우 긴장하지만 쉬운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행합니다. 하루살이는 작지만 사람을 귀찮게 합니다. 그러나 낙타는 크지만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익을 줍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대하여 불리한 것에 대하여는 긴장하여 조심하고, 유익한 것에 대하여는 함부로 대하는 것이 바로 맹인 된 인도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참된 지도자라면 진리에 대하여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들은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불이익을 떠나서 진실하고 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참된 인도자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바라볼 때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눈을 뜨고, 그 가르침을 따라서 바르게 인도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3. 반석위에 지은 집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복음 7:24-27)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6:46-49)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행함이 있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어떤 이들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은 행함보다는 교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기본적인 교리(가르침)와 행함이 거의 같은 비율로 기록되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어느 한쪽만을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신앙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물론 행함이 중요하다고 해서 교리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바른 가르침이 없이 바른 행함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리 안에서 머물러 있다면 그 교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노아를 포함하여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습니까? 그리고 바른 가르침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했으며, 이 일을 안 노아는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직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열중함으로써 홍수가 났을 때 완전히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멸망의 집을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의 최후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종이었던 게하시를 보십시오. 그는 나아만의 나병이 치유되고 은 이달란트와 옷 두벌을 지워주자 엘리사에 의해 거부된 이 재물을 자신의 집에 두고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리고는 엘리사에게 거짓말까지 합니다. 결국 그에 대한 결과는 나아만에게 있었던 나병이 그에게 임하는 것이었습니다(왕하5:23-27). 그는 엘리사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 명령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많은 재물을 얻은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의 몸은 나병환자자 되었고, 그의 신세는 더욱 비참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재앙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비슷한 일을 경험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일 만나를 먹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하며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이라는 엄청난 성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목격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에서 나오는 물건에 손을 대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저주받은 물건들로 인해서 이스라엘 진영이 저주거리가 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금과 은 그리고 놋과 쇠 기구들만을 주께 거룩히 구분하여 주의 보고에 들일 것을 명령하셨습니다(6:18,19). 그렇지만 아간은 이 명령을 어기고 물건을 취하였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일로 인하여 아이 성과의 전쟁에서 참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비를 뽑아 죄의 원인을 추적하는 중에 그는 결국 아골 골짜기에서 돌무더기에 쌓여 죽게 되었습니다(7:1-26). 그는 순간적으로 여리고로부터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었지만 결국 그 자신과 온 가족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 비참한 결과를 맞았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도 체험을 한 자였지만 불순종함으로써 멸망을 자초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불순종한 사람들의 기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떠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여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삶으로서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이삭을 드리라는 명령에 대하여 순종함으로써 그 믿음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반석 위에 집을 훌륭하게 짓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의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비록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자였지만 닭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다시 주님께 돌이켰고(22:60-62), 오직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인생을 산 자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향해 배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깨닫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팔기 위해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6:47,48).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결국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방향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께 자신의 생애를 의존하고자 했지만 유다는 스스로 세상에서 자신의 집을 지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주님의 제자로서 훌륭히 자신의 사명을 다한 것과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 비참한 결과를 낳은 것처럼 놀랍도록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집을 훌륭하게 짓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환난이나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곧 넘어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행하고 있다면 그는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자이며, 만일 행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4. 빚진 자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23-35)

 

우리가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결론은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이 용서에 대한 교훈은 모든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용서에 대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죄의 용서가 없다면 구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은 마치 자기 종들에게 회계보고를 받는 어떤 왕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반드시 회계보고를 받을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회계보고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용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주님 앞에서 우리가 보고해야 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누가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우리들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칫 이 말씀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을 묻어버리는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들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빚을 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돈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빚진 것에 비하면 매우 작습니다. 그 까닭에 그리스도인이 탕감하지 못할 정도의 빚을 진 자는 없습니다. 즉 용서하지 못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5)

 

이미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용서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용서받은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환산할 수 없는 은혜를 얻은 우리는 당연히 모든 것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2:13)

 

만일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일이 없다면 주님은 그에게 긍휼이 없는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긍휼을 베푼다면 그는 심판을 이기고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법이라는 잣대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그도 역시 주님 앞에서 법이라는 잣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결국 책망을 받게 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저지른 행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큰 피해를 주었을 때에 주님의 입장에서 처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누구도 정죄하시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그들과 변론을 하고, 상을 엎으시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위해 여전히 기도하시고,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이러한 마음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3:13)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 다툴 일이 생긴다면 서로 참고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다툴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바나바와 바울이 보여주었습니다. 아무리 신실한 자라 할지라도 다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와 같이 화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화해가 없다면 주님의 용서가 빛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서로 사랑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십시오. 그것은 용서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통해서 진정한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 안에서 용서가 있고 화해와 평화가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5. 결박시켜야 할 대상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3:23-30)

 

예수께서는 사탄의 존재를 예로 들면서 결국에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결국 이 문제는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관련한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사실상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모임이든지 서로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분쟁하는 상태가 된다면 그것은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가령 한 기업의 경영자와 노동자가 서로의 입장만을 주장하고 상대방에 대하여 투쟁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그 기업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또한 한 나라가 위정자와 백성 간에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역시 그 나라도 오래갈 수 없습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에 관계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서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존재에 있어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사탄은 치밀한 존재들입니다. 만일 그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만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들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서로 간에 분쟁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힘을 합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또한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2:38).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죄의 성질은 우리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 안에서 성령의 일들을 거부하기도 하며, 또한 대적하고 모독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자가 그 마음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분쟁을 하고 있다면 그의 삶은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는 사탄과의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아는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었을 때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모독하거나 대적하는 것이 마치 교회를 대적하고 목양자에 대하여 불만을 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행동들이 성령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존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이며, 만일 우리가 말씀에서 벗어날 때에는 우리의 양심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돌이키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모습들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과의 연합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능력 있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그것은 사탄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도록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가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이미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6. 씨 뿌리는 자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3:3-9)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3:18-23)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가복음 4:2-9)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마가복음 4:14-20)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해석도 매우 소상히 설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이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은 매우 복잡하고 많은 가르침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매우 단순합니다. 이 비유는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에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설명을 하는 것은 주로 듣는 자의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가지의 마음 밭을 비유하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는 이 마음 밭의 비유를 통하여 구원에 관한 논쟁을 벌이는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돌 짝 밭에 속한 마음을 가진 자가 구원을 받았겠느냐? 혹은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와 같은 자는 구원을 받았지만 그는 어떠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서로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갈등만을 일으키는 경우들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 말씀이 구원에 관하여 설명하시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대하여 설명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좋은 밭, 즉 선한 양심(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서 본성, 혹은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통하여 선한 양심에 대하여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마음의 상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의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말씀을 들어도 이해가 되고 깨달아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마음속에 심겨지지 않는다면 그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받아들여지지(영접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는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마음에 온갖 세상의 염려로 가득한 사람에게 비록 말씀이 깊이 심겨졌어도 그 역시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땅으로 개간이 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땅이 좋은 땅입니까? 그것은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돌과 같은 것들이 성장을 막을 수 있으므로 버려져야 합니다. 가시나무나 가라지와 같이 결실을 맺는 것을 막는 잡초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것으로 그쳐져서는 안 됩니다. 좋은 땅에는 반드시 거름(퇴비)을 주어야 합니다. 거름은 땅을 썩게 만듭니다. 부드럽고 썩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마음은 어떠한 것입니까?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함을 지닌 마음입니다. 그는 언제든지 인내할 수 있는 품성을 지닌 자입니다. 어떠한 것이든 내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를 통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좋은 땅, 즉 선한 양심(마음)을 갖기 위해 힘쓰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풍성한 삶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7. 스스로 열매를 맺는 땅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마가복음 4:26-29)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땅은 마음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13:18-23,8:4-15). 그리고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는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는 사악한 자의 자녀들이라고 하셨습니다(13:38). 그 까닭에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일방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기본적인 진리의 내용은 매우 명백합니다. 그것은 씨를 땅에 심으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고 추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씨가 땅에 심어지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은 뿌리는 사람의 의지에 관계없이 씨가 땅 속에서 생명의 기운을 가지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위의 두 비유의 말씀과 연관하여 이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겨진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일정한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생활과 관련하여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내용의 설교나 교육을 통하여 보다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그들의 노력에 비하여 그들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받은 가르침을 이용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만일 말씀이 그의 마음 안에서 자라고 있다면 그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씨가 자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급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씨가 열매를 맺기까지는 싹이 난 이후에 잎사귀를 내고, 알찬 곡식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교육으로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의 교육은 도덕적인 인격자나 종교적인 율법주의자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거룩한 생애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그의 마음에 뿌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또 하나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천국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새로운 신학 사조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으로 이 세상을 복음화 시키고,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종 대형 집회들을 통하여 종교통합운동을 전개하고 이 땅에 더욱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게 하지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순수한 주님의 교회들이 단 한 번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시작된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이 말씀을 나누고 교제를 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형성했고, 그들은 후에 집단을 이루었고, 그들의 세력이 정치화되면 다시 주님에 의해 흩어지는 역사를 반복해 왔습니다.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교회를 세울 목적으로 설교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깨달은 말씀을 회중들을 향해 설교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도 역시 회당과 거리에서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뿐입니다. 말씀을 들은 그들은 각자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모임을 가졌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주님의 교회로 불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들이 심겨진 곳에서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어 주님의 교회를 형성해 가는 것이 바로 교회의 역사입니다. 반대로 누룩과 같은 사악한 자들이 주님의 교회 안이나, 아니면 세상에서 그 자리에 있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상은 어떤 자들이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라면 우리의 주변은 틀림없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결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추수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끝날 심판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9:27).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의 마음 안에서 자라서 그 열매를 따라 추수를 하게 될 것이며, 세상에서도 역시 선악 간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장래에 받을 심판들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받을 심판은 구원의 문제를 놓고 천국이냐? 아니면 지옥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 행한 일들에 따라서 주님 앞에서 해명을 해야 할 날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부끄럽게 설 것인지, 아니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설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답게 생활하는데 힘써야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힘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할 때에 주님은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열매를 더하십니다. 인간적인 노력들은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담는 일에 힘쓰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아간다면 자연스럽게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씨가 뿌려진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8. 곡식과 가라지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태복음 13:24-30)

 

곡식과 가라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주님의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가라지가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원하지 않는 일이어도 오랜 교회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일이며, 지금도 가라지는 그 성장을 멈추지 않고 순수한 주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은 교회의 주인이 되시면서고 그들을 가만히 두시는 것일까요?

 

이일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 가라지를 뿌리는 자들에 대하여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명백하게 가라지가 원수들에 의해서 뿌려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결코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파괴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 안에 악한 생각들을 심을 것이며, 또한 교회를 파괴시키기 위해서 악한 교리와 전통들을 심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세대에 걸쳐서 성공을 하고 있고, 주님은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 제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교회와 성도들은 핍박 속에서 이기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시험이나 교회에 닥치는 환난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악으로 시험을 받으시지도 않으며, 또한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1:13). 욥의 경우에서 보듯이 모든 시험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물론 마귀의 활동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오는 악한 것들이 원수인 마귀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러한 악한 것들을 가만히 두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곡식을 얻는 것보다 현재의 곡식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는 교회 내에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에 대하여 관망만 하라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함께 자라게 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혹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도 뽑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라지로 인해서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손실보다 곡식 하나를 잃는 것이 더욱 손실이 큰 것으로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에 대하여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교회를 생각하면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몇 사람의 성도를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반대하는 사람의 생각을 무시하고,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하며, 또한 목회자의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는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생각입니다. 주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시며, 심지어 교회의 가라지라도 그냥 두시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과 일치를 하지 않는다고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이 참된 곡식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니다. 우리는 매사에 주님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비록 그가 부족하고, 또한 믿음이 약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그들이 바른 신앙 안에서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하여 모든 결과가 마지막 추수 때에 있어질 것이라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심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권한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판단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정죄하는 일에 대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근친상간이 행해졌던 고린도교회나, 각종 이단 교리들이 성행했던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같은 곳에 대해서도 여전히 주님의 교회로서 인정하고 계시며, 비록 악한 것들이 가득한 교회일지라도 결코 교회를 해체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물며 우리가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정죄는 오직 추수, 즉 심판 때에 주님에 의해 최종적으로 있게 됩니다.

