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전문)

조회 수 2700 추천 수 0 2010.06.09 17:51:03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며...

 

저는 이 서신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설명한다면 "아들과 종"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더 이상 종으로서의 삶을 살지 말도록 강력하게 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들과 종의 관계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표면적인 문제점은 그들은 다시 율법을 따라 믿음의 생활을 지속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이 다시 종이 되려고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4:9)

 

바울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은 오늘날의 상황과 흡사한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 받은 은혜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셨음을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모습이 많이 바뀌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덧 성경이 원하지도 않는 관습과 유럽적인 생활을 지속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들과 사람들의 속성을 사탄은 교묘하게 이용하여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거짓 복음들이 활기를 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들은 대부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구원이 은혜로만이 아닌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이러한 거짓 복음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을 지키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짓 교리들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묵상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율법으로 돌아가는 현상들을 막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돌아오는 일들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오늘날의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는 그들을 단순히 책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다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서 충만한 생활을 누리게 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는 동안 오늘날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들춰낼 수 있겠지만 그들을 책망하거나 비판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복음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될 갈라디아서 묵상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욱 온전해지고 결코 거짓 복음에 현혹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권위(갈라디아서1:1-5)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어떠한 권위 아래서 말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러한 말을 먼저 해야만 했던 이유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권위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처음 12명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선출되었던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 받은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그 까닭에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자신의 부르심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권위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열심히 있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고,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던 자였습니다. 그의 부르심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승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22:21)

 

그의 부르심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부르심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이미 준비되어진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였고(고전14:18),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도 여행을 하는 도중 위기에 닥칠 때마다 로마의 시민권을 드러내 보임으로서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운 자로서 때로는 지식인들과 변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도로 이미 준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의 권위는 결코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셨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는 이 권위 아래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교회 안에서도 당시와 같은 일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교단 총회에서 안수를 주는 방법을 통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역자로서의 권위는 결코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소명이 없이는 사역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사람이 인정하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들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복음(갈라디아서1:6-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

 

복음에도 다른 복음이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이 아니면 당연히 다른 복음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미 이 복음에 대하여 말한 바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사도행전20:24)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은 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외의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복음과 대조가 될만한 다른 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행위, 또는 율법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의 형태가 가지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는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쌓는 선을 통해서 그들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으며, 또한 남의 구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가진 율법이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자신들의 가르침을 교회로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만일 그들이 은혜의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된다면 결국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에서부터 온 천사라도 예외 일 수 없다고 강력하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다른 복음은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신비주의자들이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정성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질 것을 가르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조차 가르치지를 않으며 다만 그들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뉴에이지 사상을 가진 자들은 스스로가 경지에 이르러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치며,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이든지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며, 이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는 자는 결국 저주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행위나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브리서9:28)

 

우리가 아직도 우리가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아직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조심하십시오. 그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며, 우리가 그의 가르침에 현혹되었을 때, 우리 역시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부디 다른 복음에 넘어가지 않기를 위해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기쁘게 하는가?(갈라디아서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이 시대에 사역자들은 복음을 바로 알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이미 은혜의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현저하게 이단으로 규정된 일부 거짓 교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의 사역자들은 구속의 은혜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었으며, 또한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들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도 바른 진리를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 지키고 있는 많은 예배의식에 이교도들이 사용하는 의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그릇된 해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마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부터 행해 온 일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반발을 이겨 낼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누가복음12:5)

 

사실상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은 분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두려워 바른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고 사람들의 뜻에 맞추어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결국 버림받은 사울 왕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대표적인 왕이었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15:24). 그러나 상대적으로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거대한 장수 골리앗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왜 이 시대에 그토록 많은 거짓 복음이 성행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변은 유감스럽게도 참 복음을 위해 고정관념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하는 많은 사역자들이 그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그늘에서 "이제 나만 혼자 남았다"고 말했지만 6,000명을 준비해 두셨던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셨듯이 이제는 주님께 소명을 받은 자들이 일어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서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사탄이 교묘하게 교회를 파괴하고 있는 가운데 더 이상 머무르지 말고 그곳으로부터 나와 더 이상 재앙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요한계시록18: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더 이상 죄가 있는 곳에 머물러 있기를 거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들의 죄와 더불어 재앙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명백해졌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어디로부터 왔는가?(갈라디아서1:1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

 

오늘날 많은 전도자들은 더욱 분명한 복음을 알기 위해 많은 곳을 찾아 다닙니다. 좋은 현상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심지어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 대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도 치열한 경쟁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잘 알려진 대학교는 재수, 혹은 삼수를 거듭하면서도 입학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노력들이 온전할 것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일이 오히려 위험하거나 온전치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말을 잘하고 성경이 능통한 자라 이 사람이 전에 주의 길을 배워 영이 뜨겁고 주에 관한 것들을 열심히 말하고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니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하게 풀어 설명해 주니라(사도행전18:24-26)

 

아볼로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 교사로서 매우 뛰어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곳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주의 관한 것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많은 지식과 열심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해서 비로소 온전한 복음을 접할 수 있었고, 이후로 분명한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볼로의 열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것은 온전해 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나온 복음을 전해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온전한 복음을 접했을 때만이 복음은 더욱 큰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결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나 열심을 통해서 결실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분명한 복음을 깨닫고 아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특별한 지식을 얻는 것으로 복음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것들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르침 중의 대부분은 사람들의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자의 깨달음과 가르침이 때로는 그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두가 동일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깨닫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결코 사람들로부터 들어서 깨닫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선포하고 있는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했던 이유는 그의 복음에 권위를 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통해서 또 다른 교훈을 던져 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출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 된 것이므로 그 분을 통해서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사도행전17:11,1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자에게 지나치리만큼 의존합니다. 이 말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은 각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복음 전도자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씀을 깨닫고 이해를 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겠지만 자칫 거짓 복음에 현혹될 수도 있고, 또한 주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을 통해서 깨달음을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종교 안에 있을 때에(갈라디아서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13,14)

 

바울이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종교 안에 있으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를 크게 파괴하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와 여자를 끌어다가 감옥에 넘겨주는 자였습니다(8:3).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죽는 것에 대하여 매우 당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자였습니다(8:1,26:10).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사람들을 핍박했던 자였습니다(13). 그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보다 유대인들의 종교에서 앞서 나가 전통에 매우 열심 있는 자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14).

우리는 종교가 가져다 주는 위험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들조차도 기독교라는 종교의 범주 안에 가두어 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모두 기독교인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카톨릭과 통일교 등을 포함한 전혀 다른 믿음을 가진 집단들까지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카톨릭은 한국에서는 따로 구분하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기독교회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종교와 복음은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종교"에 있었다고 표현한 부분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의 노력과 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하는 일에 열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종교적인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종교를 따라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종교는 언제나 행위를 앞세우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와는 매우 반대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데 반하여 복음은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자신의 의를 더해감으로써 경건한 삶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 질 수 있다고 믿는 반면 복음 안에서 사는 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알고 고백하며, 오직 주님만이 의로우시며 우리는 그분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종교는 마약보다도 심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질상 악한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선한 행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약이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복용하지 않을 수 없음 같이 종교가 더욱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더욱 열심을 다하여 충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종교는 끊임없이 성경 안에서 바르게 믿는 성도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드러난 이단 종교들보다도 더욱 위험한 이들이 바울과 같이 전통에 따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들이 발견되면 정죄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교회를 핍박하는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인의 탈을 벗고 오직 복음 안에서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소명 받은 자의 자세(갈라디아서1:15-24)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라디아서1:16,17)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뒤 이 문제를 누구와 상의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그는 혈육과도 상의하지 않았고, 심지어 제자들과도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처음 주님을 만난 곳이었던 다메섹으로 돌아가서 삼 년 동안을 머물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은혜의 자리에서 그의 사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와 함께 십오 일을 지내고 야고보를 만난 후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계속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던 것은 명분을 가지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이 결코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후로 그는 복음 전도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 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소명을 받은 뒤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소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소명이 가져다 주는 많은 어려움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사역자들을 찾아 다니면서 자신의 소명을 어떻게 감당 할 것인지를 상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가족들과 현재 사역을 하고 있는 자들의 대부분은 그의 사역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앞으로 당할 희생과 핍박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오히려 사역을 할 수 없도록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는 주님께서 분명한 소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로 인하여 사역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흔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소명을 받은 자들은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명하게 알고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사역을 준비하는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준비가 있다면 자신이 가진 복음이 분명한 것인지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소명 받은 자들이 분명한 복음 위에 있는지 확인하는 기관인 신학대학교들이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조차도 이미 성경과는 거리가 먼 교육기관임을 시인할 정도로 부패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이 시대가 부패되었다고 해서 자신만의 교리와 신학을 가지고 제 멋대로 가르친다면 더욱 큰 문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그의 사역을 위해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난 것과 같이 바른 복음을 가진 자들과의 시간을 나눔으로써 복음의 기초가 보다 분명한 상태에서 전하는 일들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소명은 받았지만 그들만의 교리를 가지고 증거함으로써 성도들을 혼란케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간 바울(갈라디아서2:1,2)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2)

 

