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 시니라"(살전 1:8-10)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아담'이라 칭하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이 내용 안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에 대한 진리가 숨어 있는데, 하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구원자 즉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아담의 살을 찢고, 피를 쏟아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처럼 예수님의 살을 찢고, 피를 쏟으심으로 여자인 하나님의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헬라어로 '예수스(예수)'라는 단어가 남성, '에클레시아(교회)'라는 단어가 여성 명사로 기록되어진 것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한때 일부 무교회 주의자들에 의해 교회의 존재가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으로부터 파생된 오염된 교회관, 즉 교회는 '성전'이라 하여 건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물질들을 신성한 것으로서 보전되어져야 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까닭에 죄에 대한 모든 고백과 경배와 찬양 은혜와 축복이 성전된 건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일부 거짓 전도자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건물을 통해 멸망을 피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사건을 '바벨탑'이었습니다(창 11;1-9).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고, 그들 백성을 흩으셨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수십억, 혹은 수백 억의 돈을 들여서 웅장한 예배당 건물을 짓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마치 웅장한 건물이 자신들의 구원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그 일로 인해 많은 실족자들을 낳게 되고, 그 후에는 하나의 기업화된 교회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단의 교묘한 전술에 완전히 농락 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건물이나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만물보다 귀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면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의 의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 (고전 3:16,17)
성전된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의 교회를 만들어 냅니다. 건물마다 세워진 십자가 불빛이 저마다 자신들의 교회만이 참교회인 것처럼 높은 곳에서 비추고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격 속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이끄시고 성도들이 모여진 교회 안에서 교제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여진 무리들은 주어진 사명을 안고 세상 속에서 그 사명을 감당해 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구원받은 무리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들의 교회를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소문을 내는 교회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8)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수비만 해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운동 선수들에게 으레히 따라 다니는 말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라는 말입니다. 물론 서툰 공격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패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구기 종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격투기 종목에서는 공격을 많이 한 선수에게 '우세승'이라는 기쁨을 안겨다 줍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복음 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매우 수비적인 자세로 세상에 대항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고립되려고 하고 있으며, 실체를 숨긴 채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분명한 거짓 복음, 거짓 진리 앞에서도 그들의 거짓 됨을 나무라지 못합니다. 이 후에 당할 보복이 너무도 두렵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사단은 매우 공격적입니다. 그들은 어차피 멸망당할 존재이기 때문에 죽을 각오로 덤벼듭니다. 이러한 사단과 그리스도인들은 피할 수 없는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만 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0-12)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현혹하여 멸망의 길로 인도하려 합니다. 교회가 사단의 활동을 보며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사단의 교묘함에 대적하여 싸워야만 합니다. 그 싸움은 총이나 칼도 아니고, 맨 몸으로 뛰어들어 궐기나 투쟁이 아닌 믿음의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믿음의 소문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말로 쓰지 않고 '믿음의 소문'이라고 언급한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분명한 복음 위에 체험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간증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관계가 없다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또한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내면에 영접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분명한 명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교회에 속한 성도는 누구나 예수님과 만남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하나님의 교회가 파괴자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쓰러지지 않을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물량 주의에 치우쳐 좋은 건물, 많은 회중의 숫자에 연연해 있는 동안 사단은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여 수없이 많은 교회를 초토화시키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순수한 복음 적인 교회마저 무너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회복하고,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디 믿음의 소문을 온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9)
우상과의 싸움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속되어 온 싸움입니다. 특히 구약 시대를 대표하는 바알 숭배 사상은 수십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교회는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쉬운 에로 전세계 기독교인들의 축제일이라고 하는 성탄절(크리스마스)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이라고 어릴 때부터 들어왔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태양신(바알)의 축제일입니다. 1년중 해가 가장 짧다가 길어지는 12월 25일 새벽을 기해서 태양의 탄생일로 정하고 오래 전부터 제사를 드려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로마는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온갖 우상들을 다 모아들였고, 4세기에 이르러 기독교를 정식으로 인정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존 종교와 혼합하여 '로마 카톨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힘과 권력을 바탕으로 그 세력을 키워 갔고 태양신(바알)의 축제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Easter 여신의 축제일을 부활절로 둔갑시키며 교묘히 복음을 변질시켜 왔던 것입니다. 바벨탑의 재건을 꿈꾸며 교회 당 위에 종탑을 세웠고, 그들만이 참교회임을 주장하기 위해 '사도신경'을 만들었고, 예수님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마리아 숭배 사상'을 강조해 가는 등 복음을 난도질하고 우상을 만들어 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일련의 우상 숭배 작업이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데 쓰여지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대다수의 교회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의미도 모른 채 지키고 있으며, 사도 신경을 암송하며 '거룩한 공회(Holy Catholic church)를 믿사오며'를 매주 마다 반복하고 있고, 교회당을 우상화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교 대통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 온 정열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 작업을 끝낸 후에는 참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시에 교회를 위협하던 우상을 버리고 온전한 교회로 섰던 것처럼 우리는 이 시대에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는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항하며 분별하고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우상의 세력에 대하여 경계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결코 참예하지 말고 재앙들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계 18:4,5)
각종 우상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결코 서툰 방법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이름으로 다가 오며, 전통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지키고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 이외에 어떠한 진리도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구주가 되시며, 그 어떤 길로도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우상 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근신하며, 경계하는 믿음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재림을 사모하는 교회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 시니라"(10)
예수님의 재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소망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신부가 될 자격을 갖추었으며, 신부는 결혼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실 날만을 기다리는 것은 준비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시대에 예수님의 재림만큼 오해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언한답시고 예수님 재림의 날짜를 제시한다든지, 재림과 동시에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든지, 깨끗한 신부(그리스도인)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떠나 산이나 혹은 한적한 곳에 머물러 준비해야 한다든지 하면서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며, 교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일들을 흔치 않게 보아 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분명한 몇 가지 사실을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에 관한 것입니다.
"형제들아 때나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1-3)
주님은 결코 우리의 인간적인 예상과 추측에 근거하여 오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홀연히 오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들어올리시고 밖에 있는 자는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또하나의 성경 구절은 바울이 재림에 관해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할 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우리는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는 산에 오르거나 교회당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평소에 하던 생활 그대로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일을 계속하라고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상황이 어떤 변화가 생긴다 하더라도 삶의 모양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온전한 교회는 결코 시대적인 흐름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비록 전하는 방법에 다소간 차이가 있을지라도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워 가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순결하게 단장된 신부로서 오늘을 준비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교회는 모든 교회의 소망하는 바입니다.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피와 살로 지어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보여준 모범을 본받아서 혼탁한 이 시대에 온전한 교회의 모델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부디 온 성도가 힘을 다해 이 일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