 

가라지는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오직 그들과 더불어 자라면서도 스스로 분별하고 지혜롭게 처신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오직 한 하나님을 의지하고 분명한 믿음으로 마귀들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어야겠습니다. 마귀는 오직 믿음이 있는 자들에 대하여 떨며, 다가가지 않습니다(2:19).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9. 겨자씨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복음 13:31-32)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겨자씨가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하는 것은 이 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풀, 혹은 나물과 같은 것이어서 크게 자라야 2~3 미터를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무가 되어 새들이 와서 깃들도록 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이 문제에 관하여 많은 논쟁이 있지만 우리가 그러한 관점에 관하여 긴 설명을 하지 않는 것은 이 말씀이 천국을 설명하시기 위한 특별한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이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복음은 매우 미약한 것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결실을 안겨다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겨자씨가 자신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교회가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겨자씨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을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긍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앞서 가라지의 비유와 뒤에 누룩의 비유를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마귀의 세력들이 천국에 속한 백성들 사이에서 어떻게 성장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유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한 견해들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역교회들이 순수한 교회를 세우기 원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부패되어 왔고, 오히려 순수한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타락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 마귀는 마치 겨자씨와 같이 작은 모습으로 다가와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안주하고, 마치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며, 죄 가운데 살고 있더라도 전혀 감각이 없는 상태로 살아갑니다. 처음부터 마귀는 이러한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삼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어왔습니다. 우리 안에 거짓된 진리가 숨어들어오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 복음의 관점에서 한 알의 겨자씨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언제 가치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자라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가치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것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라게 되어 커다란 결실을 안겨다 줍니다. 천국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복음이 교회 안에서나 세상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언젠가 우리의 눈앞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인내해야만 합니다. 또한 개인의 삶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힘써야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복음은 언제나 작게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교회당과 웅장한 교회 음악에는 심취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복음은 매우 작게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사람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바로 능력 있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진정한 생명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집사였지만 삶을 통하여 실제적인 결과를 얻은 자는 아닙니다. 그는 분명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설교를 통하여 확실한 증거를 한 자였지만 결국 유대인들의 손에 의하여 돌아 맞아 죽음을 맞이했던 자입니다. 우리는 그의 인생이 아무런 결실도 없이 수고만 하고 떠나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역사로 볼 때는 매우 작은 씨와 같이 미약해 보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는 죽으면서 한 사람의 마음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는 점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자리에 있었던 자는 후에 바울이 된 사울이라는 자였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고, 또한 이 광경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나고, 복음전도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때에는 그의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스데반의 증거와 죽음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의 살아가는 방식을 보십시오.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분명한 복음을 전합니다. 심지어 죽음의 자리 앞에서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그는 수십 번 매를 맞고,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마다 바울 안에서는 스데반이 죽음 앞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그렸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작은 씨는 결국 바울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사를 말할 때 주로 가톨릭 교회와 같은 거대한 교회당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자들을 언급합니다. 그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기독교회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주님의 교회는 오히려 그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아 왔으며, 언제나 소수의 무리를 이루고 그들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습니다. 마귀는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서 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죽이고, 성경을 불태우고, 모든 핍박을 가했지만 복음은 작은 씨가 되어 모든 나라들에 뿌려짐으로써 생명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기독교회 안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연합운동에 참여하고, 교회의 대형화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키우는데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노력은 결국 복음의 위력을 감소시키고, 오히려 바른 복음을 핍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서 성경대로 가르치고, 또한 그 안에서 사는 자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이들은 작은 씨가 되어 부패되고 타락의 길로 가는 교회와 죄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 시기의 대상이면서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등불의 역할을 다해왔던 자들입니다. 그 열매는 오늘날 또 다른 모습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어가게 됩니다.

 

복음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매우 작고, 약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매우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자라게 됩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삶에 풍성한 결실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10. 누룩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태복음 13:33)

 

성경 안에서 누룩은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절이 되면 누룩 없는 빵을 먹도록 했는데(23:6), 누룩은 빵을 부드럽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빵을 발효시키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인위적인 부패를 통하여 빵을 먹기 좋도록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이 먹기에 나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는 무교절이나 만찬을 위해서는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시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천국의 비유를 통하여 누룩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국이 더욱 확장되어 가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관점이 전혀 틀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성경 안에서 결코 긍정적인 상황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복음은 계속해서 전해져 왔습니다. 외형적으로 기독교회는 많은 성장을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운데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누룩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을 지속하면서 누룩은 더욱 많은 성장을 함으로서 오늘날의 교회는 이미 각종 누룩들에 의해서 취해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바알과 이스터 여신의 축제일을 기념하여 지키고 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고, 성경의 기초교리를 무시한 내용의 기도문을 아무 생각 없이 교회 안에서 암송하기도 합니다.

 

누룩은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며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볼 겨를도 없이 먹고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잘 못된 전통과 의식을 행함에 있어서 충분한 성경적 검증의 과정도 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술에 취한 사람이 정신이 맑은 사람에게 시비하고 마치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하는 것처럼 전통과 의식에 취해서 율법적인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심지어 이단으로 규정하는 사태지 이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로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수천만 명에 이릅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성경대로 산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한다는 이유에서 그들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누가 그들을 죽였습니까? 그들은 전통과 의식과 율법의 노예가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들어 온 누룩에 취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지금도 누룩에 취한 자들은 여전히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살기가 등등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서 그들을 죽이고, 핍박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통과 의식을 심습니다. 천국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이들의 활동 역시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누룩은 일단 가루에 뿌려지면 더 이상 분리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부패시키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그것은 분량을 더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 온 누룩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들은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바른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힘써왔고, 또한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이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순간적으로는 제거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담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 자들이 과거의 잘못된 전통과 의식과 같은 누룩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일단 그 속에서 벗어나 성경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을 점검하고 주님 앞에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지혜로운 결단이 있어야합니다.

 

 

 

 

 

 

 

 

 

 

 

 

 

 

 

 

 

 

 

 

 

 

 

 

 

11. 감추어진 보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태복음 13:44)

 

어떤 이들은 비유의 핵심적 대상은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밭은 세상이며(13:38), 보물은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19:5, 135:4). 현재 이스라엘은 숨겨진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언젠가 밭인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을 때 보물인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11:25-27). 그들은 이 비유의 말씀이 매우 역사적인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관계없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비유의 말씀이 무엇을 목적하고 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 위치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보물의 위치를 따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이 끝날 무렵 그들은 그것이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 안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간적으로 발견한 것 같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른 뒤 오는 좌절감은 더욱 심각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어디에도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통로이자 저장소이며,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언제나 우리의 양심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인생을 좌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생각과 감정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대부분 아직도 자신 안에 있는 진정한 실체, 즉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자입니다. 그들이 자신 안에 존재하는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방황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신 안에 있는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보물을 발견하면 숨겨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귀한 것일수록 사람들은 숨겨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흔하게 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보물일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령 물과 공기가 사람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보물이라고 말하는 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에 매우 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금이나 보석 같은 것이 보물로 취급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찌 보면 한갓 돌에 불과한 것인데 사람들은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눈에 쉽게 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보물은 결코 흔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출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흔하지 않다는 것은 곧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가치가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탐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분실한 우려가 있기 때문에 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흔하거나 함부로 드러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중히 다루어져야만 하며, 비밀스럽게 간직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너무나 가볍게 취급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천국을 경험했다고 하면서 간증을 하고 천국의 모습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천국을 경험했던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바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셋째 하늘(천국)을 경험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고후 12:1-4). 그런데 그가 자신이 낙원으로 채어 올라가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이 말들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연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고후 12:5).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천국을 마음에 품고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보물을 제대로 간직할 줄 아는 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보물이 너무도 탐스럽고 사랑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들이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 증거로 세상에서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육신이나 세상의 정욕, 그리고 마귀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되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결코 보물을 소유한 후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을 아는 것은 오직 나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우리 중 누군가 안에 있는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마음을 얻는 일을 위해 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빼앗긴 우리의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 모든 힘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노력을 지속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엄청난 보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마음 안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신비스러운 것이며, 또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쪼록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얻기 위한 수고를 지속적으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좋은 진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13:45~46)

 

앞서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에서도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샀듯이 이 비유에서도 상인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매우 값진 진주 하나를 사는 장면이 나옵니다.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학자들은 앞에서 보물이 이스라엘을 상징했듯이, 진주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밭을 사야 했지만, 상인은 오직 그 진주 하나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사시기 위해서 피를 흘리신, 즉 죽으신 분이십니다(20:28, 벧전 1:18,19). 바로 교회는 매우 값진 진주와 같은 존재로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주의 소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에 속한 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주님의 교회는 확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주님의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인이 진주를 찾아나서는 열정을 마음에 품고 세상에서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책임을 가진 자들입니다.

 

세상의 거짓 전도자나 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 안에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아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쁜 열매들을 맺음으로써 사회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상인과 같은 심정으로 진리를 찾는 자들에게 거짓 복음으로 현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뱀의 혀같이 매우 달콤한 말로 유혹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해 놓고는 그들을 더욱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갈망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진주를 찾아 나서는 일에는 매우 게으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상인은 언제나 부지런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물건을 구입하고 되파는 방법으로 자신의 재산을 모았던 자들입니다. 성경 안에는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상인으로 비유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달란트의 비유(25:14-30)와 므나(파운드)의 비유(19:12-27)입니다. 칭찬 받은 자들은 모두 부지런한 자들이었지만 책망 받은 이들은 게으른 자들이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들은 모두 주인의 뜻을 알고 있었고, 그 뜻을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즉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은 부지런 하며, 그들은 반드시 진리 안에서 풍성한 삶을 얻게 됩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의 어디에도 가만히 앉아서 진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의 것입니다. 만일 그가 가만히 앉아서 진리에 대하여 듣고 그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삶 속에서 열매를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바른 진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음식을 섭취하고 소화를 시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곧 소화불량으로 병원에 가거나 아니면 죽게 됩니다. 그가 섭취한 양식은 오히려 그에게는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찾아서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헌신에 관한 것입니다.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진주를 샀다고 말씀합니다. 진주가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물론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그의 행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진주 비유를 통하여 볼 수 있는 상인의 행동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무엇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주님의 교회가 소중하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투자해서라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힘쓰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토록 가치 있는 것들을 하찮은 것들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자신을 짓밟고 찢는 행동이라고 말합니다(7:6). 장차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상은 세상 어디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 생애를 투자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만큼 매우 귀중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든지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그것이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천국은 결코 대가 없이 지불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하늘의 상을 얻기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헌신의 삶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는 이 비밀을 알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 문은 진주로 되어져 있습니다(21:21). 그곳은 장차 우리가 통과해야 할 문입니다. 그 문을 당당하게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3.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13:47~50)

 

성경 안에서 바다는 세상과 비교되어 쓰여 지는 단어입니다. 바다 안에서 다양한 물고기들이 살아가듯이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일반적으로 어부들은 특정한 물고기를 목적으로 그물을 던지지만 그물에 걸려오는 것은 여러 종류의 것들입니다. 그 까닭에 어부들은 그물로 물고기를 잡은 후에는 다시 그물을 풀어 헤쳐 놓고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골라내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버리는 일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 끝이라는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대환난의 시점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각 사람의 인생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천년왕국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매우 혼돈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의도와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빠질 가능성 때문에 논쟁은 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물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시겠다는 경고를 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이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그물이 던져져서 많은 물고기들이 그 안에 담기게 된다는 것을 보면서 매우 의아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시 그물로부터 풀어 헤쳐져서 사람들에 의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구원의 안전 -한 번 구원된 자는 결코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사실에 대하여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듣고 깨닫는 것만으로 자신의 구원이 완전하다고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어 악인들은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시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구원의 안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이 말씀이 오늘날 교회시대를 의미하는 비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각각 의인과 악인으로 비유되고 있으며, 이를 가려내는 것은 천사들에 의해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듯이 천국에 속한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나쁜 것은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지듯이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전히 많은 논쟁이 되고 있는 천년왕국의 시점과 대환난의 시점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과연 천사들에 의해서 가려지게 되는 시점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끝이 성도들의 휴거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상황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 천년설의 입장에서 성도의 휴거가 있은 후 이 땅에서 7 년 동안 대환난이 있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재림이 있게 될 것이며,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 끝이라는 시점을 대환난 이전이나, 천년왕국 이후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말씀은 매우 복잡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논쟁을 깊이 있게 다루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오랜 역사 동안 끊임없이 이 문제에 대하여 논쟁해 왔지만 여전히 그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 안에 비밀로 감추어 두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가 비록 세상 끝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교회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과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안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은 자라면 그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안에서 수차례에 걸쳐서 약속된 말씀입니다. 그 까닭에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듣고 복음 안에 있기는 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흔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복음을 듣고 깨달았지만 영접(receive)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제사장,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알았고, 메시야도 알았고, 누구보다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인 자들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결코 당시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위선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거룩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구원이 확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매우 헌신적인 모습들로 인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어지게 될 것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얼마나 의롭게 살았느냐는 것보다는 그가 진정으로 생명이 있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인지에 대한 심판이 됩니다.

 

세상 끝에 나쁜 물고기를 골라내 불 속에 태워버리듯이 하나님께서 취할 수 없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죄인입니다. 죄인은 예외 없이 누구나 지옥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단 한 사람도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성경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복음을 듣는 자들을 많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고기를 잡는 사람이 바다에 그물을 던지지만 잡힌 고기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영혼을 살릴 복음에 대하여 듣고 있다면 그것은 거의 행운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과연 그 복음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풀어헤친 그물에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갈라내듯이 참 생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을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교회에서 헌신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인가?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곁을 떠난 자들이 구원을 받은 자들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비록 주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제 아무리 바울의 곁에서 헌신적인 사역을 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가 아닌 단순한 종교인으로서 행했던 일이었다면 그는 결국 지옥불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실함입니다. 그가 아무리 행위에 있어서 완전함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그는 결국 위선자가 되어 지옥불로 향하게 됩니다. 먼저 참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써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분명하게 영접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합니다.