그 뒤 십사 년이 지나서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도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더니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가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포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전달하되 명성 있는 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하였으니 이는 어찌 하든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2)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는 그가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열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는 이방인 전도와 관련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그곳으로 가게 된 것은 스스로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음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의 자그마한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주님의 손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했던 일은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전함으로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논쟁이 되어 더 이상 변질이 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계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그가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분명한 것인가를 말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행함에 있어서 결코 경솔하게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이방인 구원의 문제를 두고 논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발견했지만 당시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명성 있는)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접촉을 함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며, 또한 그들 앞에서 이방인 구원의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갖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각과 소신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그것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접촉과 더불어 적당한 기회를 살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행동을 통하여 매우 중요한 두 가지의 자세를 보게 됩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를 두고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십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주님의 계시가 있고 난 후에야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 바울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어떠한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뜻을 따라 진행되어 지는 일들은 언제나 많은 문제와 논쟁만을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결코 경솔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와 기회를 필요로 합니다. 만일 우리가 불의함이 드러날 때에 감정만을 가지고 이 일에 대처하려 한다면 오히려 많은 역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에 대하여 충분한 계획과 접근 방법을 찾아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보여준 접근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복음이 변질 된 상태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란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복음을 가진 자들이라도 지혜롭지 못하게 책망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더욱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증거와 지혜로운 접근 방법을 통해서 이 시대의 잘 못된 복음을 바로잡아 갈 계획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 온 거짓 형제(갈라디아서2:3-5)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3-5)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점이 있다면 자유를 속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과 율법이라는 명목으로 복음의 중심 안으로 들어와서 주인 노릇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왔던 디도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이 분명해지자 그들은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아직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예루살렘 교회에서 복음이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율법을 버리지 못하는 거짓 선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사도행전15:1,5)

 

거짓 선생들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며, 또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아직도 그들이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요구에 대하여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굴복하지 않은 것은 보다 분명한 복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할례를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입니다. 간단한 외과적 수술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수술이 가져다 주는 육신적인 아픔 때문에 할례를 거절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변질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할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은혜의 복음 위에 율법을 더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더 이상 복음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복음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도 사탄은 피가 없는 구원을 이루도록 광야에서 유혹하였고, 제자들에게도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지켜 온 율법을 통한 구원을 복음과 더불어 가르치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거짓 선생들이 은혜의 복음만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 위에 행위를 더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르침은 언제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와 사람들을 종교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이 추가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입니다. 많은 거짓 선생들이 그토록 구원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고 행위가 따라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결코 속아서는 안됩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주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죄와 상관없이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복음을 맡은 자들(갈라디아서2:6-10)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9)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설명하면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사실상 이들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가 이들의 이름을 거론하려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그들은 바울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상 세 명의 제자들은 바울의 사역을 보고 받기 전까지는 실제로 유대주의 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범위를 떠나려 하지 않았고, 오직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역을 지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복음 전도자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신을 쓸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번번히 해명해야 할 정도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는 세 명의 지도자들과 교제의 악수를 함으로서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고 유대인들 앞에서도 복음 전도자로서의 당위성을 말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꾼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역은 이교도, 즉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서로 인정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일꾼들을 쓰시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정관념의 틀을 넘어 상상 밖의 사역을 계획하시고 또한 여러 장소에서 놀라운 일들을 하도록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머무르고자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더욱 적절한 곳에서 사역을 하실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역을 맡은 자들은 실제로 그 분의 종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역을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더욱 훌륭하고 정확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고, 많은 것을 듣고 배웠으며, 성령의 충만함을 가장 먼저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복음 증거자로서 당연히 더욱 왕성하게 사역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그들이 가장 정확한 복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고, 바울은 그 때문에 자신의 사도성을 매번 입증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경험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그분의 일꾼을 쓰심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장본인이었지만 복음을 알게 된 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자로 효과적으로 쓰셨던 것입니다.

 

복음을 맡은 자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비록 능력이 있고,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을 하도록 하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비록 무능해 보이고, 연약한 자라 할지라도 큰 일을 하도록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종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분으로는 주님의 자녀임이 분명하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분의 사역을 감당하는 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맡은 자로서 보다 지혜롭게 그분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책망 받은 베드로(갈라디아서2:11-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14)

 

바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수제자로 일컬어졌던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복음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믿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있었고,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행동에 대하여 다른 유대인들과 심지어 바나바조차도 베드로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함으로서 같은 위선을 저지르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을 계속해 왔던 바나바의 위선은 더욱 바울을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베드로의 무책임한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명의 지도자가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베드로를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는 자신의 행동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좋은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의 결과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어떤 지도자는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을 의식하며 행동을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지도자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을 복음 안으로 인도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하여 오히려 복음이 훼손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복음 전도자들이 가장 명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때때로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복음 전도자들의 부패되고 상식을 벗어난 모습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들은 재산권 분쟁으로 성도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며, 때로는 목회 세습 문제로 골치 아파하기도 하며, 교회 안의 분쟁을 세상 법정에 중재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들이 복음 전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재산을 보호하기만 한다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이라도 동원할 태세입니다. 이는 베드로의 위선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5:8)

 

사탄은 오늘날도 그의 사역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많은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활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표적은 지도자들을 넘어뜨리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잘 못된 행동과 가르침으로 인해서 사탄은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많은 성도들을 실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너무도 많이 벗어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모습들을 알면서도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소명도 없이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주님의 명령만을 행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 올 복음의 변질과 성도를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언제나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갈라디아서2:15-18)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는 각 교회마다 서신을 쓸 때 언제나 이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때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유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서의 결론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말하고 있고(3:28),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2:8). 그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변질을 시도하려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믿음 위에 행위를 더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미 없게 만드는 것이기 까닭에 바울은 많은 지면을 통하여 믿음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은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매우 힘겹게 지켜오고 있는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를 그들의 종교 안으로 들여오면서 믿음 위에 행위를 더하는 작업을 계속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결국은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됨으로써 막강한 힘을 이용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학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 가톨릭에 의해 죽었던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핍박만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 안의 사제로 있었던 루터, 그리고 성공회의 사제로 있었던 웨슬레와 같은 이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접하고는 바로 회심해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고, 또한 말을 타고 다니며 전 세계를 누벼가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다닌 자들입니다. 교회 역사상 위대하게 쓰여졌던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분명한 진리를 깨달은 자들입니다.

 

오늘날에는 넉넉하리만큼 보급된 성경과 훌륭한 복음 전도자들에 의해서 바른 진리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많은 거짓 전도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변질이 되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 위에 다른 것들을 더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행위를 통해 믿음을 얻으려는 자들입니다. 또한 믿음의 결과를 물질과 건강에 연결시키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온갖 속임수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던져 넣고 있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오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므로 다른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가르침, 구제, 봉사, 전도 등은 그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믿음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야고보가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음 것이라"(2:17)고 말했듯이 믿음이 있는 자들은 그에 따른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있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구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믿음 위에 행위를 더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에 대하여 결코 넘어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믿음 안에서 말씀이 가르치는 바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갈라디아서2:19-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이미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모습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이 곧 구원을 받은 것처럼 가르치는 자들이 오늘날에도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믿음의 형태에 대하여 지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직 우리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이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은 또 다시 율법을 들추어내며 율법대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 까닭에 많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시 어리석은 가르침으로 인하여 실족하고 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과 더불어 살게 된 것은 우리 삶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품성을 닮아가게 될 것이며, 세상의 죽어져 가는 혼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비록 거듭난 이후에도 육신으로부터 오는 죄의 모양들이 남아있기는 하겠지만 주님과 더불어 지혜롭게 극복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가 진정 거듭난 자라면 언제나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행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의 자리라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뛰어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조종되는 기계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과 우리가 죄 된 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함께 모든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때로는 친구가 되어 주시며, 때로는 상담자가 되어 주시고, 때로는 곤경에 빠진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해결자가 되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어떤 테두리 속에 가두어 두고 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도 존중하시며, 언제나 곁에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의 곁을 떠나시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고자 한다면 주님께서는 슬피 울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어리석은 가르침에 현혹되어 따라가고 있다면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있습니다. 수없이 계속되고 있는 죄의 유혹에 대하서 경고하고, 피할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오히려 더욱 죄의 길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 된 우리와 더불어 함께 살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부디 주님으로부터 관심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질문(갈라디아서3:1-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5)

 

바울의 질문에는 갈라디아 성도들에 대한 책망이 함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오히려 율법을 따라 가는 모습을 강하게 책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받은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다 냉정한 자세로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책망이라는 것은 어느 지도자의 일방적인 강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객관적이면서도 상대방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남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주장과 생각만을 말하려 한다면 오히려 거부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도자의 권위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권위는 자칫 위험한 상황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가로채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모습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매우 모범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보다 객관적인 상황에서 복음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그들이 받은 성령이 믿음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율법으로부터 온 것인가? 그들 가운데 나타난 기적들이 율법의 행위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부터 온 것인가? 를 말함으로써 그들의 잘 못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동일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복음의 본질을 벗어나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들추어내며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가르침으로서 거룩한 삶에 이르기 위한 행위가 또 다른 구원의 방법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이 방법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전하면서도 쉬운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래도 자신의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이러한 사람들의 속성을 이용하여 구원에 이를 수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혹 구원받은 자라도 보상이 없도록 현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가르치지만 실제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는 생각을 심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고 오히려 대적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질문을 통하여 매일의 삶을 다시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도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에 대하여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율법적인 삶에 매여있다면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를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갈라디아서3:6-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는가? 우스운 질문이겠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이전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의 순종과 헌신이 그를 구원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미 복음을 선포해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복음이 있었는가? 바울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말하고 계시며, 그 믿음은 오늘날 우리들이 믿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고린도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고린도전서15:3-6a)

 

우리는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었으며, 그분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장차 오실 그분을 준비하며, 순종함으로 믿음의 본을 보이기도 한 자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구원을 율법의 행위로 얻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경계하면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도 가르쳐 주고 있는 중요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아벨,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 믿음의 선진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모세 이후의 율법 시대에도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종 의식을 행하는 속에서 구원을 얻을 것을 생각했지만 실상 그 의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교리가 무너지게 된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교리의 변질은 기독교 역사의 초기부터 계속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약시대에만 구원을 줄 수 있는 분으로 제한을 시키려 합니다. 문제는 결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약시대에 국한 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새로운 구원자를 필요로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자신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우며, 새로운 종파를 형성하여 교주가 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이단 종파들이 성경의 가장 기본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이 사실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 세대를 걸쳐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갈라디아서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0)