 

14. 집주인 곳간의 옛 것과 새것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13:52)

 

신약 성경 안에서 서기관이라는 명칭을 대할 때마다 대부분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하는 일을 맡은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조했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기관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서기관들을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당시에 서기관들이 하고 있었던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 특이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은 바로 왈덴시스파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톨릭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자들인데, 정죄의 내용은 가톨릭의 부패한 교리를 반대한다는 것과 성경만을 유일한 그들의 권위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톨릭의 핍박을 피해 성경을 들고 알프스 산맥 등의 산간 지방으로 피신을 하고 계속해서 신약성경 사본을 만들어 배포하면서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 오스트리아, 폴란드, 독일 남부의 바바리아, 보헤미아 등 유럽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비록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이었지만 그들에 의해 보존된 성경은 결국 오늘날 바른 성경을 가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서기관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는 것이라면 신약성경은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옛 것과 새 것을 내오는 집주인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이 말씀이 옛 것은 구약, 새 것은 신약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주장들은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말씀이 적절하게 조화를 시켰을 때 복음은 능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는 성경입니다. 또한 신약은 그분의 활동 기록과 그의 제자들의 증거, 그리고 장차 다가 올 세상과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만을 가지고 전하게 된다면 오늘날의 유대인들과 같이 여전히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는 처지에 있어야만 합니다. 반면에 신약만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지라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데 많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전하는 자는 구약과 신약을 조화롭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또 다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미 들은 지식과 새롭게 얻어지는 지식의 조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 얻은 지식들을 무시하고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많은 시행착오들을 통하여 성숙해지고, 이러한 과거의 일들은 현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현재의 삶이 가장 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과거의 일들을 돌아보는 지혜가 없이 오늘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나이가 많은, 즉 경험이 많은 이들을 존경할 것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그들이 비록 과거에는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했더라도 그들이 살아 온 발자취는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 앞에 설 때에 현재의 일들만을 가지고 평가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 생애가 주님 앞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결코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삶을 엉망으로 살면서 앞으로 잘하면 되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생각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은 결코 하루 한 순간의 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주님의 일을 힘써 오다가 영적 침체를 맞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자기보다 뒤늦게 믿음의 삶을 시작한 사람이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자기보다 더욱 많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가 영적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살게 된다면 그러한 경우가 발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 모든 것들을 평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죄 가운데 살았는데 무사히 하루를 넘겼다고 방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아무런 가책이 없이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반드시 심판을 받겠지만 순간순간 죄 문제를 주님으로부터 해결 받고 깨끗한(거룩한) 생애를 살아간다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영적 의미로 구약과 신약에 관한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단순히 성경에 국한되어 이해되기 보다는 우리의 삶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 앞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어떤 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서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죄들이 있다면 지금 주님 앞에 자백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주님은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다시는 그 죄들을 기억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들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15. 새 포도주은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태복음 9: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마태복음에서뿐만이 아니라 마가복음 222절과 누가복음 537절부터 38절에 이르기까지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 가르침이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준비 과정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주님 앞에 서야 할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먼저 말씀의 결론을 정의해 본다면 낡은 가죽 부대는 우리가 주님을 알기 이전에 가졌던 관습이나 고정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와 관련이 있는 것이므로 복음과 관련을 지어 설명할 수 있으며, 새 부대는 이 복음을 담는 새로운 마음, 즉 성경의 다른 표현으로 가난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교훈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 속 인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르침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관습과 고정관념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해박하게 알고 있는 자들이었으며,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기로 작정한 자들이었고, 그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도 거룩한 생애를 살기 위해 힘썼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 하나라도 어길 것이 두려워 언제나 성경을 외우거나 낭송했고, 서로가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구원받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자식들, 즉 마귀의 일들을 수행하는 자들이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이 되었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비참한 인생을 살도록 만든 것입니까?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고 유대인들의 지도자로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면서 상상 속의 메시야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로부터 자신들을 구해내고, 백성들을 가난으로부터 구해내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자신들의 민족이 우월하다는 것을 모든 족속들에게 보여줄 왕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메시야, 즉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나셨고, 병든 자나 가난한자, 세리나 창녀와 같은 자들과 어울리면서 스스로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씀하고 다니셨습니다. 오히려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는 비판하시고, 저주에 가까운 말씀으로 그들을 자극시키셨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생각은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사역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셨을 때에 자신들이 어떠한 자리에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매우 크게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제자들은 도망갔고,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도마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자신의 손으로 몸을 만져봐야 믿을 수 있다고 말했고, 실제로 예수님의 몸을 만진 자입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그가 돈을 맡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자들의 상황이 결코 건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나 제자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문제점은 바로 자신들의 고정관념이나 관습에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맞추어 받아들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거룩하고 온전한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에 담기게 되면 그것이 터져 포도주가 흘러나오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복음은 결코 자신의 신념이나 환경이 맞춰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복음을 자신에게 맞추려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헤치는 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 안에는 고정관념이나 관습으로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상식을 깨고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온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종의 병을 고쳐 줄 것을 구했던 백부장이나 향유를 든 옥합을 깨뜨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던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들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자존심과 고정관념들을 깨고 순수하게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온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유대를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의 권력에 속한 백부장이 자신의 식민지 백성인

예수님께 나아와 오히려 자신에게 명령만 하시면 종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분과 자존심, 그리고 자신을 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까지도 의식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자신을 낮추고 종의 종을 고쳐달라고 구했습니다. 마리아 역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가룟 유다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장면은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그들의 모습과 마음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또한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은 새 부대, 즉 새로운 마음 위에 받아들여야져야 합니다. 복음을 자기 마음대로 받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거나 축소시킨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사람을 보고 그들의 수를 헤아려 계산을 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빌립의 모습보다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지혜로움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결코 노력을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인생을 결정하고 살아가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그 뜻에 순종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부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비워져서 주님의 것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16. 잃은 양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8:12~1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3~7)

 

일반적으로 잃은 양의 비유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주님께서 한 마리의 양이라도 소중하게 여기시고, 그들이 비록 주님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향할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끊임없이 부르시고, 주님께 돌아 올 때까지 일하기를 쉬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결코 그것이 구원으로부터 이탈해서 타락한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 마태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의 말씀까지 읽어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로 마태복음은 그 수신자가 유대인들이며, 누가복음은 이방인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누가복음에 기록하고 있는 잃은 양의 비유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속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누구를 구원하실 것인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죄인, 즉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자가 구원에 동참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잃은 양과 동일한 관점에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주님의 구원하심과 관련하여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먼저 주님께서는 잃은 양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니십니다. 우리는 양을 잃은 목자가 찾을 때까지 찾아다닌다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양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구원하심은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으신 분입니다. 성경은 이미 이러한 주님의 마음에 대하여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누구도 지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심판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구원을 얻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게시며, 그들 가운데 누구도 지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모든 힘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옥에 보내지는 것은 주님의 선택과 심판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얻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교훈은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들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도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들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들에 있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롯의 가족들이 피신하게 될 때에 천사들에 의해서 받은 경고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거나 온 평야()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는 것입니다(19:17). 왜냐하면 그곳은 멸망을 당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한 마리의 양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예수께서 지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즉 천국에 이르는 문은 좁고 길도 좁아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적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13:24).

 

오늘날 주님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자들은 극히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르도록 노력해 보지만 그들은 안전하게 천국 문으로 인도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의 많은 물질과 명예, 권세, 지식과 같은 것들이 그들 자신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그들 자신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데 장애가 됩니다. 바울은 이미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3:8). 그렇다면 그들을 안전하게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회개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회개의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그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을 얻을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목사님과 훌륭한 성경책을 손에 쥐었다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환상도 버려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주님께 나오는 자의 몫입니다. 구원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7. 빚진 종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18:23~35)

 

빚진 종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바로 빚진 종의 모습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여전히 용서하고 계시며, 그들이 죄를 탕감 받은 자로서 용서할 줄 아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주는 깊은 의미를 통하여 더욱 자비로운 삶을 설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빚진 종의 모습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진리는 도저히 청산될 수 없는 빚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인하여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자들입니다. 그것은 누군가 해결해 주지 않고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능력이 있는 자라도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해결을 위해 노력할수록 더욱 깊은 좌절과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빚이 사람을 노예로 만들듯이 죄는 사람을 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을 끊임없이 자신을 질책하고 더욱 경건해지기 위해서 모든 힘을 기울였지만 그들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죄의 문제는 결코 청산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빚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주인이 해방시켜 주거나 하나님께서 종들의 해방을 위하여 만든 절기인 희년이 닥치기 전에 그들이 종의 신세를 면할 길은 없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문제의 해답은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했을 때 자유를 얻을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완전히 처리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한 방법을 취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셔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물과 피를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의 빚이 생명에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 즉 생명을 그 죄 값으로 드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더 이상 죄 값을 묻지 않았습니다. 모든 죄는 완전히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죄 문제를 해결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전혀 살지 못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고난 속에서 살아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과거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은 더 이상 핍박을 받기를 원치 않으며, 오히려 세상과의 분리된 삶을 추구하고 그들에 대하여 대적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에 대한 무례함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존중 받기를 원하고 있으며, 만일 존중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용서에 관한 가르침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반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매우 적절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적극적인 관심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용서라는 말은 곧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바로 죄에 대한 용서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용서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상대방의 모든 부담을 덜어 줄 수 있었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대하여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고 자신의 손해에 대하여 결코 너그럽지 않아서 상대방을 힘들게 만드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가두고야 마는 종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빚진 종은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엄청난 은혜를 입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엄청난 은혜를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빚진 종의 무례한 모습을 보면서 주인은 결국 그를 형벌 주는 자에게 넘기고 맙니다. 그는 결국 제 자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종에게 있어서 가장 치욕스런 자리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가 그런 수모를 또 다시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용서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도 없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바라시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얼마나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여전히 자신만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용서할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혹은 주님의 뜻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정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하여 크게 손해를 끼쳤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8. 선한 목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4-15)

 

이 시대에 참된 목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하여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문제로 인하여 수없이 교회를 옮겨 다니고, 때로는 교회 내에서 목회자와의 다툼으로 인해 실족하는 모습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지만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바른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해답은 오직 성경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유일한 참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목회자가 예수님 사역을 본으로 삼고 따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된 목회자를 구분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거짓 목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첫째로는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가는 자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도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현 세상에서 수많은 구원의 방법을 제시 받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선행이나 구제와 같은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믿음에 행위가 더해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이 분명한 복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진리를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영혼을 도둑질하는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양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희생을 요구합니까? 물론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가진 것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기도 하지만 거짓 목자들의 농간에 희생당해서 결국 실족하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거짓 목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입장만을 중요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들은 결코 양의 편에서 일한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에 대하여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 되면 언제나 그 자리를 피하는 자들입니다. 진리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양들의 피해로 인해 자신에게도 피해를 당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오직 유리한 상황만을 찾아다니며 양을 이용하고 양들이 위기에 처하는 순간에도 오히려 그들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모습을 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거짓 목자들이 양들을 현혹하고 그들을 실족하게 만들고 있으며, 자신의 배만 불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물론 성경은 그들에 대해서도 목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명백한 거짓목자입니다. 그들은 장차 거듭나지 못하여 지옥 불에 들어갈 자이며, 그들 가운데 거듭난 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반드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목자는 누구입니까? 물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유일하신 참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사역을 대신하고 있는 오늘날 많은 양들을 지도하고 있는 사역자들은 참 목자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참 목자는 거짓목자와 반대되는 사람입니다. 참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길로 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구원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연히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오직 그분만을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참 목자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조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참 목자가 갖추어야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목자의 또 다른 목적은 양들에게 생명을 얻도록 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 위에 오르셔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그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완성된 진리입니다. 이처럼 참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는 자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희생의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이미 목자로서의 자격을 잃은 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양들을 먹이는 목자들에 대하여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기꺼이 양들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거짓 목자들은 양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에게 자신에게 대한 순종을 강요하고, 심지어 착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참 목자는 양들로부터 얻으려 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나누어서 양들을 먹이는 자입니다.

 

참 목자의 모습은 단순히 그들에게 자신을 희생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양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에서 모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후에도 제자들을 만나주셨고, 오늘날에는 자신을 대신하여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의 사역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양들에게 꼴을 먹이고, 그들을 살찌우며, 어려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해서 언제나 희생할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참 목자입니까? 아니면 거짓 목자입니까? 또한 나는 참 목자를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짓목자와 더불어 믿음의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참 목자가 되기 위해, 또한 참 목자와 더불어 믿음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19.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비유와 매우 흡사한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낡은 옷이며, 새 옷감조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에 대한 해답은 바로 율법과 복음입니다.

 

성경은 많은 곳을 통하여 율법을 옛 계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복음, 즉 예수님의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옛 것과 새것에 대한 구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비유와는 달리 이 비유의 말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새 옷감조각, 즉 복음을 낡은 옷인 율법에 대고 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낡아져서 버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옷을 제공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복음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복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와 복음의 차이점을 설명함으로써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종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천국, 즉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저히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와 복음의 모습은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여 지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보다 경건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산에 오르기도 하고, 사람들과 격리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공동체 생활이라는 명분으로 집단생활을 하기도 하며, 학교생활이나 직업을 포기하고 오직 종교 생활에만 전념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겁내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이들의 종교성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지옥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우상들과 거짓 전도자들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에도 영생을 줄 수 있노라고 말하면서 헛된 것들을 위하여 수고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사람들의 것을 도둑질하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 진리에 이르지 못하도록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주변에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의 삶을 곤경에 빠뜨리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사탄의 종노릇을 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복음은 철저히 주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결코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종교가 사람들의 의지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오히려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인간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와 복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결코 섞여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만일 종교에 복음을 혼합하려 한다면 그가 바로 새 옷감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결과는 두 가지 모두를 못 쓰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새 옷감 조각에 낡은 조각을 붙이는 경우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하는 자는 없지만 실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경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돌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의식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물론 그것이 믿음의 삶을 위해 유익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권장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식들을 보십시오. 그것은 매우 유전적인 것들이며, 비성경적인 것들입니다. 심지어 많은 부분들이 우상숭배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곧 그것들은 주님이 매우 싫어하시는 것들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것들에 취해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살게 된다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 것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에 대한 비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를 바로 알고, 복음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만 합니다. 과거부터 행해 왔다고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교묘한 술책으로 인하여 믿음의 삶에 독이 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신하고 깨어있는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과제입니다. 무엇이 낡은 옷이며, 무엇이 새 옷감조각인지를 바로 알고 바른 분리와 진리에 대한 결단이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교회사를 통해 본 수 많은 성도들은 바로 이 일들로 인하여 순교 당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영광스럽게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새 옷감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데 사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으시겠습니까? 부디 지혜로운 결단을 통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 선한 사마리아 사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10:30~37)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교훈으로 끝마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강도, 제사장, 레위인, 여관주인이라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입니다(10:25). 지금 이 비유의 주인이자 핵심적인 인물은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따라 살았던 제사장과 레위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고 반쯤 죽어 있는 어떤 사람을 보고는 다른 쪽으로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단순히 매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충분히 예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코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21:11,6:6). 그들의 행동은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매우 흔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선한 일들을 두고도 행하지 않는 경솔한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단어 하나를 두고 서로 논쟁을 일삼기 좋아하며, 사람들이 분쟁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고, 성경의 이름으로는 어떠한 무례함도 용서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외식으로 그쳐서 주님으로부터 크게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각가지 행동들을 소개하면서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은 어떠한 자였습니까? 우리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相從)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4:9). 이 말의 의미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이방인과 같이 취급을 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인들 스스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자들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소개하면서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결국 이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제사장과 레위 인들이 보여주었던 율법을 알고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율법사 자신은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10:27~28).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는 결국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만 그는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삶을 통하여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많은 지식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식만 있고 행함이 없다면 그는 결국 주님과 원수의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쉬운 예로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누가 주님의 원수였습니까? 누가 주님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 죽음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성경을 잘 아는 자들이었고, 또한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으며, 스스로 이 일에 대하여 지도자라고 일컬어졌던 자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메시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입으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던 자들이었지만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가르침을 통해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단순히 공포에 떨면서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 앞에서 최소한 자신의 존재를 낮추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명령을 따라서 순종하는 자세를 가진 자입니다. 그것이 비록 내게 불리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순전히 따르는 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하나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보듯이 주님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또는 그의 신앙 환경이 얼마나 좋은 조건에 있는지, 또한 얼마나 인격적인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주님은 매우 명확하게 답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어려운 이웃을 모른 척 했던 염소에 대하여는 영원한 형벌에, 보살폈던 양에 대하여는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떠한 생애를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보는 결론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믿음의 성지 예루살렘에서 죄악의 땅을 향하는 사람이 강도를 만난 사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품 안에서 벗어났을 때 사탄(강도)의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사마리아인)의 돌보심과 치료하심을 통하여 회복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함으로 돌보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생애가 됩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난다면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21. 밤에 찾아온 친구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11:5~8)

 

밤에 찾아 온 친구 비유가 기도에 관하여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익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우리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이 비유의 주인공과 같이 주님을 귀찮게 하는 기도가 과연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위의 비유를 통해서 이미 선하다는 판정을 받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 두 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기도를 과연 주님께서 들어주실 것인가에 대한 것과, 아니면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물론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이 비유의 말씀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확신이 없는 자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주님은 귀찮을 정도로 기도하며 요청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뜨겁게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간절함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간절하다는 것이 단순히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진정으로 간절한 이들이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그들이 오히려 소리를 지르기보다는 눈물을 흘리는 일에 더욱 익숙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은 우리의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에 대하여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는 간절히 구하고 있지만 남의 문제에 대하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바로 이 문제를 두고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 비유의 주인공이 친구에게 찾아가 빵 세 개를 구했습니까? 바로 자신을 찾아 온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문제로 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고,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자신의 자존심마저 굽히고 친구를 찾아 갔던 것은 자신을 찾아 온 다른 친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 기도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배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의 친구나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가 결코 쉽거나 단순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욱 어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비유의 주인공은 가족 모두가 잠들어 있는 친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친구가 나와 빵을 주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친구가 빵을 준 것이 단순히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귀찮게 졸랐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친구와의 관계에서 지켜주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빵을 구하는 모습은 비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는 자금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오직 친구를 위한 희생의 마음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자신의 위치를 감안하셔서 체면과 형편을 생각하셨다면 결코 세상에 내려오시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하시고자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자 하시는 자세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2:7).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만 합니다.

 

누구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아직도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그 문제의 해결에 매달려 밤낮으로 괴로워하며 기도하고 있다면 이제는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도 한 때는 자신의 문제로 고민을 했습니다. 그는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이 문제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세 번이나 주께 간청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 12:7-10). 그러나 그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낮아짐, 즉 겸손을 통하여 주님께서 높임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명확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채찍질하고(억제하고), 주께 복종하도록 하면서(고전 9:27) 더욱 많은 이들을 복음 안으로 인도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친구, 혹은 이웃 사랑에 대하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신 새 계명입니다(22:39). 이 말은 곧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알고, 세상을 향해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의 삶은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우리는 친구, 혹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희생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친구 되신 주님(12:4)께 얼마나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권면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데 있어서 결코 현재 나의 환경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에게 손님으로서 친구가 찾아 온 시기는 매우 가난했던 시기였습니다. 그에게는 빵 한 조각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친구를 찾아가 빵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친구나 이웃을 도울 때 결코 물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면 이제 우리의 친구 되신 주님께 간구해 보십시오. 때로는 주님께서 귀찮아하실 정도로 구해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필요를 따라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22. 어리석은 부자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복음12:16~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기복신앙으로 물들어 가는 현대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비유의 말씀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 삶을 일구어가고 있는지를 발견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1:15).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까지도 잘 알고 있지만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이러한 경고를 의식하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욕심은 끝이 없어 보입니다. 만족할 수 없는 인생들, 그것이 사람들의 군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끊임없는 욕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산 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령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 했던 아합이라든지, 여리고 성의 무너짐과 더불어 그곳의 어떠한 물건에도 손을 대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을 숨겼던 아간과 같은 이들은 대표적인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재물을 얻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재물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며, 그러한 세상의 것들을 얻은 이후에도 더욱 많은 것들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착취하며, 속이고, 고통을 주는 일들을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고 경고합니다. 결국 세상의 부를 쌓기 위해 힘쓴다는 것은 어리석은 삶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기복신앙에 젖어 있는 자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흔히 간증집회를 하는 자들을 보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담을 이야기 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만일 베드로나 바울이 오늘날 성도들 앞에 섰을 때 어떠한 예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많은 이들의 조롱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했고, 언제나 핍박을 받는 자로서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에 있었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볼품없는 전도자를 세워서 그들의 간증을 듣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위대한 복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을 설명함에 있어서 먼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과연 우리의 소유가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4, 벧후2:1). 이 말은 우리의 소유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들은 이미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 역시 주님의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청지기적인 자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의 재물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소신껏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실질적 소유주인 주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로 방탕하고, 사치스럽게 사용된다면 주님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에 사용된다면 반드시 칭찬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가진 재물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의 과제는 가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그것이 주님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교회에 헌금을 하고, 예배당의 건축이나 각종 기부금을 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이 교회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실생활에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있을까요? 물론 고아와 과부, 즉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돌보는 일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의 양심을 따라 사용하고 있는 재물이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재물을 모으는 방법입니다. 성경은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양식을 먹을 것을 권면합니다(살후3:12).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노력 없이 소득을 구하는 행위에 대하여 옳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아진 재물을 소중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재물을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주어질 상이 달라집니다. 부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이 땅에 재물을 쌓아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 귀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 주인을 기다리는 종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12:35~40)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신약교회 안에서 종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사역자들에게 붙여지기도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 앞으로 다가 올 세상을 맞이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종은 신분으로서의 종이 강조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신분으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사는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종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결국 교회를 부패시키고, 이단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떠한 신분으로 살아가는지를 규정해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마치 세상에서 커다란 행운을 얻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과 장차 받을 보상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상상할 수 없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의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는 자라면 오직 주인의 명령만을 따르게 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주인의 명령을 벗어나서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을 삶에 적용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의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무기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생각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요구하는 것은 복종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지혜롭게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혜의 근본이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주인을 의식하지 않는 지혜, 혹은 창의력은 결국 주인을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다른 불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려 했던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서 이상한 불로 제사를 드리려다가 주 앞에서 죽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10:1-2). 종은 오직 주인의 명령을 바르게 알고 그 일을 온전하게 수행할 때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의 자세를 논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오늘날 기복신앙을 지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의 호화로운 삶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가난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넉넉한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은 종으로서 잠시 주인의 것을 맡고 있을 뿐입니다. 즉 그들은 청지기로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제물과 명예, 그리고 권세나 지식 같은 것을 얻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들의 신앙을 병들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종은 자신이 호화롭게 사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는 목적은 오직 자신의 주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실한 종이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처지를 보면 주인이 잠시 떠난 사이에 그분의 명령을 따라 세상을 살고 있는 자와 같습니다. 즉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께서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결과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준비된 종이라면 주인의 오심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종이라면 조금이라도 늦추어 줄 것을 버랄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언제나 신실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 합니다. 세상도 우리를 열매 맺지 못하도록 환경을 어렵게 만듭니다. 가장 큰 적인 육신은 우리 안에서 죄를 짓도록 지속적으로 유혹합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죄 가운데 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오심을 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결국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이 심판은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서 두 가지 심판으로 나누어집니다. 의인,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주님의 종들에게는 보상이 주어지는 멋진 시상식이 함께 하는 자리가 될 것이고, 예수님을 거절하고 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멸망에 이르는 심판이 됩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가장 큰 영광의 자리가 될 것이고, 불신자들에게는 최악의 날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오심과 함께 어떤 자리에서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멸망의 자리에서 지옥으로 던져지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죽음을 예약한 자들을 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 까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고 있는 종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부디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4. 혼인 잔치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22:1~14)

 

우리는 이 비유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전반적인 역사를 담은 비유라는 사실에 대하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을 말하고, 종들은 선지자들을 말하며,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천국의 사역을 왕이 아들을 위해 베푸는 혼인 잔치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은 이미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지금 진행 중이기도 하고, 또한 장차 일어날 모든 일들을 포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받은 사람들, 즉 유대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의 종(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종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도시(예루살렘)를 태우고 그분의 종들을 통해 본래 초대되지 않았던 사람들(이방인)을 초청합니다. 이 초청에 응하여 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게 되지만 예복(, 구원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결국 바깥 어둠에 내던져지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왜 유대인들은 초청에 응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보면 그들은 이 초청에 대하여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초청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편견과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교만함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왕이 나타나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자신들을 건져내고, 보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이스라엘이 재건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너무도 평범하고, 정치적 욕심보다는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과 더불어 생활하고 계셨기 때문에 메시야로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동기가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보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그들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메시야를 필요로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주로 가르쳐지는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행복한 가정, 여유로운 삶, 그리고 건강하고 형통한 삶이야말로 교회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의 열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든지. 아니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세상에서 잘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혼인잔치, 즉 그분께서 준비해 두신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격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일들에 매어 그 초청에 무관심하게 된다면 우리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초청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관하여는 성경의 여러 곳으로부터 비유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내로 받아들인 남편으로 소개하고 있으며(54:5),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그의 아내로(5:23-32), 그리고 요한은 장차 천국에서 혼인잔치가 있게 될 것을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19:7-9). 다시 말하면 전 세대에 걸쳐서 이 혼인잔치는 이미 준비된 것이라는 것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죄인이었던 사람들 간의 최종적인 화해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사람들이 잔치에 초대하는 방식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큰 잔치는 시간을 특별히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잔치가 있게 될 것이라고 먼저 알리고 잔치의 준비가 마쳐지는 대로 종들이 나가서 인도해 오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5:8;6:14).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천국의 잔치에 초청해 두고 아직 정해져 있지 않은 시각에 우리를 불려 올리셔서 잔치를 올리게 될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잔치가 예정된 것이고 사람들을 초청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더욱이 이 일들을 알려야만 될 종, 즉 이스라엘의 선생들과 지도자들조차도 알리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바르게 알았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으로서 이미 교만함 가운데 있었으며,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듣는 이들을 현혹하여 오히려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배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종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편에 선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미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신실한 그분의 종들을 통하여 천국의 복음을 통한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거짓 선생과 거짓 전도자, 자칭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는 자들을 현혹하여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조건에 관계없이 모두 초청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려는 거짓 종들의 말에 현혹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초청을 받은 자들이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들을 보내어 거듭해서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후로 그들이 재차 거부하고 심지어 종들을 죽이는 일들이 발생함으로써 그들을 멸망시키게 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인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잔치를 하려던 계획을 멈추지 않고 길가로 나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하심, 그리고 예정된 잔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그분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거부했지만 그래도 인내하심으로 우리에게 그분의 종들을 보내셔서 잔치에 참여하도록 설득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그 잔치는 아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잔치는 먼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우리들도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큰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을 사는 동안 잔치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혼인잔치는 결코 포기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그 성품으로 아들을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히시기 위해서 모든 힘을 기울이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최고의 잔치가 됩니다. 전 세대를 걸쳐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잔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잔치를 거절한다면 너무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내 뒤에 오는 심판은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종들을 보내셨을 때 그들은 거부하고 종들을 죽였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은 그냥 보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심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원자로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배척하고 심지어 믿는 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주후 70년경에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멸망하였고, 백성은 결국 흩어져서 약 1900년의 세월에 걸쳐서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나라가 없는 민족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수많은 환난과 핍박들을 이겨야 했으며, 한 때는 민족 전체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혼인잔치를 거절한 대가로 엄청난 심판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멸망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초청에 응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서는 심판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당했던 것처럼 일시적인 심판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시대가 끝나는 순간 심판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들이라면 반드시 그분이 초청하신 자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잔치에 초대되어 참여하게 되었다고 누구나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비록 본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거부하여 대신해서 길가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기는 했지만 반드시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잔치에 입어야 하는 예복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예복을 준비하여 입지만 당시의 풍습으로는 주인이 마련한 옷을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예복을 준비해 놓듯이 주님은 구원받을 자들을 위하여 옷을 입히십니다(61:10, 3:27). 당연히