 

우리는 바울의 말을 통하여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도 없으며 가치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 율법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오늘 우리들 가운데 숨을 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있음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와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3:20)

 

그렇다면 율법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죄를 알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많은 곳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율법의 속성상 그 아래 있는 자들이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죄를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의 속성을 한발 더 앞서 가서 율법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고소하는 자라고 말하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한복음5:45)

 

율법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저주 아래 있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상 능력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죄 가운데 두어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고소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이 그렇지만 법은 죄 앞에서는 매우 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을 정죄하고 지옥으로 보내는 데는 매우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실상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실체입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선생들이 나와서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주님께서 완성해 놓으신 각종 절기와 의식들마저도 회복시키려는 운동을 벌이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말하다가도 다시 저주 아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종교심을 부추기며, 더욱 사악한 자들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매도하는 일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절대 속지 마십시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로 인도할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에게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을 펼쳐 보여주십시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말하고 싶어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부디 이 시대에 거짓선생들의 꾀임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신 저주받으신 예수님(갈라디아서3:11-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

 

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께서 그곳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매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십자가는 사실상 고대로부터 저주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일부 사탄 숭배자들이나 락 음악을 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것이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그들의 상징으로 십자가 모양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벨론 시대로부터 계속되어 왔던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의미는 바로 그들이 만든 종교에 의해서 희생을 하셨다는 또 다른 의미를 말하며, 바로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죽으심의 의미가 가져다 주는 놀라운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관심은 그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 선한 일들을 많이 행하면 천국에서 많은 보상이 있을 것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자신의 의로움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2:8)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께서 이미 치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저주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너무도 단순한 이 진리에 대하여 우리가 거부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히 저주의 대상에서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할지라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오히려 지옥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전혀 나무(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순종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저주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도저히 깊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입게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라면 그 깨달음과 동시에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너무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약화시키기 위해 믿음에 행위를 더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만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주님은 더욱 더 풍성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성령을 주시고, 또한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며,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저주 받으셨다는 이 한가지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씨 그리스도(갈라디아서3:16-18)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16)

 

우리는 과연 아브라함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셨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구약의 몇몇 구절들을 뺀다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는 구절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부분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특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은 너무도 확실하고 풍성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세기13:15)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세기17:7,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세기22:18)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고 있는 이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고, 이제 이 땅에 오셔서 복의 근원으로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씨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은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씨가 되신 것입니다. 그것의 최종적인 목표는 열매를 맺는데 있는 것입니다. 만일 씨가 심기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24)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죽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이 한 알의 밀, 즉 한 알의 씨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으심의 목적은 바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는 그곳에 만족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분의 최종적인 목표는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열매는 주님이 부활하심 같이 우리도 동일한 몸으로 영화롭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품성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한 상태를 갖게 하려는데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각종 열매를 맺게도 하실 것이고, 죄와 상관없이 거룩한 삶을 살게 하려는 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차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게 하려는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우리 죄인 된 인생들을 위해 씨가 되신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 속에 심겨져서 열매를 맺힐 수 있도록 최선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율법의 수명(갈라디아서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

 

율법의 역할이 무엇이냐에 관하여는 신약시대의 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온 주제입니다. 아직도 이 율법에 관하여 회복시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율법 아래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 사람들의 종교심을 자극하는 많은 거짓 선생들에 의해서 율법의 회복을 위한 작업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제사장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라 모세가 성막을 만들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 권고 받은 바와 같으니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조심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준 양식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라 하심이라(히브리서 8:5)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는 가지고 있으나 그 일들의 형상 그 자체는 아니므로 사람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드리는 그런 희생물들로는 거기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하게 하지 못하느니라(히브리서10:1)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수명이 그 씨,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의 그림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실체를 보게 되면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파트 등의 건물을 분양할 때 그 건물이 어떻게 지어질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모델 하우스"라는 것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건물이 완성되면 이러한 모양으로 완성이 될 것이라고 안내해 줍니다. 율법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완성하게 될 교회와 왕국의 모형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도 자신이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5:17)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도 온전한 교회가 행해야 할 규범들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구약의 율법들 중 많은 부분을 교회가 행해야 할 것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행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최소한의 규범으로 우리에게 권고를 하고 있지만 신약교회는 더욱 경건한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율법이 간음을 해야 죄가 성립되지만 신약교회는 마음으로 품는 음행까지도 이미 죄라고 규정할 정도이며, 율법은 남을 죽여야 살인으로 규정하지만 신약교회는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조차 살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약교회는 더욱 엄격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은 그 수명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고 살아가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새 계명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더욱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과 더불어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디 매일의 생활을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지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갈라디아서3:20-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훈육선생(개역성경에는 몽학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율법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 수명을 다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떠한 역할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실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로마서7:7)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알게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영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율법이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욱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해 줍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기초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이 막연하게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다면 그는 결코 믿음의 온전한 분량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영원히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는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데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은 율법무용론을 주장합니다. 율법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더욱 위태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드는 복음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상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 내는 일을 막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불과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 내서 그분의 은혜 아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살도록 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율법 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의 복음 아래서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매일매일 경험하며 사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차별이 없는 복음(갈라디아서3:25-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

 

복음이 가져 온 또 하나의 놀라운 사건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복음이 완전히 그들을 복음 안으로 인도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실상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었다고 믿어왔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다소 불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들만을 구원하시기 위한 분이심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이러한 특징은 유대인들을 자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관습과 전통까지도 이방인들에게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최소한 복음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이용하여 율법을 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금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냉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에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이나 이방인,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 남자나 여자가 복음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모두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만일 복음이 사람을 구별하여 믿도록 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공평하신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이 차별을 두는 것이라면 많은 이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복음은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둡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동일한 구원을 약속하고 계시며, 비록 인간의 부족하고 연약한 속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4:2,3)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됨의 원리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나됨의 원리는 획일적으로 모두가 동일한 인격과 은사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모두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은사와 사역을 통하여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한 믿음 안에서 한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4:4-16).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이방 민족들은 저마다의 관습과 문화를 간직한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모든 사람들은 서로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상태에서 각기 다른 국가와 민족의 형태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들을 하나로 만들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서로 다른 것들을 모아서 하나의 형태를 갖추도록 만드는 힘은 복음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동일한 생각을 가진 집단으로 만들기를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양한 생각과 문화를 가진 자들이 모여서 오히려 더욱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갈라디아서4:1-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7)

 

바울은 상속을 받을 아들이 나이가 들기 전까지는 보호하는 사람 밑에서 자라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는 율법 아래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 하게 하셨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며 상속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며, 양육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육자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혼을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있어서의 양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로 입양시키셔서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속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도록 하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의 신분임을 바울은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들의 신분이 되었다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역사의 전 세대에 걸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들로서의 신분보다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의 자세를 가지도록 요구합니다. 그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 이상을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신 앞에 나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결코 신을 노하게 해서도 안되며, 그 신이 싫어하는 것들을 행해서도 안됩니다. 그들은 언제나 긴장한 상태에서 신을 바라보며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고대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바벨론으로부터 파생된 종교의 두드러진 특징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가져다 주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분을 아들로 규정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자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종은 죄를 짓게 되면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 받지만 아들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종은 아무리 충성을 다하여 일을 하더라도 상속을 받을 수 없지만 아들은 그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상속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은 곧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기도 하는 부분입니다. 즉 아들의 신분에 걸맞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한 나라의 왕자가 거지 차림으로 이리저리 구걸하고 다닌다면 그는 오히려 왕의 권위를 떨어뜨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단정하고 지혜롭게 처신한다면 오히려 왕의 권위는 더욱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의 권위를 높여드릴 수도 있고, 오히려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속성과 왕국은 전혀 변함이 없겠지만 우리의 행동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느낌들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을 통해 많은 이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머물게 될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덕스럽지 못하고 더러운 곳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 그림은 엉망으로 그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분의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그 왕국은 장차 우리가 머무르며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갈라디아서4:8-11)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9)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다시 이 문제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것은 복음을 더욱 능력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탄이 끊임없이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 종노릇하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를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바울이 수고한 것을 헛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라고 아울러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을 아직도 각종 절기들을 만들어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키고 있는 부활절과 성탄절에 대해서 논해본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이방 종교에서 온 절기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지켜지고 있고, 또한 이제는 기독교의 절기로 자리를 잡은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들 중 하나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러한 절기를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들은 구약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을 대적해 온 종교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성탄절인 1225일은 태양신인 바알의 생일, 혹은 축제일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도 그 날은 예수님의 생일과는 전혀 무관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336개월을 사역하셨고, 유월절(3월하순에서 4월 초순)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만일 예수님의 생일을 지켜야 한다면 9월이나 10월쯤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성탄절이 예수님의 생일이 되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바알의 축제와 더불어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절(Easter day)에 있어서도 이 절기가 본래는 이집트 여신의 축제일이 둔갑하여 지켜지고 있는 절기입니다. 그 날은 다산을 기원하여 계란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대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도 각종 축제 현장에서 주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단어 "Resurrection"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Easter day"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봐도 그 의도가 불손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각종 날과 달과 때와 해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도 복음을 약화시키는 행위로 간주하고 지키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약화시키려는 사탄의 계략으로 인하여 수많은 거짓 복음을 가진 무리들에 의하여 각종 절기들이 만들어지고 많은 기독교회들에게 같이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에 대하여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날들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종 절기들을 지킴으로 인하여 주님의 탄생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기억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것은 복음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러한 날들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기억되고 지켜져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각종 절기를 지키는 일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바울의 이 말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갈라디아서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12)

 