이 옷을 입은 자만이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지식이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고 가르치는 자는 가라지들이고(13:24-30), 염소들이며(25:41-46), `주여 주여'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7:21-23)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제시 받았습니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10:9,10)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초대를 받는 우리의 입장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잔치에 합당한 자세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잔치에 입을 옷도, 그리고 조건도 모두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부디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여하는 엄청난 기쁨을 놓치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25. 돌아온 탕자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15:11~32)

 

사복음서 중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탕자의 비유'는 죄인을 찾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의 말씀에 관하여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삶을 사는 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방탕하다가 되돌아오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르침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첫번째 부분(11-24 )은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데 대한 기쁨을 말하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25-32 ) 대조적으로 맏아들의 냉혹한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맏아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과 더불어 선택된 백성으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을, 소위 탕자로 일컬어지는 작은 아들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었던 자들을 말합니다. 그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하나님을 벗어나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둘째 아들의 삶을 돌아보면 그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 받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살았지만 결국에는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한 때는 많은 친구들을 두고 세상의 모든 행복을 소유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땅에 기근까지 있어서 그가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여도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한 때는 같이 어울렸을 친구들이었지만 재산이 탕진된 지금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많은 것들을 소유할 때 친구처럼 다가오지만 모든 것을 잃게 되면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배고픔으로 인하여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그것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고 어려운 결정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탁월한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디에도 그를 일으켜 줄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습은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진정한 회개는 절망적인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기다림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묻지 않고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은혜의 복음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의 용서와 구원에 대한 모든 계획들은 우리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시작하셨고, 그 일들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내로서 우리들이 그분 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의 사랑은 어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와 잡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공표하는 것이며, 반지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아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을 신는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유인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종들은 맨발로 다녔는데, 이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다른 사람의 종의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는 다시 자유인으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반드시 죄에게 종노릇을 하게 되는 반면에 하나님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자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가락지, )는 필요성 때문에 제공된 것이라기보다는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맏아들의 모습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에 충실한 자(4:22)로서 행동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맏아들의 이러한 위선적 태도는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건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많은 상속이 주어졌고, 맏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권한도 주어졌지만 자신의 동생이 되돌아오고 그 동생을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아버지와 더불어 동생을 반겨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만 그는 오히려 아버지에게 불만을 나타냄으로써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재산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조차도 독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유대인들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이 맏아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적인 특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간직하려고만 했지, 나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 안에서 이방인들을 몰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로 일컬어지는 이 비유의 말씀은 아버지의 곁을 떠났던 둘째 아들의 이야기만을 다룬 내용이 아닙니다. 이 일들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이며,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가 담겨져 있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헤아려 보다 지혜롭고 능력 있게 세상 속을 살아가면서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더욱 수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좁은 문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13:23~30)

 

이 비유의 시작은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하여 많을 것인지, 아니면 적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기대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구원 받을 자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적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두시려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얻을 자가 적다고 해서 소수의 사람들만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자들이 구원받을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으로 미리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힘쓰라라는 단어에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쉽게 설명을 하자면 구원 얻는 방법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선택하는데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는 순간 어떠한 반응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이들은 우리를 조롱하고, 모욕하기도 했으며, 우리 자신 역시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에 대하여 수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길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갈 수 없노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구원의 길이 과거 한 번의 결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힘쓰라는 단어를 현재형으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구원이 일회성이지만 그 삶은 현재까지 지속적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그것은 단번에 완성하신 것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완성됩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성도들의 삶은 끊임없이 싸워야 하며, 그것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힘겨운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좁은 문에 대하여 보다 냉정한 주님의 가르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한 번 닫으면 결코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한 번 기회를 놓치더라도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 즉 좁은 문은 기회를 놓치게 되면 결코 열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만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 날에는 모든 것이 끝나고, 구원의 문도 닫혀 지게 됩니다. 연옥이라는 곳을 만들어서 비록 구원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게 되더라고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한 번 닫힌 구원의 문은 결코 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놀랄만한 사실을 보게 되는데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이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적절한 교제를 하였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구원의 대열에 함께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물론 우리는 이것이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그들만의 문제일까요? 결코 그렇게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안에서도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들은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합니다(7:22).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3)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아무리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능력을 행하고 가까이 있다 할지라도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구원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이 속아왔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들에게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기 전에 분명하게 제시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 즉 그 뜻을 기록한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사는 자라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말과 거짓된 능력들에 현혹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그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즉 그분의 뜻을 따라 길을 걷고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이 비유의 결론을 내면서 매우 의미 있는 한 마디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정관념의 틀에 빠져 습관적인 믿음의 생활과 진리에 관심도 없이 하루하루를 주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게 된다면 그도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아야만 하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며, 그분의 뜻, 즉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있었을 때 온전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8:9~14)

 

세상 모든 종교의 특징은 그들 스스로의 능력으로 의로워지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까닭에 그들은 자신의 경건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적 우월성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합니다. 바로 이러한 종교적 사고를 가졌던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종교적인 바탕 위에 믿음을 가지려 했던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종교성을 가진 자들을 대표하고, 세리들은 당시에 가장 천하게 여겨졌던 죄인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당시 사람들이 정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판단을 기준으로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가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는 자세를 봅시다. 그들은 서서 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도가 반드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채로 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바리새인들의 자세는 상징적으로 위선과 교만을 가득 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극히 형식적이고, 단지 습관적 행위로서 실행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홀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은밀하게 행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진정으로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들의 행동으로 봐서는 결코 그러한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도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두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경건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그러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기도 내용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그들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쉽게 말하면 자신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완전하다는 것을 하나님께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로워진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의 많은 곳들로부터 그들이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인이 된 사람을 부르러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5:32). 그들은 스스로 구원받을 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이지만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인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과는 다르게 세리들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으로 인하여 성전 가까이에도 접근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다르게 어떠한 기도의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하며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오직 가슴을 치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가슴을 치는 행위는 당연히 그들의 죄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애통하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해 던질 수 있는 말도 역시 단 한 마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주님의 긍휼이 없다면, 즉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는다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절박함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일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주님 앞에 낮아진 모습으로 겸손한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세리가 더 의롭다는 판결을 내리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의 기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즉 믿음은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와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즉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모습을 알고 그 문제의 해결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며, 오직 주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음을 믿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직도 많은 속이는 자들은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복음을 말하지만 종교성에 기대어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그들은 지나치게 세상과의 분리를 강조하여 믿는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도록 만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은 인간의 공로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것이고, 세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 믿음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종교인입니까? 아니면 복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까? 아직도 많은 이들은 자신이 구원 받았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든지 이 세리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구원은 우리와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8. 포도원 품군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20:1~16)

 

천국을 비유함에 있어서 포도원을 예로 드는 것은 성경 안에서 매우 흔한 일입니다. 이처럼 포도원이 천국에 대한 비유로 자주 사용되는 이유는 포도원이 가지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라는 과일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이 천국으로 비유되는데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포도나무가 반드시 심는 자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또한 농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많은 과일들이 있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주인의 손에 의해서 자라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는 그 열매만을 필요로 하는 식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포도나무는 목재로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식물입니다. 포도원이 천국에 비유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식물의 특성과 매우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어느 한 민족이나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민족과 세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어져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심겨지고, 자라왔습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서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포도나무가 목재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고 오직 열매만을 필요로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들, 즉 재물과 명예, 권세와 지식과 같은 것들에 대하여는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으시며, 오직 우리의 마음으로 맺는 영적 열매만을 가치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포도원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천국의 모습들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일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기로 약속을 하고는 품꾼들을 고용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용이 일방적인 적이 아니라 서로 간에 합의된 것이라는 점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복음의 초청에 먼저 참여한 유대인들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응했던 것이 아니라 서로가 약속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로 약속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령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와 더불어 서로 합의하고, 또한 약속된 것들에 대하여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과는 어떠한 합의를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며, 번성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멸망의 위기 속에서도 그들을 끝까지 붙드시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일들에 대하여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것으로만 여기고, 숨기려 하며, 심지어 그분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들까지 행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주님께서 그들과의 약속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지킬 의지를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아래 살아가고 있는 민족입니다.

 

여기에 더할 것은 이방인들과도 합의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한다면 구원을 보장하시며, 또한 그분의 일들을 위해 수고한 만큼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일들을 위해서 지금도 여전히 포도원 일꾼을 부르시듯이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위해 수고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자들은 마치 놀고 서 있는 사람에 불과 합니다. 그들이 비록 세상에서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를 위해 수고하고, 명예나 권세를 얻기 위해 힘쓴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헛된 일들을 위해 수고하는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장차 우리에게 아무런 보상을 안겨다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포도원 밖에서 놀고 서 있는 자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 보상이 정당하게 지급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부름을 받은 자에게는 일 데나리온을 약속하지만 이후에 온 자들에 대하여도 정당한 보상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많이 일하는 자는 많이 얻게 될 것이며, 적게 일하는 자는 당연히 적게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나중에 온 자들도 일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주인이 약속한 것은 정당한 보상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속이는 자들은 구원의 안전만을 믿고 구원을 받으며, 그의 삶이 어떠해도 관계가 없다는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대되는 논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의 많은 곳을 통해서 심는 대로 거둘 것이며, 수고해야만 먹을 수 있으며,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를 얻는 만큼 하늘에서도 보상이 주어질 것에 관하여 교훈하고 계십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꾼을 쓰시는 시간적인 차이를 생각해 봅시다. 주인은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한 후에도 세 시, 여섯 시, 아홉 시, 열한 시에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는데 한 가지는 포도원의 일꾼이 언제나 적어서 일꾼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간에 관계없이 일꾼을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그분의 나라를 위해 수고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그곳은 언제나 많은 일꾼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주님은 그 일들을 위해 수고한 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주인이 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묻자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일꾼들의 하소연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하여 말한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고, 명예, 권세를 위해 수고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봐서는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수고는 헛된 것일 뿐이며, 그들은 소득이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주님의 교회에 속한 자로서 살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포도원에서 일한 자들의 모습은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가 일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먼저 온 자들의 불만이 발동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중 온 자는 상대적으로 감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결론은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말씀으로 정리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많은 관습들과 고정관념들은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직 주님의 명령과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29. 참 포도나무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5:1~11)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우리의 현재 위치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원리 밖에서 살아간다면 먼저 우리 구원의 문제를 점검할 필요가 있으며, 설령 구원을 받았더라도 그들의 삶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의 현재 위치는 어디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이 비유의 말씀은 내 아버지, 즉 하나님은 농부,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포도나무, 그리고 우리를 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5).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아니라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결코 관계가 없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구원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기본적인 교리들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각종 철학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사상들이 난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구원이 가능하다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농락을 당하고 있습니다. 다원주의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세상의 논리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황당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생각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르침을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명백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포도나무 가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열매를 맺게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열매는 나무의 본체에 붙어서 나는 것이 아니라 가지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원리를 생각하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무의 정체성을 무엇으로부터 알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 나무의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는 성경의 여러 곳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7:16-20, 6:44). 우리가 무엇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사실 그것은 매우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어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근거하여 믿음의 여부를 판단합니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들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구원이 확실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믿음의 기초는 당연히 지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어떠한 일들을 행하셨는지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을 믿을 수도 없고, 설령 믿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어떠한 사건이 있었는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지식을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내면에 분명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많은 지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성경적인 논쟁이 있을 때마다 많은 성경구절들을 예로 들면서 가르치려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많은 지식은 있지만 영접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주님의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어떠한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은 그가 현재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따라서 거룩하고, 겸손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붙어 있는 가지라면 거짓말과 욕심을 따라 살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여전히 세상에 중심을 두고, 그 열매를 따라 정욕과 욕심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관계없이 구원에 대하여 스스로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에서는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언제나 거룩함과 겸손함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열매가 그들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습니다.

 

이 포도나무와 관련하여 내려진 결론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7-10). 예수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된 성도는 당연히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거나 좋아하는 감정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사도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하여 정리해 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고전13:1-13). 그것은 그리스도의 품성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들은 기아에 허덕이는 민족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고, 전쟁의 위협 속에서 상처 당한 사람들을 치료하며, 때로는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삶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충분한 보상을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범주 안에는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그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자신의 별명이 사랑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해야만 합니다(요일 4:8). 즉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대적인 자들에 대하여도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주님의 일들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을 지닌 성도들의 모습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 있다면 당연히 그분의 공급하심에 따른 포도 열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쪼록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0. 큰 잔치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4:15~24)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흥미로운 구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잔치를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잔치를 위해 모든 것은 완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 있다면 잔치를 치르는 일입니다. 그 일차적인 대상은 초대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 했습니다. 이 거절하는 이들이 누군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거절하는 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땅을 샀다는 이유로, 또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은 장가들었다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그들의 거절은 매우 정중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한 이유가 과연 잔치를 거절할 만큼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거절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잔치에 참여할 수도 있었으나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후에 잔치를 준비한 주인으로부터 분노를 사게 만들었습니다.

 

땅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들었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 넉넉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유한 자들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잔치가 그들에게 호기심을 충족하거나, 그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별로 매력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잔치에 초대한 주인의 분노를 봐서는 그들이 과거에 주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현재는 그들에게 더 이상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고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후 그분의 보호 아래 살아왔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들만이 정해놓은 율법의 틀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일까지 행했습니다. 그들의 부요함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그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자리는 이방인에게로 옮겨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19:24, 10:25, 18:25). 부자들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최종적으로 목적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들의 삶은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 거절하자 주인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명령합니다. 이들을 초청하는 장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잔치에 초대된 대상이 외적 환경에 있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초청한 자들로부터 거절당한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에 의해 거절된 천국 잔치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이 잔치에 누구나 참여하도록 허락된 상태지만 여전히 자리는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천국 잔치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놓은 상태이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이 잔치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9:37-38). 이 일꾼들을 통해서 여전히 비어 있는 잔치자리에 사람들을 채우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잔치에 초대된 자들의 수가 차게 된다면 그 때는 세상의 끝이 오게 됩니다.

 

우리는 잔치 집을 채우고자 하는 주님의 의도를 보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종들에게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불러 온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강제적으로 교회 안에 사람들을 데려 오는 것으로 주님의 명령을 올바르게 따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매우 왜곡된 집단으로 평가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인도하는 곳은 천국 잔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참여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복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2:11~14). 우리가 누군가를 천국 잔치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일에는 열심히 하지만 그들이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일에는 매우 소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이 비록 주님의 교회의 지체가 되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억지로라도 천국 잔치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잔치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분의 종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 일들을 진행하고 계시는 주님의 열정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합니다. 아직도 이 잔치의 자리는 많이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수고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천국 잔치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날들을 보기까지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1. 악한 농부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12:1~9)

 

이 비유의 일차적인 대상은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행했었던 모든 상황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포도원을 만들어 울타리를 둘렀다는 것은 그들을 특별한 백성으로서 다루셨다는 의미이며, 포도주 짜는 틀을 놓을 곳은 예루살렘 성을 상징하며, 망대는 성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해 쓰임 받았던 특별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그들에게 세를 주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암시합니다. 세를 주었다는 것은 결코 소유가 농부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모든 관리를 하고 있더라도 그 소유가 주인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이 결코 그들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의 소유가 주님에게 있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인이 농부들에게 일을 맡기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한 것은 그만큼 그들에 대하여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일을 맡길 수 없다면 주인은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만큼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님의 신뢰와 오늘날 교회를 향한 주님의 신뢰와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모든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수고할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추수 때가 되어 주인이 종들을 보내 포도원의 열매를 받으려 하자 오히려 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내더니, 또 다시 종들이 오자 돌을 던져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그를 수치스럽게 취급하여 돌려보내고, 급기야 다시 종이 올 때에는 그를 죽이고 또 그밖에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악해져 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주님의 종으로 활동했던 많은 선지자들이 이같은 수모를 당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를 때린 것이나(20:1,2), 이사야를 죽인 것이나(11:37), 스가랴를 돌로 친 것(대하 24:20,21)을 들 수 있지만 선지자들을 대했던 유대인들의 악행과 박해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활동하시기 직전 셰례(침례) 요한을 죽였던 모습까지 계속되었던 일들입니다.

 

이처럼 많은 종들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들을 지속적으로 보낸 것은 여전히 자신의 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여전히 농부들에 대하여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신뢰가 없었다면 당장 그들을 심판하여 멸할 것입니다. 주인은 결국 자신의 아들까지 포도원에 보냅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기적과 표적들을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결과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에 대한 대답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입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자신이 죽으실 것에 대한 암시를 하신 바가 있습니다(16:21;17:23;20:18).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의 의식인 사도신경으로 인하여 마치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은 예수님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던 자이며, 심지어 손을 씻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던 자입니다(27:24~25). 오히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일을 맡겼던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일들을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맡길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멸망시켜 흩으셨고, 이방인들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스러운 일들을 지속하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 비유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이지만 그분의 성품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날들을 위한 일들은 주님의 교회에게, 더욱 구체적으로는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에 유대인들이 행했던 것처럼 그분의 종들을 때리고, 핍박하며,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심판하신 것과 같이 온 인류를 대상으로 심판하실 날이 곧 오게 됩니다. 이 심판의 날들을 잘 준비하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바랍니다.

 

 

 

 

 

 

 

32. 요나의 표적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12:38~40)

 

예수께서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어떠한 표적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그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그들의 가난을 해결하고,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표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스스로가 정해 놓은 기준 아래서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 속에서 함께 묻혀서 생활하시려는 예수님의 모습보다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과거에 다윗이 이루었던 영광스러운 나라를 재건하고, 그들을 통치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비록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고, 신앙적으로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에돔 출신의 분봉왕 헤롯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소망은 더욱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수께서는 그들이 기대하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왕이 되는 기적을 보이시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생각처럼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모습으로 보이시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삶 속에서 기적을 베푸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메시야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표적들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야로서 결코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먼저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해져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여러 차례 언급하셨고, 결정적인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간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형적으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결코 타락했다고 규정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을 아는 자들이었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규정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미 헤롯왕과 결탁하여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눈을 속이고, 경건한 자들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에 헤롯과 더불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교활한 자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명예와 권세,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요나 자신이 특별한 표적을 행한 장본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나가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기적을 나타낼 상황도, 능력도 없었던 상태였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요나를 비유로 말씀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나는 사건의 배경과는 관계없이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바로 요나 자신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구원받은 것과 같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상징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표적을 일으킨 자가 아니라 표적 그 자체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이들이 논쟁하는 부분들을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삼일 밤낮을 시간상으로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삼일 밤낮을 계산하여 24×3=72 시간으로 어떤 이들은 수난 주간에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으로 미루어 약 36시간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산이 논쟁의 중심에 떠오르게 된 이유는 교회가 점차 의식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날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주일성수의 개념을 도입하여 주일을 거룩한 날로 규정하고, 성금요일이라고 해서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시간이라고 단정하고 철야기도회를 한다든지, 물론 오늘날도 유대인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을 거룩한 날들로 규정하여 지키고 있는 자들도 상당 수 있는 상황에서 삼일 밤낮은 날들을 중요하게 다루는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 지켜지고 있는 날들에 대한 개념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물론 이것을 현재의 시간에 맞추어 토요일로 규정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문제를 단 한 마디로 정의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12:8). 우리가 특정한 날이 아닌 모든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함께하는 우리의 모든 시간들은 곧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날들에 매여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곧 초등원리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4:9-11). 우리는 특정한 시간에 매여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시간을 주님과 더불어 살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예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는 말씀에 대한 논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룩하신 예수께서 굳이 땅속까지 가실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생각으로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많은 문제를 낳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시면서 잠든 성도(죽었던 성도)들이 일어나 부활 후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는 장면이 나옵니다(27:51-53). 그들이 부활한 것은 단순히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포함한 것입니다. 그들이 죽은 후에 영혼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당연히 땅속, 즉 땅의 심장부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영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고, 그들과 더불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요나의 비유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오늘도 오직 한 가지 표적만을 보이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의 모습들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자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진리 안에서 견고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위해 수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33. 지혜로운 청지기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12:42~48)

 

청지기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과 같이 우리가 어떤 꿈을 꾸든 그것을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뉴에이지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지기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청지기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결국 자신의 개인적인 소유가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것도 가져갈 수도 없으며, 그 소유를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분의 소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결국 그분의 것을 잠시 맡아서 관리할 뿐입니다.

 

청지기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주님께서 일시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것임을 알고 그것을 신실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땀을 흘려 열매를 거두고, 노력을 통해 명예나 권세, 지식과 같은 것들을 얻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청지기의 정신을 크게 위반한 것입니다.

 

청지기는 결코 자신의 생각대로 주어진 것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생각과 요구에 따라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자라면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말씀을 앞에 두고 어떠한 일을 행하기 전에 그분의 명령을 바로 알아 그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 안에서 매우 모범적인 청지기였던 엘리에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15:2). 그는 자신의 생각과 소신에 상관없이 이삭의 아내를 얻어오라는 아브라함의 명령을 들고 가서 리브가를 데려옵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도 내면에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디발의 집에 청지기로 들어가서 자신의 직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그 집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39:4,6). 청지기는 다만 재산을 관리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그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들, 즉 재산이나 명예를 자신들의 소유물로 생각해서 함부로 사용하려 한다면 그는 결코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청지기로서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결코 후회스럽지 않은 이유는 그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심판하는 권세가 주어지며(19:28), 왕 노릇 하게 됩니다(딤후 2:12). 비록 세상에서는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되겠지만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모든 세대에 걸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날만을 고대해 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살고 있었던 세대에는 주님께서 재림하시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인내로서 재림의 시간을 늦추고 있습니다. 그 까닭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세대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님께서 반드시 재림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앞에서 드러나실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충성스럽지 못한 청지기들은 단호한 심판이 있게 될 것을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우리는 충성스럽지 못한 청지기들이 남종과 여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는 장면들을 목격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분명한 사실은 자신들의 직분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폭력적이고 무절제하며, 방탕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청지기들의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도 많이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재산을 늘리거나 명예를 지키고, 또한 얻기 위해서 힘쓰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일시적으로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도 속이고 상처를 주면서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고백을 했던 것과 같이 가장 어리석은 삶의 방법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특정한 사람들에게 부와 명예와 권세를 오랫동안 지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통해 그들을 넘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는 잠시 동안이면 끝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청지기의 삶을 통해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나누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나누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적절한 공급을 하는 것은 청지기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구제와 봉사들을 통하여 우리가 가진 재물과 지식, 그리고 명예를 적절하게 나눈다면 주님 앞에서 칭찬을 듣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삶의 모형은 절제된 삶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함부로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검소하고 규모 있게 사용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까?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본래부터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동안 우리에게 맡겨진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가에 따라서 칭찬 듣는 그리스도인, 아니면 책망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악하게 살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심판은 가혹할 수도 있습니다. 부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지혜로운 청지기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4.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3:6~9)

 

전통적으로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입니다(80:8-11, 5:2, 24:3, 9:10). 포도원에 왜 무화과나무를 심느냐고 말하는 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포도원에 여러 가지 과실수들을 심는 것은 보편적으로 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왕하18:31, 4:4).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가 없는 백성들에 대하여 심판을 하시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인류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또한 사랑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죄에 대하여 보실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그분께서는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백성들에 대하여는 심판을 통하여 멸망을 시키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정상적인 나무라면 일 년에 한 번씩은 열매를 맺어야 하지만 무화과나무는 삼 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충분한 기다림이 숨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오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를 베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스스로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쓸데없이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손실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다만 율법만을 붙들고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엄청난 손실을 안겨다 주기 때문에 심판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포도원 지기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됩니다. 이 포도원 지기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에 의해서 베어지게 되자 여전히 금년에도 그대로 두고 만일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뒤에 베어버리자고 제안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형식적이며,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당시의 권력들과 타협하고 있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던 세례(침례) 요한의 외침에도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회개의 복음을 전했지만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는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을 통하여 여전히 포도원지기, 즉 중보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관심이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심판하시려는 마음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회개의 열매를 맺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보듯이 예수께서는 비록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지라도 다시 부활하셔서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셨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이 회개의 열매를 맺고 구원에 이르도록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멸망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군에 의해 완전히 흩어지게 되었고,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버림받은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 이 세상의 멸망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로 넘어왔습니다. 무화과나무인 이스라엘이 베어진 자리에 이방인이라는 새로운 나무가 심겨졌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지기이신 예수께서는 이 나무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가 여전히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 심판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멸망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멸망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모든 준비를 완료하셨습니다. 다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시며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를 맺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자신을 돌아보고, 만일 우리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형식과 습관에 머물러 있다면 돌이켜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여전히 죄 가운데 신음하는 자들이 있다면 속히 회개의 복음을 전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35. 부자와 나사로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16:19~31)