사실상 바울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자신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누구도 자신의 삶과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본받아 생활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바울을 통해 본받을 것이 무엇일까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립보서3:17)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말로 자신을 본보기로 삼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서신의 많은 곳을 통해서 일관되게 자신의 자랑할 것이 복음 외에는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건강도 좋지 않으며, 말도 뛰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지닌 세상에 대한 모든 명예와 지식들을 배설물로 생각했던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복음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바울이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자랑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빼놓는다면 그는 아무런 의미 없이 사는 대표적인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 후에 계속되는 내용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자랑하고 싶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라디아서6:14)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간증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명한 연예인이나 그에 못지 않은 명예나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과거에는 불행했는데 지금은 매우 행복하다는 것으로 간증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말들을 간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러한 말들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속이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신 일보다 더 큰 사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세상에서 물질을 얻는 것보다, 명예나 권세를 얻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십자가 밑에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 즉 간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 안에서 살고 있지 않다면 바울과 같은 생애는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 그리고 누구에게나 자신과 같이 살아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멋진 삶의 모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양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를 겪음(갈라디아서4:13-20)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

 

갈라디아 성도들은 전에 바울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같이, 심지어 그리스도 예수님 같이 영접할 정도로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 가운데 율법적인 열심이 들어감으로 인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고 이제는 원수와 같은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또 다시 그들을 향하여 율법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권면하면서 이것이 해산의 고통을 또 다시 겪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아픔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이 주는 의미는 단순하게 병이 들어서 고통을 받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낳는 일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산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해산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새 생명에 대한 기쁨을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통 없이 새 생명을 얻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여성들은 아이를 낳는데 대하여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많은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제왕절개 수술이라든지, 물속에서의 해산 등은 그 다양한 방법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해산을 한다 하더라도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 해산의 후유증으로 많은 시간들을 요양하며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과학이 발달이 되어도 해산의 고통은 새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새 생명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많은 죽어져 가는 혼들을 이겨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해산의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상처를 받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멀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생명을 낳는 일에 있어서 이러한 각오와 희생이 없이는 단 한 영혼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편안하게 생활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로 받기를 원하며,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새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최대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교회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전하지 않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존심을 버릴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모욕과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 생명을 얻기 위한 일종의 해산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을 두려워한다면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그는 과거에 갈라디아 성도들로부터 매우 사랑을 받았던 자였지만 지금은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러한 아픔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해산의 고통을 느끼며 권면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가르치는 복음이 위대한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한 해산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 아들(갈라디아서4:21-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1)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하여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큰 아들이었던 이스마엘은 먼저 나왔지만 노예 여종이었던 하갈을 통해 태어났고, 이삭은 비록 나중에 나왔지만 자유하는 여자, 즉 약속받은 여자였던 사라를 통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하갈과 그 아들은 쫓겨났고, 사라의 아들 이삭은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약속된 자녀라야 만이 상속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노예로 표현하고 있듯이 우리가 만일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줄로 생각한다면 이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의 곁에 있어서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하갈과 같이 결국 그는 지옥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선생들은 아들보다는 노예가 될 것을 강조합니다. 훌륭하게 율법과 종교를 잘 따르는 자들에게 많은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되지 아니하고는 결코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종이었던 하갈의 아들도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녀라고 모두가 같은 자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대로 난 자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 같이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를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나, 바울의 때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사실상 지금도 바른 복음을 가진 교회들은 많은 핍박을 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거짓 선생들이 가득한 교회에서 바른 복음을 전하려 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가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중의 하나입니다.

 

역사상 막강한 종교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 단체들은 바른 성경, 바른 복음 위에 바른 믿음을 가지려 했던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들을 계속해 왔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과 같이 여겨져 왔던 칼빈이나 쯔윙글리 같은 자들도 국가 교회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많은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시켰던 역사적인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을 볼 때 상속을 받을 자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약속을 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삭과 같이 오히려 핍박을 당하는 자들이었고,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부끄럽거나 무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통해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참 자녀가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상속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복음으로 말미암은 자녀들은 남을 핍박하거나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당하고, 참아낼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노예의 자녀인지, 아니면 약속에 의해 난 자녀인지를 바로 깨달아 알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그리스도인의 자유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방종과는 다른 것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자유는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성을 이용해 율법 아래서의 삶을 요구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아래 들어갈 때에는 이러한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지금까지도 이 말을 오해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얻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어떠한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가르칩니다. 각종 사업과 이권에 개입하기도 하고, 심지어 집단 자살에까지 이르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 그러한 가르침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사실상 이 가르침은 매우 위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현혹되는 이들이 상당수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 문제가 처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있었던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현재 죄의 상태에 머물러 계시기를 원치 않으셨고, 깨끗하게 보존된 상태에서 하늘에 왕국에 이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율법이 우리의 죄를 알게 하고 우리를 그 안에 가두어 놓으려 하지만 주님은 이미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들로 만들어 두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자유함이 주는 의미가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더욱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전에는 죄 된 육신이 우리를 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성령 안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계속해서 죄를 지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사는 자들은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11:28-30)

 

만일 우리에게 죄로부터의 해방이 없다면 이는 우리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가 지고 가는 죄의 짐들을 모두 주님께 내려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짐을 지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짐은 매우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도 우리에게 짐을 지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힘겨운 삶이 계속될 것이며, 죄의 유혹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한 자는 결코 죄의 자리로 다시 들어가는 불행한 일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할례가 주는 의미(갈라디아서5:2-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존심이기도 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징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할례를 받아야만 한 백성이 되고, 자신들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매우 중요한 잣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세기17:14)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이처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외적 할례가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할례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로마서2;29)

 

할례는 남자아이의 성기의 끝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손톱, 발톱이 하나라도 없으면 그는 매우 불편한 생활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자아이의 성기의 끝은 우리 몸에서 사실상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히려 그냥 두었을 때 질병을 유발하고 결혼 후에는 상대방에서 질병의 원인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영적 질병의 원인이 될만한 원인들을 잘라낸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죄의 원인들을 우리 안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죄와의 단절된 삶을 요구하며,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가 주는 더욱 큰 의미는 바로 성기가 우리의 몸 가운데 자녀를 낳는 기능을 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은 바로 그들의 후손이 계속해서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위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독특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이 됩니다. 우리의 구별된 삶을 통하여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이처럼 구별된 백성에 의하여 인도된 자들만이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듭난 자가 올바르게 하나님의 자녀를 낳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분리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세상의 죽어져 가는 혼들을 이겨오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로마서10:15)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라디아서5:8-12)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

 

성경에서 말하는 누룩은 언제나 부정적인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교절 빵을 먹게 하심에 있어서도 누룩을 넣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순수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누룩은 곧 부패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누룩은 음식물을 고의적으로 부패시켜서 먹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록 이런 것들은 매우 작은 양이지만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에 대한 가르침을 누룩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비록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상 교회의 근본적인 교리를 흔드는 가르침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어도 할례만은 지켜야 한다고 말할 때, 그들을 무마하기 위해서 이 거짓 가르침을 수용하게 된다면 오히려 교회는 더 큰 위험에 부딪히게 될 것을 경고하면서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계속하고 있는 자들이 교회에서 잘려 나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

 

누룩은 일단 한 번 섞이게 되면 음식물 전체에 퍼지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리 제거를 하려고 해도 제거되지를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거짓진리가 가져다 주는 결과를 누룩으로 비교한 것은 일단 잘 못된 가르침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온 교회에 퍼져서 도저히 수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르고 순수한 복음은 그 결실을 맺는데 있어서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거짓 복음은 오히려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린도후서11:4)

 

이러한 현상들은 이미 여러 교회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잘라내라고 말한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할을 말하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성장을 거듭하면 매우 기뻐합니다. 그리고 전 성도들이 경건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여지면 거기서 더욱 큰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누룩이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누룩, 즉 거짓 복음은 교회를 통째로 부패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매우 경건하고 복음적인 교회가 많은 회중을 거느린 교회가 되면서 점차 변질되어가는 교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열심을 가지고 증거하고 많은 결실을 하였지만 결국 교회 안에 숨어 들어 온 누룩을 구분하지 못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온 교회가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에 행위를 더한 구원관, 이교에서 오는 각종 절기들, 뉴에이지, 에큐메니칼 등 각종 누룩들이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이미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있는 상태입니다. 이미 이러한 누룩으로 인하여 더 이상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많은 교회들은 이러한 누룩들로 인하여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누룩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만 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라디아서5:13-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

 