 

우리가 이 말씀을 비유로 분류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예수께서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비유들이 실제 사건들을 통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이 비유가 자칫 상징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면 많은 혼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지옥에서 고통 중에 있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의 대화를 보면서 자칫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연옥, 즉 낙원과 지옥으로 가기 전의 대기 장소가 있는 것처럼 포장이 된다면 교리상의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며, 결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공급된 양식을 받아먹어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하여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자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성경의 많은 곳을 통하여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물질을 대함에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마음으로 대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까마귀를 통해서 엘리야를 먹이셨던 사건은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말씀을 대하면서 단순히 부자와 거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예로 들며 부자는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 세상의 부자들이 천국에 갈 수 없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에 담긴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통한 교훈입니다. 성경은 종종 유대인들을 부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언제나 소외된 자들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특히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상대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유대인들은 부자인 듯 보이지만 정작 낙원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방인들을 포함한 소외된 자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소외되고 낮은 자들의 편입니다.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복음이 필요하고 결국에는 그들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의 많고 적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부자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것을 대신 맡은 청지기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가난한 자입니다. 반대로 가난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오히려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즉 가난함의 차이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눈에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을 가난하게 할 필요가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거지가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에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천사들은 성도들의 삶을 보호하고 지키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명을 다할 때 친히 인도합니다(27:23, 1:14). 어떤 이들은 천사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만 천사는 오히려 믿는 우리를 섬기고, 때로는 우리를 대신하여 영적 싸움을 대신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주로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가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특히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자손이므로 반드시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긍휼을 베풀어 줄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하는 내용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구한 내용으로 봐서는 그는 더 이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결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 문제를 더 이상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자신의 다섯 형제, 즉 가족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특히 그는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이방종교, 특히 무속신앙을 가진 자들은 죽은 자들이 다시 나타나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귀는 이러한 생각들을 교묘히 이용하여 사람들을 속입니다. 이미 사울 왕이 무당을 통해 사무엘을 불렀던 사건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아마도 부자는 사무엘처럼 나사로를 다시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말은 명백합니다. 결코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도 없으며, 오직 그들에게 주어진 모세와 선지자, 즉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속이는 자들이 다양한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병을 고치고, 기적들을 행하며,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 특별한 기적들을 통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내 안에서 특별한 감정의 변화를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두셨고, 그 길만이 참된 길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단순히 두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구원에 길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6. 불의한 재판관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8:1~8)

 

예수께서는 자신을 불의한 재판관으로 비교하여 기도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이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원수를 갚아 주기를 원하는 한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있어서 재판관을 괴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재판관이 그녀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문제를 해결했던 것은 그녀의 간절한 호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이처럼 불의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많은 이론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여야 응답 받는 기도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들에 의해서 보다 논리적이고도 짜임새 있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반드시 형식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형식을 갖추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끈질기게 조르는 사람들은 결코 형식과 논리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도 체면이나 예의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얻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자세를 갖기 원하십니다. 구하는 자는 주님 앞에 자신의 체면이나 환경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상황에 대하여 미리 짐작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기도를 하면 응답해 주시지 않을 거야"하고 미리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대하여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조차도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11:9,10).

 

우리의 기도가 결코 일회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 단순한 의무적인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어떤 모임에서 기도했다고 해서 그 기도가 끝났다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지속해야 하는 기도의 내용이라면 우리의 남은 생애동안 계속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절박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주님께 끈질기게 구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주님이 반드시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응답은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간구의 의미는 "구하거나 요청하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 주는 의미는 이보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영어 성경에서는 "supplication"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탄원하거나 애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떠한 것을 기대하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박한 심정으로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까닭에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할 때 반드시 기도와 간구를 했다는 말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결코 하루 이틀 사이에 응답 될 수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 응답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문제가 해결이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내 대신 보내 줄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기도와 간구를 계속했습니다(1:14). 그들이 "언젠가 주시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애원하며 기도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 가운데 임한 성령의 충만함은 단순히 주님의 일방적인 공급에 의해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간절함이 있었기에 더욱 놀라운 역사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러한 기도와 간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간구하는 자의 기도는 계속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다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기도와 간구에 대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4:6,7). 우리는 매일 영적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만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탄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기 위해서 들락거립니다. 만일 단순히 대처한다면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바울은 기도뿐만 아니라 간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함으로 구해야 합니다. 자신을 지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시간들을 싸워야만 합니다. 이 싸움의 과정을 승리하려면 반드시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와 간구가 필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와 간구를 지속할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6:18).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지체로서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지속적이고도 간절한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점차 기도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간구하는 모습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았던 이방인 재판관이 지칠 정도로 간절히 구했던 과부의 기도를 들어주듯이 주님은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언제든지 들어주실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오늘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얼마나 간절하게 구하고 있는지 돌이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7. 종의 의무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누가복음 17:5~10)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용서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난 후에 믿음을 더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질문으로 인해 책망을 듣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의 존재가 매우 적은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도들이 믿음이 없든지 아니면 겨자씨보다도 적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은 단지 믿음의 양이 아닌 그 내용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겨자씨가 비록 매우 작은 씨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믿음의 분량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믿음의 분량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12:3). 그러나 믿음 분량이라는 것은 생명이 소유되고 난 다음의 일입니다.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의 편에 서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겨자씨보다 적은 믿음으로도 놀라운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바라는 바를 이루어 주실 수 있다는 주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은 마치 능력에 일정한 계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 안에서 신실한 자들은 더욱 많은 능력과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실제로 제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오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종의 예를 들면서 믿음이 있다는 것의 의미와 믿음을 가진 자의 자세들을 설명하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겨자씨와 종을 비교하는 있는 장면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종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겸손과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종이 밭을 갈거나 가축을 치고 돌아 올 때에 주인이 그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도리어 그에게 이르기를,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이 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종은 그의 일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와서도 여전히 주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인은 종이 자신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향해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라고 고백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종의 자세는 주인으로부터 무언가를 바라는 자세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일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어진 명령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충분한 보상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몰론 세상일은 우리가 행한 대로 그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이 땅에서 결과를 기대한다면 그는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 중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최소한 성경 안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고, 이 세상에서도 많지 않습니다. 만일 그에게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서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비울 수 있는 겸손함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겸손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결코 실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그 명령을 따라 살기를 소망하여도 마음속에 교만함이 싹트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실행될 수 없습니다. 종의 마음을 갖는 것은 비단 사역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자들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자세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결코 쉬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와 같은 이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까지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높은 자리에 앉을 것만 생각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전도자들이 믿음에 대하여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결과가 자신의 성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대한 예배당 건물과 명예를 갖는 것으로 믿음의 크기를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믿음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들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현재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주님 앞에 겸손하며, 순종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언제나 그분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며, 최선을 다하여 그분의 일을 감당해 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있기 전에 먼저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분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자입니다. 종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8. 불의한 청지기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누가복음16:1~13)

 

이 비유의 주제이자 결론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물로 번역된 단어는 맘몬인데 이 단어는 부, 혹은 부의 신을 가르치는 말로, 이는 개인의 삶에서 신과 같이 중요해진 돈이나 재산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위기를 맞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재물을 융통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청지기는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종이기도 하지만 자유인으로서 고용된 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논쟁할 수도 있겠지만 비유의 핵심이 청지기 자신이 아니라 청지기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으려 합니다.

 

이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아마도 횡령을 하거나 부실한 관리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주인은 재산에 엄청난 손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주인은 그의 관리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인은 손실에 대하여 직접 알고 청지기를 부른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불러서 회계보고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이미 해고 통보를 받은 상태에서 인수인계를 위하여 장부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고민을 안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청지기의 몸으로 살아 온 그가 육체적인 노동은 엄두가 나지를 않고 더욱이 구걸해서 먹고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현재 상태는 매우 절망적이면서도 급박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이제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신속하게 결단해야만 합니다. 현재 그는 피할 수 없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물질과 재능과 명예와 지식과 권세들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단지 청지기로서 맡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실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마치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 얻은 것처럼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만 아니라 교만한 행위입니다. 언제나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과제입니다(19:13;25:14,15;고전 6:20;벧전 4:10).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이 살아남을 방도를 생각하면서 빚진 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합니다. 여기 빚진 자들이 증서를 위조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대부분 청지기와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증서를 다시 쓰게 함으로서 속임수가 들키지 않도록 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자를 받는 행위가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나(22:25;25:36,37; 15:7, 8;23:19,20), 청지기는 당시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곤란에 처하게 되면서 그 이자만큼 탕감해 줌으로서 주인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고 사람들에게는 선심을 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채무자들에게 많게는 절반을 적게는 1/5 정도의 부채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탕감을 해 주는 데는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쫓겨난 뒤 채무자들이 자신에게 입은 은혜로 인하여 생계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숨어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비록 불의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황스럽습니다.

 

주인의 말 가운데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하는 말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청지기의 행동은 잘 못된 것이었지만 그것을 지혜롭다고 단정 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더 지혜롭다는 것입니까?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과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이웃들에게 선한 행위를 베풀고 있습니까? 그것에 대한 답을 이 불의한 청지기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기서 불의한 재물은 부정직하게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얻은 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옳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친구들을 사귀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친구는 가난한 자들과 불우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지혜로운 자라면 그들에 대하여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12:33; 19:21;25:31-46).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한 것과 같습니다.

 

재물은 언젠가 사라져 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때가 옵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에 재물을 남겨 두지 않고 오히려 하늘에 쌓아 두는 지혜를 가지게 된다면 그는 다가 올 세상에서 엄청난 부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선을 베풀어 줌으로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장차 받게 될 보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 즉 불의한 재물에 신실한 자란 재물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돈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주고받고 또 보관하는 등의 경제생활 영역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재물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까닭에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재물이 결코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익을 주면서도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재물이 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39. 두 아들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첫째에게 가서 이르되,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21:28~32)

 

이 비유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숨은 뜻이 있습니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한 모습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도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을, 둘째 아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세리와 창기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더욱 큰 관점에서 생각하면 첫째 아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둘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 주님께로 온 이방인들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님을 거절한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구원의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의 상반된 모습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포도원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포도원이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5:1,12:10), 신약시대에는 교회나 혹은 세상의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의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하여 가르쳐 주고자 하는 진리는 주님의 명령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첫째 아들은 부르심이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복종할 생각도 없었고 이에 대해 뉘우칠 마음의 변화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성전 밖에서는 그 맹세를 이행치 않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입술로는 대답을 했지만 그의 삶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의 행동 역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대하여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두 아들은 결코 칭찬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은 거짓과 위선의 죄를 범했으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하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첫째 아들은 예의 바른 자이지만 정직하지 않은 자이고, 둘째 아들은 정직하지만 고집이 센 자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온전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누가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순종했던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장소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곧 진정한 회개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방향이 자신으로부터 아버지에게로 바뀌어 지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통하여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며, 그것이 안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입술로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 즉 삶의 방향이 바뀌었을 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속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6:29)이라고 주장하면서 삶의 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은 삶의 열매에 있습니다. 성경은 더욱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5:11).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 없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한 결론을 맺으면서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요한이 의의 길로 그들에게 왔어도 그들은 믿지 아니하였으나 세리들과 창녀들은 그를 믿었으며 그들은 그것을 보고도 그 뒤에 뜻을 돌이켜 그를 믿으려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면서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선민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그들은 나중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상황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 속에서 살았는지를 알게 되겠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청난 재앙이 됩니다.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우리의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삶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열매라는 것이 단순하게 물질이나 몸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향기들입니다. 이는 곧 사랑, 기쁨, 화평, 친절, 오래 참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쟁을 일삼는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분명한 변화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40. 종들에게 나누어 준 므나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9:11~27)

 

한 므나의 가치는 일반 노동자들의 3개월 정도의 품삯으로 로마 화폐로 환산하면 약 100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액수입니다. 장사를 하기에는 많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매우 적절한 금액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시고자 했던 내용의 중심은 단순히 개인의 재능을 통하여 결과를 기대하기 보다는 열 명의 종들, 즉 모든 이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모습을 보고자 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5:14-30 에 나타난 달란트의 비유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이 두 비유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두 비유는 매우 다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종들의 재능을 고려하여 각각 다르게 나누어 주었지만 므나의 비유에서는 종들에게 동일하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보상을 하는데 있어서도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의 뜻을 잘 이행한 종들에게는 같은 보상을 했지만 므나의 비유에서는 결과에 따라 다르게 보상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의 명을 거역한 종에 대하여는 무서운 형벌로 다스린 반면 므나의 비유에서는 그에게 맡겨진 므나만을 회수하는 것으로 끝냅니다. 이 외에도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단순히 얼마 동안 여행을 했지만 므나의 비유에서는 귀족이 자기를 위해 왕권을 받은 뒤에 돌아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에서 보듯이 이 두 비유는 같은 비유라고 말할 수 없으며,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가르쳐진 비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비유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사명을 결코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가 주님을 알고 밀접한 관계를 유자하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열 명의 종에게 한 므나씩을 맡겼지만 소개되고 있는 종은 열 므나를 남긴 종과 다섯 므나를 남긴 종, 그리고 한 므나를 감추었던 종입니다. 이렇게 소개한 것은 아마도 일반적인 결과들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이 남긴 종, 그리고 적당히 남긴 종, 마지막으로는 전혀 장사를 하지 않은 종의 모습을 통하여 교훈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종들은 그들이 주어진 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겸손한 자세로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결과만을 보고합니다. 그들은 매우 충성스러운 일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하여 묵묵히 일하고 그 결과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충성스러운 일꾼은 오직 그 결과를 가지고 주님께 다가갑니다.