바울은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데 쓰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방종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유함을 얻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각종 열매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성령 안에서 걸어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과 성령은 서로 대적하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한 자로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지만 육신은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기 않기 위해서 성령의 일들을 방해 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도 계속 육신적인 생활을 하는 가장 큰 이유도 성령의 이러한 속성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육신의 모양들을 몰아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우리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결코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율법 안에 머물러 지속적으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이는 필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면서도 방종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자신의 구원이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도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두 처리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복음적으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자유한 자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 하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위해 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육신의 뜻과 생각을 따라 나올 수 없는 것들이므로 성령을 따라 살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일단 의심을 해야 합니다.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든지, 아니면 구원을 받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이라면 죄와 상관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연히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육신의 행위들, 즉 죄가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권면하며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대적하여 결국에는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다면 이는 분명히 성령님의 인도에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라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행위들[1] -성적타락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바울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으로 자유로워졌으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육신의 행위들과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직 어린 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구분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즉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임의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를 시키기 위한 바울의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먼저 육신의 행위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성적인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간음, 음행, 부정한, 색욕과 같은 것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성적인 타락을 묘사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가장 먼저 언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적 타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흔히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 시대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의 역사 속에서도 성적 타락으로 인하여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되었던 몇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강간함으로 우리야를 살인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며,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은 그의 양어머니와 동침을 함으로 장자의 명분을 잃었고, 넷째 아들이었던 유다는 그의 며느리와 동침을 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으며, 모세 역시 이디오피아 여인과 동침을 함으로서 가족과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자들로 가득 찬 도시로 천사들을 범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도시를 완전히 멸하시기도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적인 것들을 나열하자면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범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결코 구약 시대에만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약시대의 교회 안에서도 흔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와 같은 곳에서는 자기 어머니를 아내로 취하면서도 우쭐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성적 타락이 극에 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5:1,2). 이러한 현상은 결코 고린도 교회뿐만이 아니라 바울의 서신에서 모든 교회들마다 성적타락을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위험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사실상 더욱 위험합니다. 이미 T.V, 인터넷, 영화관 등 많은 경로를 통하여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상황에 있고, 또한 성적 문화도 지나치게 개방이 되어서 결혼관이 흔들리고 있고, 또한 이제 성문화는 하나의 오락쯤으로 전락이 되어가고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통계 자료를 통하여 한국인들이 2분에 한 가정 꼴로 이혼을 하고 있다는 참담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족관이 무너져 간다는 의미를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젊은이들이 이혼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성문화는 더욱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적 타락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성도들이 이 일로 인하여 넘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라도 쉽게 넘어지는 경우들을 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일에 노출이 되어 타락된 상태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깨어서 기도함으로 성적 타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행위들[2] -우상숭배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성적 타락과 더불어 믿음의 사람들을 가장 위협했던 것 중에 하나는 우상 숭배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되어 왔으며, 수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우상 숭배를 경고한 것은 교회 안에서도 우상 숭배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상 숭배는 그 대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도 잠시라도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 바로 이러한 우상 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빠져 나오면서 이집트를 향한 재앙과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하심, 그리고 쓴 물이 단물이 되게 하심과 만나를 먹게 하심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오르는 동안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있었던 장면은 우상숭배가 얼마나 백성들 가운데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과 같은 자들도 처음에는 일천 번에 걸쳐서 희생물을 드림으로 지혜를 얻어서 그가 기도하는 바 소원을 이루었지만 결국 우상 숭배를 방치해 둠으로써 그 나라가 두 개로 나누어지고 결국에는 이 후로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고, 이후로는 남의 속국이 되어 예수님의 시대에 이를 때까지 남의 나라에 지배를 받아야 하는 불행한 민족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교회는 안전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우상 숭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시대가 바로 지금입니다. 각종 우상들은 그들의 본래의 모습을 숨긴 채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고 이미 교회의 중심에 앉아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성탄절이 바알(태양신)의 생일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최고의 축제일로 지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을 통해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지도 않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바벨론으로부터 시작된 우상 숭배를 행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이집트의 여신인 이스터(Easter)를 기념하는 절기로 만들어 모든 기독교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가증한 일들을 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우상숭배에 깊숙이 빠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자신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눈을 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절기와 형상들은 대부분 우상숭배의 소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그것들을 고수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도록 함으로서 아무런 상속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라디아서4:10-11)

 

육신의 행위들[3] -마법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법은 매우 생소한 단어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 안에서 마법을 행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령 이집트 왕 파라오의 곁에 있었던 마술사들이라든지,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려던 소위 무당이라든지, 그리고 신약시대에도 시몬과 같은 자들은 마술을 하는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술은 이미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법의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과 연관시키려는 자들에 의해 많은 문제를 낳게 된다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신비하게 보이기 위해서 최면술을 배워 성도들을 현혹시키기도 합니다. 그들을 최면술을 이용하여 성도를 기절시키기도 하고, 환상의 상태에 있게 하여 마치 신비한 체험을 한 것처럼 말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시대가 악해져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주로 명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시간대에 언제나 T.V에서는 마법과 관련된 내용이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적인 것들을 소개하고 그러한 것들을 믿도록 함으로서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도 그러한 것들을 기대하도록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부흥 강사들이나, 각종 교회와 관련된 집회를 열고 있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복음보다는 일종의 마법 주술과 같은 것들을 말하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임 안에서 병 고침을 받은 자들과 신비적인 체험을 하는 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체험을 했고,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건져내기를 시도하려 할 때, 파라오에게 가서 담판을 짓습니다. 모세가 막대기를 던지자 뱀이 되었는데, 문제는 마술사들도 이와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막대기로 가에 있는 물들을 치자 피로 변했는데 마술사들도 그대로 했습니다. 또한 개구리들로 하여금 땅에 올라오도록 하자 마술사들도 똑같이 하였습니다. 물론 이 후로 마술사들은 모세의 흉내를 낼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능력보다 더욱 큰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다"라고 가르치려 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마술사들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행했던 능력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능력을 행하려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 병 고침과 같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법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주문을 외워가며, 병을 고치신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중을 모아 두고 통성으로 기도시키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기도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말씀을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 하는 젊은이를 살려내고는 다시 올라가 날이 새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기도 하였습니다(20:7-12). 오늘날 마법으로 복음을 대신하려는 자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자들은 거짓 전도자들이며,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말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마법을 멈추지 않는 한 결코 상속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육신의 행위들[4] -증오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증오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미움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 미워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한일서3:15)

 

그러나 우리가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이 미움은 곧 살인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미움의 감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10:22)

 

만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해서 우리도 세상을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그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에는 두 가지의 반응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전쟁도 불사하는 집단도 있었고, 또 한 부류는 총칼을 가지고 그들의 신앙을 위협했을 때 당당히 죽음을 택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을 전쟁도 불사했던 집단들은 교회사의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갔지만 죽음을 불사한 자들의 신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증오, 즉 미워하는 감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견디라는 말로서 권면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는 미움의 감정이 있지만 드러내지 아니하고 참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구원의 날에 큰 영광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움의 감정을 참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5:44)

 

예수님이 소개하고 있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들은 우리가 증오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보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누군가를 여전히 미워하고 있다면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누군가를 미워함으로 아무런 상속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이보다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미워하는 모든 감정들을 떨쳐버리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육신의 행위들[5] -불화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라디아서5:19-21)

 

우리가 누군가와 불화하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화평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이는 무언가 문제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들에게 상속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화평의 대상은 누구일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로마서5:1)

 

우리가 화평을 누릴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삶 속에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혀 원하지도 않으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책망을 듣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불화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아무런 상속도 얻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매우 당연한 답이 될 수 있겠지만 그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한다면 화평의 관계는 계속해서 유지가 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화평함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않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12:18)

 

우리가 화평하게 지내야 하는 대상은 결코 하나님 한 분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들만의 거룩한 삶과 분리된 삶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고립된 생활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성경적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비성경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성경은 모든 사람, 즉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를 모두 포함한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낼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신앙에 대한 타협이나 거짓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는 더욱 철저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사람들과 불화하게 된다면 그는 더욱 불행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어떠한 상속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의 명분으로 다른 이들과 불화하거나, 아니면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세로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화평하지 못한 생애를 사는 것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화평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행위들[6] -경쟁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경쟁이 그리스도인들을 상속받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경쟁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들마저도 서로 경쟁하듯이 외형적인 모양들을 키워가고 숫자를 늘려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생활이 익숙해져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가 될만한 것은 사회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경쟁심을 유발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사방 어느 곳을 가도 누군가와 비교를 하면서 자극을 시키려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 자극에 둔감한 사람들은 무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모습들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경쟁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사회는 무능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 오늘날 사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로마서12:3)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경쟁심은 오히려 말씀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생각과 능력, 즉 믿음의 분량대로 행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이 경쟁심을 교묘히 이용하여 스며들어온 사상이 뉴에이지 사상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잠재 의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물론 우리는 지나치게 소극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때로 주님께 불순종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일을 우리의 믿음과 생각을 앞서서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분량만큼의 일을 감당하도록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요한계시록3:8)

 

필라델비아 교회가 칭찬을 받은 것은 적은 힘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뉴에이지와 같은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경쟁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말씀을 지키고 행하려는 모습 속에서 나타난 결과일 뿐입니다.

 

현대교회들의 경쟁의식들은 오히려 주님의 교회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칫 물질로 신앙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며,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아무런 상속도 받을 수 없는 자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경쟁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육신의 행위들[7] -분노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 있을 까요? 아무리 선한 자라도 이 질문에는 '아니오'라고 말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보기에 따라서 예수님조차도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분노하시는 모습을 통해 과연 분노는 상속을 얻을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 놀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분노하는 자들은 상속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분노의 의미는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분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분노와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노는 육신의 행위로부터 나오는 분노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성령의 일들을 대적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들을 그르치는 결과를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바위에 대하여 말하라는 명령대로 하지 않고, 막대기로 두 번 치는 잘 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일은 모세가 가나안에 가지 못하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아가려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는 일을 함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책망을 듣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셨을 때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지금까지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결과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분노가 주님의 일들을 그르치게 된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성을 잃고 분노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행위가 드러남으로써 사람들과 하나님에게 덕스럽지 못한 행동들을 낳을 것입니다. 분노는 틀림없이 좋지 못한 결과들을 가져 올 것입니다.

 

또한 이 분노는 말씀과 기도가 없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없다는 것은 또한 성령을 따라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결과는 매우 분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행동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때로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의 순간에는 여지없이 드러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제아무리 핍박이 와도 그러한 것들을 인내하고, 또한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목숨에 위협을 가해도 기꺼이 그 죽음에 응했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사람들은 핍박을 견딜 수 없어 했습니다. 그들은 핍박이 왔을 때, 분노하고 그들과 더불어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전쟁도 불사하고, 서로 욕하기도 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분노는 우리의 상속을 빼앗아 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속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노하는 일들을 멈추고 인내로서 사랑하는 일들을 계속해야 하며, 또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언제나 성령의 조명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만하여 오는 시험들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의 상속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들[8] -다툼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우리는 많은 교회들이 다툼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고, 더 이상 교회를 사랑 안에서 교제하는 모임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화되어 가는 현상들을 봅니다. 심지어 복음적인 교회라고 자처하는 많은 교회들조차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미 교회 안에는 많은 다툼들이 있어왔으며, 지금도 그 다툼으로 인하여 교회가 나뉘어지고 복음은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디모데후서2:23)

 

우리는 바울을 통해 다툼의 원인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논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논쟁을 매우 좋아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논쟁의 주제가 난해한 것일수록 더욱 흥미 있어 합니다. 그리고 그 논쟁이 끝난 후에는 언제나 분열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적인 교회 안에서는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복음이야말로 참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과 논쟁하는 일들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부분은 다툼의 형태로 결과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만일 우리가 가진 참된 복음을 말하기 위해서 비록 선한 의도에서 그 일을 하고 있더라도 논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드시 다툼을 일으킬 것이며,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상속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4:1)

 

이미 앞에서 다툼의 원인이 논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했지만 사실상 더욱 근본적인 원인을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정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자신의 생각을 낮추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다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정욕들은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언제나 경계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잠시라도 깨어 있는 신앙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정욕은 여지없이 우리를 다툼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다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의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툰다는 것은 분명히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밤새 기도하셨던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적으로는 분명히 다툼을 일으킬만한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깨어 기도하심으로 순한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다툼으로 인해 모든 상속을 잃기 전에 언제나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행위들[9] -폭동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는 크고 작은 폭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폭동에 주목하는 것은 그 중의 많은 것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인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종교를 보호한다는 명분도 있겠지만 그들 종교가 국가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하는 이유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다른 나라의 일만이 아니고 현재 우리의 주변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깃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비겁하거나 비굴해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 아무리 정의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들을 위해 시위를 하거나 어떠한 폭력적인 수단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가오는 핍박에 대하여 오직 기도만을 함으로서 인간적으로는 매우 무능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모세를 대항해서 일어났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통하여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민수기16:1-50) 그들은 모세가 분수에 넘치게 행동하고 있다고 말하며, 주께서는 회중 가운데도 있는데 어떻게 자신을 회중보다도 높이려고 하느냐며 항의합니다. 그들의 말은 매우 논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만일 누구의 편이 되겠느냐고 묻는다면 고라의 편을 들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지금 모든 회중들을 동일하게 대우하라는 오늘날 소위 민주주의 방식의 운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대항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기도를 마치고 그렇다면 누가 옳은 것인지 하나님께 권한을 두고 그분의 결정에 맡기자고 제안합니다. 결국 고라는 땅이 그를 삼키는 재앙을 당하게 되었고, 이후로 모세에 대한 대항의 결과로 만 사천칠백 명이 재앙으로 죽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폭동은 그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들을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시위나 폭동들을 통해서 잘 못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은 바로 이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정의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결코 대항하는 자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이후로 참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들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들은 교회사를 통해 5천만 명이나 죽는 가운데서도 결코 대항하거나 싸운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비록 숫자적으로 더욱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었으며, 이 땅에 장차 심판 받을 것을 알고 하늘을 소망 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을 소망 삼고 사는 자가 이 땅에서의 삶이 고달프다고 폭동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일들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의 상속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들로 하여금 아무런 상속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선동하고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게 하고 폭동을 일으키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깨어 있어 이러한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오직 모든 것들을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행위들[10] -파당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파당에 관하여는 이미 교회 안에 심각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경계의 대상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파당을 일으키는 자들이 상속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파당에 관하여 생각하면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분리와 파당에 대한 분명한 구분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는 이것에 관하여 구분을 두지 않고 에큐메니칼, 즉 교회연합운동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파당은 분명히 옳지 못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찢고 있는 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한 몸입니다. 그 까닭에 그것을 나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믿음에 따라서 베드로, 아볼로, 바울, 그리스도파로 구분하여 교회 안에서 분쟁이 있게 하였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목회자의 영향력에 의해 교회가 세워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교회를 출석할 만큼 열심을 낼 정도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교파들이 사람을 중심으로 생겨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심각성은 더 심각합니다. 그것은 종교가 가지는 매우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결코 사람을 중심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비록 믿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워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기초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파당을 일으킬 때 숫자적으로는 더욱 성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매우 기형적인 형태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당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무리들이 모임으로 인하여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도 매우 비능률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분리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곳을 통해서 분리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분리하라는 의미로 쓰여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들과의 관계는 더욱 가까이 붙어 있어 한 몸을 이루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과 비진리로부터의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문화가 바뀌어져 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수많은 음모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수용의 자세를 버리고 오히려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비진리에 관하여도 끊임없이 변화된 모습으로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으로부터도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비진리에 대하여 분명하게 분리된 상태가 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곧 배도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사를 통해 순교를 당했던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왔던 길이었습니다.

 

파당과 분리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파당은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찢고 있는 행위들이며, 주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들을 교회 안에서 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리된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더욱 높이고 주님의 교회를 온전히 세우겠다고 하는 바른 자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디 이 시대가 우리 그리스도인을 속이고 있더라도 바르게 분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행위들[11] 시기(envyings)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시기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시기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 받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의 경고를 염두 해 두지 않는다 할지라도 시기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원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협적인 것입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태복음27:18)

 

빌라도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넘겨준 것은 시기가 그 원인이라고 단정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빌라도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것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백성들이 자신들은 뒷전에 두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심히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즉 성경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자신들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그러한 일을 할 수도 없었으며, 백성들로부터 외면 당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무리들 중에 몇 사람, 즉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추종자가 되어서 그들의 무리로부터 이탈하는 현상을 보였기 때문에 그들의 시기는 더욱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진리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수없이 말씀하셨고, 그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이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온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진리를 인정하게 된다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이 분명한 진리에 대하여 인정하는 자들과 시기가 가득하여 핍박하는 자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사도행전13:45)

 

시기가 가져 온 결과는 비단 예수님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로막기도 했다는 사실을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내의 분쟁의 원인이 대부분 시기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협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시기는 자신을 낮추지 않는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교회 안에서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시기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반드시 추방되어야 할 적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일들을 막을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삶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칭찬에 인색하지 않는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행위들[12] -살인(murders)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이미 살인은 성경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죄가 가져온 결과로 그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살인이 일어났던 것을 시작으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는 끊임없이 살인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살인이 한 세대에도 멈춘 적이 없으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고질적인 것입니다. 전 세대에 걸쳐서 이 살인을 없애보자고 수없이 계몽운동을 펼쳐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이 살인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 살인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이 살인에 대한 개념을 다르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인이 육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성경은 보다 기본적인 단계에서 살인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미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한일서3:15)

 

과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한 사람도 자신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우리 안에 이 살인에 해당되는 미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게는 아무런 상속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미움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용서를 한다면 미움이라는 감정이 그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 주는 진리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로새서3:13,14)

 

우리가 용서를 한다고 미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용서 위에 사랑을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미움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이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미움은 또 다시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또 다시 당황스럽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아무런 상속도 없게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면서 미워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님의 용서하심을 기억하고 누군가를 용서하며, 그 위에 사랑을 덧입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의 상속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디 자신을 잘 지켜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행위들[13] 술취함(drunkenness)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술 취함에 관하여는 성경에서 많은 부분에 걸쳐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삼가야 하는 충분한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술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으며,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찌되었든 이 술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서 술이 과연 어떠한 결과들을 가져 올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비록 악한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방주를 만들어 물의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얻었지만 그가 그 해에 농사를 지어 얻은 소산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먹음으로써 벌거벗고 그의 수치를 드러냄으로써 결국 그의 아들 함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성경의 또 다른 인물 롯도 비록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부터 빠져 나왔지만 그가 딸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심으로써 딸들과 동침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근친상간으로 인하여 두 아들 모압과 암몬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들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민족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한 사람은 바로 삼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별된 사람, 즉 나실인이었지만 그도 역시 술 때문에 실패한 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자신의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결국에는 눈이 뽑히고 처참한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는 술 기운에 자신의 비밀을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술로 인해서 망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비단 성경의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이보다 더욱 심각한 사태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술로 인해 자신들의 몸을 해치며, 수많은 실수들을 연발하며 인생을 그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자식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육신을 자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범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이 정욕의 노예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또한 온전한 정신으로 도박을 일삼으며, 거액의 돈을 탕진하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난함에 대하여 무책임한 자세를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보다 냉정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가지고 삶을 진지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 사고들을 무너뜨리는 주범이 바로 술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위협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을 잃어버리게 만들 것이며, 정욕의 노예가 되게 할 것이고, 또한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과 책임감 없는 행동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술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큰 폐혜를 가져 올 것인가를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생활을 통해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결국 술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은 육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 생활한다면 결코 술은 우리의 생활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술을 멀리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십시오.