 

그러나 한 므나를 가지고 온 종의 모습을 보면 충성스러운 종과 얼마나 대비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갖은 핑계와 변명으로 자신의 잘 못을 감추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의 대답을 보십시오. 그는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이나 나태함을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포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는 심각한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이 귀인이 종에게 한 므나를 맡기면서 당부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장사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이 명령을 잊고 있습니다. 어쩌면 알면서도 자신의 불순종을 의도적으로 숨기려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고, 또한 변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이러한 처지가 된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면서도 충성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충성스럽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물질과 시간이 넉넉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일에 바쁘고 주님의 일들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않아도 불이익이 없을 것으로 확신하겠지만 그들은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큰 낭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충성스럽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며 모험이나 희생을 하지 않습니다. 한 므나를 맡은 종은 자신이 장사를 하여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마치 주님의 일을 하려는 자들이 자신으로 인해 교회가 큰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결코 새로운 일들에 대하여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게으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이 안전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잘 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장사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주인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왕위을 받아 가지고 오기 위해 상당히 오랫동안 먼 나라로 떠나 있었습니다. 종은 안 돌아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확신이 점차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주인은 왕이 되어 돌아왔고, 한 므나를 받은 종은 자신의 가진 것마저 빼앗겨버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따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힘쓰며 살아가지만 지치고 힘들어서, 혹은 속이는 자들로 인하여 그 확신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오십니다.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의 모습을 고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에 대하여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실패한 일들에 대하여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며,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을 멀리할 때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사함으로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많은 열매를 맺은 자들에 대하여 주님은 그 수고에 합당한 보상과 기쁨을 주시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안일하게 살아가는 자들에 대하여는 책망과 함께 그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들조차도 거두어 가십니다. 부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들을 주 안에서 충성스럽게 감당함으로 많은 열매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1. 잃어버린 드라크마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5:8~10)

 

한 드라크마의 가치는 한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오늘날의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가 과연 이 여인에게 있어서 이토록 소중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것을 찾을 때까지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는 모습이나 찾은 후 자기 친구들을 불러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이 일에 대하여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찾았을 때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이토록 한 드라크마를 찾았던 이유는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열 드라크마는 오늘날 결혼 예물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대 결혼 지참금 형식으로 드라크마 열 개를 묶어 주는데 여자는 그것으로 머리를 장식합니다. 그것은 여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재산이기도 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심지어 당시 유대 여인들은 잠을 잘 때도 드라크마 열 개로 만든 장신구를 풀어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이 열 개의 드라크마로 묶여진 장신구 중에서 한 개를 잃어버렸을 때 그 충격은 매우 심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은 돈의 가치를 넘어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받은 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그 예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드라크마를 잃고 예물로서의 가치가 손상이 되었을 때 여인은 큰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돈과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만일 이처럼 소중한 것들이 분실된다면 커다란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의 전 인생을 소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자, 즉 죄인들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온 마음을 쏟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 여인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예수께서 복음 전도자들과 더불어 복음의 등불을 켜고 구원할 죄인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면서 여전히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다니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많은 곳에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려는 간절함에 대하여 표현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죄 아래서 저주받을 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찾으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부르시고, 또한 다가가고 있습니다.

 

여인이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죄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이 돌아 올 때까지 지속해서 찾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데 그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참으신다는 의미는 결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속해서 그분의 일꾼들과 함께 찾아다니시며 모두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의 기쁨을 생각하면 주께서 잃어버린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경제적인 손익계산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친구들을 불러 함께 즐거워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찾았기에 친구와 더불어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잃어버린 아들, 즉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죄인 한 사람을 마치 아들이 돌아 온 것과 같은 주님의 심정에 대하여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것은 아들이 매우 훌륭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도 한 드라크마가 큰돈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소중하게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가 훌륭하거나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16:26). 주님은 여전히 그 귀한 것들을 찾고 계십니다.

 

드라크마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인 한 사람의 구원을 통하여 하늘에 속한 모든 것들이 그 기쁨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천사들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으며, 죄인이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때에 다양한 방법으로 도울 것입니다.

 

실제로 천사들은 성도들의 삶에 밀접하게 관여하고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자로서 예언과 경고(18:9,10; 13:2-24; 2:13), 인도와 교훈(24:7,40; 14:19; 1:20,21), 혹은 보호(32:24-29; 18:10)와 같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천사보다 못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구원받는 이후에는 오히려 천사들의 도움을 통하여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드라크마의 비유를 통하여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이 여인과 같이 간절함으로 죄인들을 찾으신다는 사실과, 또한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하시기를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에는 주님께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죄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진정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기뻐하심을 보기 원한다면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를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고 입술을 열어 구원을 복음을 소개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42. 열 처녀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25:1~13)

 

마태복음 25장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이 내용은 소위 종말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가장 난해한 내용이기도 하며, 대부분은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이용하여 구원은 결코 안전하지 않으며,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교회시대에 적용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에 대하여 구원받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안에 구원받은 줄로 착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교회 시대에 적용할 수 없는 이유는 열 명의 처녀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신부가 될 처녀, 즉 교회를 순결한 한 처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11;2). 최소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 있는 처녀들이 결코 교회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이 처녀들을 교회로 가정하여 생각한다면 신랑 되신 주님께서는 여러 명의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진리를 크게 벗어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처음부터 한 아내에 한 남편의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2:24, 19:5). 오늘날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원칙을 뒤집어 보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변하지 않는 것처럼 이 진리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교회 시대로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섯 명의 처녀들에게 기름이 떨어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시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기름이 성령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시대에 성령이 소멸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결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시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됩니다. 신약 시대, 즉 교회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는 성령을 거두어 갔던 때가 있었습니다(51:11). 구원과 관련해서도 그들은 사울과 같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시대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 대하여 양자됨을 결코 취소하시지 않습니다. 신부 된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모두 들림 받게 됩니다. 그 동안 성령은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모든 삶과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내용은 기름이 떨어진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얻기 위해 다른 다섯 처녀들에게 빌리려 했지만 실패하자 사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기름을 얻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한 수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교회 시대를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구원은 오직 은혜로 얻어진다는 사실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이 내용을 교회시대에 적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연옥을 주장하는 가톨릭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서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사람인 그들의 사제가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심지어 죽은 자들과도 교통하여 그들의 공덕, 혹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거짓 진리입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 안에서 누룩과 같이 자라고 있는 매우 위험한 교리입니다.

 

이 비유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연속되는 환난을 거쳐 나온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 교회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시대나 교회시대에 성도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자세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언제나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입니다. 환난 시대에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구원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칫 졸며 자게 된다면 구원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4:7,5:8).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그들의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이후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귀로부터 수많은 방해를 받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가 비록 구원이 취소되는 경우를 경험하지는 않게 되더라도 최소한 주님 앞에서 회계보고 하게 되는 날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생명이 있는 자는 자라게 되고, 그의 지혜도 자라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방해하는 마귀와의 싸움에서도 승리해야만 합니다. 이 일들을 위해서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기도함으로 성령과 더불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회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나, 환난 시대 성도들이 구원에 이르는 모든 일들이 결국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언제나 깨어 있는 자세를 잊지 않는 성도만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족한 것은 없는지, 마귀에게 틈을 주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고 건강한 믿음의 삶을 위해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3. 종들에게 맡겨진 달란트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태복음25:14~30)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능, 혹은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여 열매를 맺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가 유대인들이라는 점 때문에 이 말씀의 적용이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지만, 이 말씀이 교회 시대에 꼭 필요한 이유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삶에 대하여 회계보고 할 날이 있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재능과 은사들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결과를 안겨다 줍니다.

 

주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주님은 결코 그러한 인생들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서 엄청난 경고와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에는 지옥으로 던지시기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과 같이 무책임한 삶과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고정관념의 틀 안에서 자신들의 의지만을 기대고 사는 자들에게 대하여 단호하게 지옥으로 보내실 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 시대에도 똑 같은 원리들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똑 같은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모두가 동일한 자리에 앉게 된다면 사람들을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을 주저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노력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서 주어지는 보상은 다를 것이라는 점입니다.

 

공평하다는 것의 의미는 동일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 만큼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에 대하여 공평하다는 말의 의미는 곧 그분의 기준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근거하여 보상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을 하지도 않고 보상을 바라는 것은 강도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가지고 열매 있는 삶을 사는 자만이 온전한 보상을 얻게 됩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점은 역시 종들에게 각각 다른 분량의 달란트를 주었다는 점입니다. 참고적으로 한 달란트는 약 6,0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므나의 비유에서 한 므나가 100데나리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달란트라는 말이 재능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 재능, 즉 은사를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안겨다 줍니다. 물질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맡기신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만 청지기가 되어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우리가 물질 뿐만이 아니라 성격, 지식, 교육, 의지환경과 같은 모든 것들도 주님께 속한 것으로서 최선을 다해 잘 관리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 말하면 우리의 가진 모든 재능과 능력들도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열매를 맺을 필요가 있습니다.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듯이 능력과 재능에 따라 소유가 맡겨졌다는 것은 서로 다른 고유의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그에 따라 적합하게 소유하도록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될 수 있겠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이 서로 같을 수 없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실수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믿음의 삶과 원리들을 적용시키려 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지도자의 특징을 따라가기를 원하며,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하여는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누구나 찬양을 잘 할 수는 없으며, 잘 가르치지도 못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며,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교회가 요구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잘 못된 것이 아니라 매우 당연합니다.

 

성경은 교회가 하나의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2:5, 고전12:20). 그 안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들이 모두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손과 발은 서로 다르며, 눈과 입, 그리고 눈이 서로 같은 기능을 하지도 않고 또한 그들이 있어야 하는 위치가 서로 다릅니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들의 기능을 올바르게 수행할 때 몸의 기능은 완전해 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성경은 이 다양함에 대하여 구분하기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기적을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타 언어), 통역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고전12:8~11).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갑니다. 은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직분에 있어서도 사도, 선지자, 교사, 기적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돕는 자, 다스리는 자, 방언을 말하거나 통역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주어진 일들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얼마나 충성스럽게 일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는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오자 그는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게으르기 보다는 주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열정이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성경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사람의 말이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충성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한 달란트를 가진 자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를 가진 자는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는 것을 주님이 더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 장사해야 했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칭찬받기 원한다면 성경을 통하여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림의 때에 반드시 회계보고를 하게 될 것이며, 또한 심하시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장차 받게 될 보상의 문제와 연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 그리고 맡겨진 직분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충성스럽게 헌신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4. 양과 염소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31~46)

 

이 비유의 대상이 유대인들이이라는 점 때문에, 이 교훈은 대환난이 끝난 후 있게 될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심판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서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일차적으로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들을 모으고 심판하는 장면입니다. 이 심판은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심판이 아닌 민족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일반적으로 심판은 한 번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크게 세 종류의 심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의 심판입니다(고전3:11-15, 고후5:10, 14:10). 이 심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에서 있게 될 심판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일들을 행한 것들을 불태우고 나무나 짚과 같은 것들은 사라질 것이고, 오직 금, 은 보석들만 남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심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상을 주기 위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심판은 세상 끝 날에 있게 될 백 보좌 심판입니다(20:11-15). 이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과는 다르게 천년왕국이 끝난 후 모든 불신자들에게 행해질 심판입니다. 그들은 이 심판 이후로 불 호수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것은 사탄의 마지막 반역이 있은 후 땅과 하늘이 모두 불에 타 소멸된 후 공중, 즉 크고 흰 보좌에서 이루어지게 될 심판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심판에 대하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두 개의 심판에 관하여는 대부분 기억하지만 민족들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대부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 심판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7년 대환난이 오기 전에 공중으로 들림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대환난을 통과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들은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난 이후에 벌어질 사건이라도 이 땅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 지에 대한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계시록을 배워야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예수께서 소개하고 있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바로 민족들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형제들 중 가장 작은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우리 이웃이나 구원의 대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신약성경 안에서 매우 강조되어진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민족들을 향한 심판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떤 민족이 약한 민족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들의 심판과 관련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여기에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민족을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수많은 공공의 적을 두고 있지만 대환난 시대가 오면 그들은 모든 민족들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대환난의 시대에 주님으로부터 형제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민족은 오직 이스라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은 주님의 때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여전히 구원의 문을 열어 두셨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이미 성경의 많은 곳들로부터 가르치고 있는 이웃에 대한 마음입니다. 비록 이 비유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과 관련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들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자세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오래전부터 이웃에게 선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내용으로 가르쳐왔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결코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구원이나 심판으로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교리적으로 매우 큰 혼선을 빚을 수도 있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심판 받게 됩니다. 민족들의 심판이 있게 될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우리의 이웃을 그리스도를 대하듯 선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언제나 유지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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