 

육신의 행위들[14] 흥청댐(revellings)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흥청댐은 방탕함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흥청댐은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삶을 완전히 망하는 길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흥청댐, 즉 방탕함이 자신의 인생을 실패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육신을 소욕을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누가복음15:13,14)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이야기, 즉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흥청댐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삶을 가난하게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재산을 탕진시키기에 매우 좋은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흥청댐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면 그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의 행위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주어진 것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라는 청지기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를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을 우리의 육신의 욕심들을 만족하기 위해서 쓰고 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잃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볼 수 있는 것 중에 또 하나는 이 흥청댐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온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갔을 때 그의 방탕한 생활은 시작되었고, 결국에는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결과는 바로 이러한 방탕함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결국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은 방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자는 결코 흥청대는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청지기의 자세로 더욱 검소하고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다니면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자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최고의 것을 주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거대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교회당을 보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요는 그 과정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배려해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반드시 불타서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것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책망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들에 있어서 언제나 청지기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적은 물질을 쓰는데 있어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쓰는 것이므로 함부로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자녀가 맡긴 돈을 가지고 흥청대는데 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책망과 징계가 뒤따를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이 우리의 흥청대는 생활에 대하여 반드시 책망과 징계로서 우리를 바로잡으려 할 것이며, 이러한 일을 계속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상속도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성령의 열매[1] 사랑(love)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육신의 행위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더불어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당연히 맺게 될 열매에 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은사와는 다른 것입니다. 은사가 주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들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심성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자들이 삶 속에서 이러한 열매들이 드러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사람이 어떠한 열매를 맺게 되는지를 알지 못하는데도 그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실제로 성령 안에서 살고 있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가장 첫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구약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사랑으로 말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새 계명을 주실 때에 사랑하라는 말씀을 해 주셨으며, 바울도 모든 것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는 말로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우선이 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이 이러한 사랑을 잃어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이익에 맞지 않으면 서로 다투고 비방하며, 심지어 세상 법정에까지 끌고 가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게 행동을 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노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사랑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무한정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셨으며, 예수님도 역시 친히 죽음을 향해 가셨습니다. 스데반은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고, 많은 순교자들 역시도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자들을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서도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들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의 행위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또한 각종 계몽운동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운동을 하는 많은 단체들이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져서 결국에는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일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사랑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시발점은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성령님과 더불어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2] 희락(joy)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맺음에 있어서 두 번째로 희락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희락은 'joy' 즉 기쁨을 말하는데 이 기쁨에 관하여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것임을 수 차례에 걸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기쁨에 대하여 열매의 차원을 넘어 명령과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4:4)

 

항상 기뻐하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5:16-18)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쁨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망이 이 땅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이 세상의 삶이 고달프다 할지라도 장차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날들을 기억하면서 기쁨의 날들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의 시간들은 오히려 많은 보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기쁨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기쁨으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4:13)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기쁨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이 땅에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결코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켜 줄만한 어떠한 일도 제공하려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메마르고 혼란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두고 살아간다면 결코 기쁨은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쁨이 노력을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울 앞에서 미소 짓는 연습을 하기도 하며, 크게 소리를 내서 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웃는 얼굴을 가졌다 할지라도 성령을 통하여 얻어지는 기쁨을 통하여 얻어지는 웃음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샘이 깊은 물에서 지속적으로 솟아나는 물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희락, 즉 기쁨이 성령의 열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맺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사는 자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바울은 수 차례에 걸쳐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기뻐하라고 말했던 시간들은 사실상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쁨이 있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3] 화평(peace)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우리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내에서 종종 분쟁을 일으키고 그들의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화해하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내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그들은 서로 고소하고 세상 법정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요구하도록 하는가 하면 상대방에 대하여 극단적인 비방도 서슴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화평이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하면서 가장 실수하기 쉬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고 해서 정죄하는 일들을 흔히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명백한 거짓 진리에 대하여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것조차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방에 대하여 비방하고 원수를 맺는 일들이 교회들 간에 흔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에큐메니칼(교회연합운동)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잘 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교회가 서로 분리되어야 하고, 각기 다른 진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누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4:3)

 

우리는 신학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운영 방식에 있어서도 서로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도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한 복음 안에서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서로 화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건전한 교회간에 화평한 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반목하는 형태를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과연 성령 안에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의심해야 합니다.

 

이는 비단 교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들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화평의 관계를 누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화평이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인격의 변화라고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화평을 위하여 성령이 하는 일들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화평을 위하여 우리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화평의 생애를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을 남을 존중해 주고, 더불어 자신은 낮아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만 있다면 결코 다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며, 또한 결코 실족시켜서는 안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로 인하여 누군가 실족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책망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는 길이 막히게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 대신에 엄한 꾸중을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생명을 가진 자들이라면 화평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도우실 것이며, 또한 그 일들을 하도록 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4] 오래참음(longsuffering)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우리가 오래 참음에 관하여 말할 때에 일반적으로 핍박에 대하여 인내하는 것으로 생각을 할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 시대의 대언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에게 많은 핍박이 있었고, 순교를 당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일들을 인내로서 감당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인내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허탈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것은 너무도 귀중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브리서6:12)

 

우리가 현재의 고통이 너무도 감당하기 힘들더라도 참아내는 것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상속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땅의 일들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인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일보다 하늘에서의 일들을 바라는 자들이라면 반드시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아는 이러한 인내에 대하여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당시에 산에다 방주()를 지으라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순종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였고, 그는 120년에 걸쳐서 이러한 수모를 견디어내며 방주를 완성하였고, 급기야는 홍수가 닥쳤을 때에 그의 가족들만 살아 남은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인내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것이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많은 인내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훗날에 우리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왕국과 상속받을 일을 생각한다면 너무도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내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았을 때 아름다운 결과를 맺게 될 것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4:2)

 

우리의 오래 참음은 고난과 핍박이 있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많은 인내를 했던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견딜 수 없는 어려움들이 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동일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사실 가르치는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느끼는 것이지만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배우는 자들이 가르침대로 살거나 깨달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가르침에 대하여 언제나 의심하는 자세로 배우고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내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이땅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도 꾸준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이 전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변함 없는 자세로 인내하며 세상을 이겨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5] 자비(Gentleness)(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이 자비로 번역된 이 말은 부드러움(Gentleness), 혹은 친절함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성령을 통한 열매라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와 같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드러움에 관하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 문제를 운운하면서 자신이 없어 합니다. 더욱이 요즘과 같이 거칠고 당당한 사람들을 우상화하는 시대를 사는 자들이라면 이 부드러움은 사람들에게 사치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해 부드러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부드러움에 대한 모습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4:32)

 

이 부드러움은 결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들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친절히 대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상냥한 마음을 품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품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세상 사람들조차도 갖고 싶은 품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들이 각종 교육과 계몽운동을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하고자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더욱 성숙해지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교회 안에서 부드럽지 못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부드러움은 열매입니다. 열매가 언제나 풍성하게 잘 열릴 수만은 없습니다. 묘목이 너무 어려서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때로는 병이 들어서 떨어지거나 벌레를 먹는 경우가 있듯이 그들의 믿음의 상태에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정상적으로 건실하게 자란 나무는 풍성하게 열매를 맺듯이 성령 안에서 사는 성도는 부드러움을 통하여 친절하고 상냥하며, 모든 일에 대하여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경계하고, 마음을 닫아 놓은 채 미워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과연 성령 안에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확언하건대 그는 틀림없이 성령 안에서 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반드시 덕스러워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드러움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생활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6] 양선(goodness)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성령의 열매에 선함이 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각종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면서 선함을 유도하려 합니다. 그리고 언론과 방송매체를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독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그다지 효력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선함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편147:1)

 

우리는 성경의 많은 곳에서 선함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선함이 어떠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함이라는 뜻이 단순히 착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착함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선함의 기준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노래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듯이 우리의 찬양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과 또한 이루어질 일들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장차 하늘의 왕국에서 상속자로 삼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노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선함은 이 땅에서 많은 이들을 구제하고 봉사하며, 착한 일들을 많이 하는 것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소망 삼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결과들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들에 대하여 반대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게 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많은 일들에 대하여 헌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서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선함의 시작은 주님을 알고 구원함을 감사하는 찬양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감격을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상태에서 주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막연하게도 자신이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 주님이 불쌍히 여겨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자들에게는 어떠한 상도 주어지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천국 문 앞에도 이를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지 않는 자들은 주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성령이 선물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주님을 노래하는 선함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많은 이웃들을 돌보고 사랑 안에서 봉사하는 일들을 계속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선함이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함을 행하기 전에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는지를 다시 한 번 살피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7] -충성(faith)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믿음이 성령의 열매라고요?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소 놀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 성경에는 '충성'으로 번역된 이 부분은 분명히 믿음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즉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믿음이 모든 부분에 걸쳐서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향한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2:8)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10:17).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출발이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관한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고린도전서12:9)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믿음이 은사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더욱 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다면 믿음은 결코 구원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가 주님의 일을 위해 주어졌듯이 믿음도 주님의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믿음이 성령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구원을 위한 것이라든지, 아니면 주님의 일을 위해 주어진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이러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구원과 은사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지속적으로 더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열매가 순간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통해서 맺어지듯이 성령의 열매로서의 믿음도 오랜 시간과 더불어 성숙해져 감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믿음이라는 열매를 얻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나 믿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순간도 우리가 믿음으로부터 멀어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우 위태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사탄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믿음은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리를 떠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더욱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 열매는 그들은 더욱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본을 보여 줄 것입니다. 흔들림이 없는 삶을 통하여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부디 성령 안에서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8] 온유(meekness)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온유라는 단어 'meekness'를 더 싶게 풀어서 쓴다면 온순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시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사람은 보다 적극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강력한 지도력과 능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 지도자의 자질을 논할 때에도 이러한 세상의 기준은 동일하게 적용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온유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라디아서6:1)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통하여 성도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가르치는 자가 온유한 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권위를 운운하며, 성도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성경적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성경은 성도들에 대하여 온순한 자세로 인도하며, 또한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언제나 온유함으로 성도들을 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야고보서1:21)

 

온유함은 결코 지도자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을 받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말씀을 받을 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듣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나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를 짐승과 비교할 때 양으로 표현합니다. 만일 양이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가게 된다면 그는 곧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양이 온순하다는 것은 오직 목자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적절하고 지혜롭게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판단하며, 다투기를 즐겨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풍성한 생애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5)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들에게는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온유한 자들이 세상에서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삶을 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하늘에서 보상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온순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넉넉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언제나 손해를 입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에게는 반드시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하는 부귀와 영화를 약속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디 우리 안에 온유한 품성을 유지하면서 이 시대를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9] -절제(temperance)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우리가 먼저 절제에 관하여 생각할 때에 그것은 인내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인내가 닥쳐오는 시험에 대하여 참아내는 것이라면, 절제는 그 시험 자체가 오지 못하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온전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절제에 인내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벧후1:6). 이 말은 절제와 인내가 또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절제는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절제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성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참지 못하겠거든 결혼을 하도록 권하고 있고(고전7:9), 결혼한 자들은 분방하지 말도록 권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탄이 틈 탈 것을 염려하기 때문(고전7:5)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도자들에게 가장 우선되는 덕목이 절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린도전서9:25)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이 말씀을 통하여 어떠한 자들이 절제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려고 애쓰는 자, 즉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가 절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목표도 없이 우유부단한 자세로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절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지고 있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세상이 음란해져 가고, 사탄적인 문화가 더욱 기승을 부려가고 있는 시대임을 반영한다면 더욱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보호해야 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담배, 마약, 포르노 영화 등 과거에 금기시 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비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것들에 노출이 된 채로 생활을 하고 있고,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 들어와서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함으로 홍수로 인한 재앙을 만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역시 같은 이유로 불로 인한 재앙을 만났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이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멸망 당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은 결국 불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절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결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제가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스스로 절제하는데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욱 혼란하고 음란해져만 갈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의 분리된 삶을 통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백성으로서 절제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왕국에 이를 때까지 경주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갈라디아서5:24-2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바울은 육신의 행위들과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앞서 말한 것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다 쉬운 결론으로 육신의 행위는 버리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헛된 영광을 따라 살지 말고 서로를 위하여 살라는 말로서 이 권면에 대한 결론을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14:27)

 

예수님께서는 이미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자기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육신의 소욕들을 못박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십자가를 곁에 두고서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모양들이 드러날 때마다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구원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모양들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들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마치 장식품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목걸이, 귀걸이 등으로 모양을 만들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과시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큰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십자가는 고대로부터 저주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일부 사탄 종교와 관련한 사람들이 섬기는 형상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이방 종교가 십자가 모양을 다양하게 변형시켜 그들의 상징으로 써 오고 있는 것과 또한 사탄 음악을 표방하는 일부 락그룹들이 십자가를 그들의 온 몸에 장식하는 모습들은 이 십자가가 결코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모든 멸망 당할 것들을 대표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할 멸망을 대신해서 받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십자가 그 형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육신의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바울의 권면은 바로 장차 멸망 당할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거룩함으로 주님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육신의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와 상관없이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여기에서 멈추어 선다면 그들은 종교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은 결코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도록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노엽게 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겸손하고 친절한 자세로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에 대한 자세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곳은 우리의 육신의 모습들을 못박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것들이 없어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언제나 근신하며, 모든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과 더불어 걸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잘못에 빠진 사람을 보았을 때(갈라디아서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6:1)

 

바울을 앞서 갈라디아 성도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반드시 거짓 교리를 가진 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때로는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며,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교회를 파괴하려 할 것이며, 또한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온유한 영으로 그러한 자들을 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거짓 진리를 가진 자들이 있다면 그가 바른 진리를 가지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결코 과격하거나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친절하며, 부드러운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분쟁에 휩싸이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분쟁의 대부분의 원인이 거짓 교리로 인한 혼란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대처하는 방법은 그리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다투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 세상 법에 호소하는 일까지 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복음의 빛을 가리우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우리가 거짓 진리에 대하여 정의로운 마음으로 행했다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사악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도 모르고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행동이 과격하거나 극단적이라면 많은 불신자들은 교회를 오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온유한 영으로서 모든 문제들을 대처하게 된다면 거짓 진리를 가진 자들이나, 불신자들조차도 반드시 진리 안으로 돌아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과정에서 조심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온유한 영으로 대하라는 것은 결코 그들과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돌아보아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거짓진리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돌아오도록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들의 논리에 넘어가는 경우를 흔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거짓 진리를 가진 자들이 워낙 그들의 논리를 그럴 듯 하게 설명함으로써 듣는 이들을 혼란하게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비단 교회 안에 거짓 진리가 들어왔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언제나 시험에 노출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가만히 숨어들어 온 거짓 진리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온유한 영으로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펴봄으로써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거짓 진리를 대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극단적이고 과격한 방법들을 피하고 매사에 덕을 세우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지라(갈라디아서6:2-5)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우리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슨 짐이 있겠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자들에게 안식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가벼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11:30)

 

사실상 주님께서 주시는 짐은 우리의 영혼에게는 매우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육신적으로는 매우 무거운 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짐으로 인하여 육신적인 고통을 당해야만 했고, 심지어는 순교를 당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그 일들을 감당해 갔습니다.

 

스데반은 내면에 가지고 있는 참 안식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회에 잡혀 심문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표정은 천사의 얼굴과 같은 표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그는 오히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는 죽음의 순간에는 오히려 그를 향해 돌을 던지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6:15-7:60). 그가 가지고 있는 안식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안식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안식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누리던 안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물질적인 안정과 건강한 생활을 생각하며, 가정과 사회에서 모든 일들이 형통하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주님이 우리에게 지워진 짐을 지지 않겠다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삶을 위하여 육신적인 짐들을 져야만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육신적인 짐들에 대하여 서로 나누어 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편에서 바라볼 때 이 짐들은 매우 가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차 우리에게는 더욱 큰 부귀와 영화가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짐을 나누어지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미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짐들을 서로 나누어 짐으로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명령은 각 사람이 자기 짐을 져야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삶을 돌아보며, 주님의 일들에 순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들에 대하여 닥쳐진 짐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짐들을 감당하지 않고 오히려 남의 일들에만 관심을 두고 돌아보겠다고 말한다면 이는 자신을 속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는 누구에게나 맡겨진 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이 짐들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 모습들을 거울삼아서 서로 돌아보는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심는대로 거둔다(갈라디아서6:6-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자연 만물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것이 없는 분으로 생각하면서 기적과 능력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생각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믿음만 있으면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만을 생각하는 자들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 시대에 신비주의자, 혹은 기복 신앙을 가진 자들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상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육신과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둘 것이며,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는 것이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자신의 육신의 일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아직도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기 전에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이 말씀이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많은 보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많은 교회들에서 하고 있는 간증 집회들을 봅니다. 그들은 대부분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성공담을 듣기 위해 이곳 저곳에서 몰려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담을 듣고는 감동하는 모습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들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의 성공담은 자칫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잃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은 육신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욱 많은 보상을 얻도록 하는데 그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매를 맞고, 조롱을 당하며, 가난해 지기도 하고, 심지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육신적으로는 오히려 불행한 삶을 각오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울과 같은 이들은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부귀와 명예, 권세에 대하여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결단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만한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육신의 일들을 위해 많은 것들을 심고 있지만 성령을 위하여 심는 일들을 소홀히 함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메마른 모습들을 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을 기억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심어야만 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부끄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낙심하지 말지니(갈라디아서6:9-10)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

 

바울의 가르침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은 그가 단순히 어떠한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실행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일들을 말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는 데서 가장 닥치기 쉬운 것 중의 하나는 지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전 생애에 걸쳐서 지속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매우 훌륭한 전도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헌신된 자들이며, 또한 삶의 모범이 될만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그러한 수고와 노력들이 오래가지 않고 평범하거나 그보다 못한 삶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과거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세상에 묻혀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빛 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우려는 바로 이러한 모습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단 한번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평생을 충만한 상태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이 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일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과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만 구원의 안전함 속으로 들어가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이웃을 돌아보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이 가진 최소한의 것들을 나누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비단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함 속에서도 남을 돕는다면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일회적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하여 결코 그냥 넘기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하여 반드시 보상하실 것이며,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으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지쳐서 쓰러지게 된다면 어떠한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겠다는 동일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열심히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선한 일을 위해서 수고했었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선한 일을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치지 않고 그 일들을 계속하면서 살아간다면 주님은 정하신 때,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될 때에 많은 상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부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일을 지속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십자가(갈라디아서6:11-16)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바울은 할례를 받은 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육신을 자랑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울이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랑에 관하여 말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에 관하여 말한 바가 있듯이 그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였으며, 이스라엘 줄기에 속한 자, 즉 근본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일컬어지는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며, 유대민족을 형성하는데 큰 축을 이루었던 유다와 베냐민 지파중에서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었으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 철저히 율법을 신뢰하고 실행했던 자였으며,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3:5-6).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던 탁월한 지식을 가진 자였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명예 있는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였습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배경을 복음을 위해 충분히 활용할 줄 알았던 지혜로운 전도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 가운데 바울과 같거나 혹은 그보다 더 뛰어난 배경을 가진 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자신의 배경을 더욱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드러낼 수 없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이러한 배경을 잃게 될까 봐 염려하는 모습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바울이 왜 자신의 화려한 배경을 버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작정 자신의 좋은 배경을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때로 복음을 전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으로 인하여 몇 차례에 걸쳐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많은 지식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되어서 많은 이들에게 분명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의 유대적인 사고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시키려고 했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배경들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데 사용했었던 자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조건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매를 맞으며,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중요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삼고 가는 자들이라면 그는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흔적(갈라디아서6:17-18)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자신의 몸에 주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말합니다. 그가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단순한 상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 흔적을 누구보다도 깊이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몸에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수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가 당한 고통은 그에게 흔적으로 남았으며, 그의 육신은 말할 수 없는 아픔으로 인하여 지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주 예수님에 의한 흔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당한 고통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린도후서11:23-27)

 

그의 이러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려 하지도 않았고,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흔적이라고만 말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이것을 흔적으로 삼으려는 이유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이 흔적들을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많은 보상들을 받으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반드시 보상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도 이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은 장차 주님의 왕국에서 영광스러운 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흔적은 결코 육신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내면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으로 인하여 심하게 마음 고생을 함으로서 수많은 흔적들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그를 괴롭게 했었던 것은 육신적인 것보다는 마음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도 계속되고 있는 거짓 가르침에 대하여 심한 마음의 상처를 안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많은 서신들은 바로 이러한 동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 세상에서는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장차 주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때에는 영광스러운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많은 흔적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많은 보상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삶 속에서 닥치는 힘겨운 삶 속에서도 소망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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