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 (데살로니가 전서 1:1-3)
오늘날 수없이 많은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들의 공통된 바램이 있다면 가장 성경적이면서 온전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초대 교회의 성장을 모델 삼아서 성장 지향적인 교회가 되기도 하고, 바울의 회당에서의 가르침을 모델로 하여 성경 공부 중심의 교회가 되기도 하며, 안디옥 교회의 선교와 구제를 모델 삼아 봉사 중심의 교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것 하나도 '이것만이 진정한 교회의 모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 하나님의 쓰신 교회이지 환경 적으로 완전히 변해 있는 오늘날에도 동일한 방법을 반드시 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당시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안방에서도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하여 성경 연구에 관련된 자료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고, 선교와 봉사의 일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큰 건물과 많은 사람이 모인 교회와 조직화된 성경 공부를 시키고,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모임을 모범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외형적으로 드러난 모습보다는 그들이 담고 있는 내용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 많은 교회들이 각종 행사와 차별화된 사역으로 교회를 성장시켜 갔다면 이제는 성경의 근본 정신을 찾아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향기가 묻어 나야만 시대를 변화시키고, 온전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시대마다 사역의 방법은 변합니다. 그러나 기본 정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을 통하여 결코 변하지 않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더듬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1)
목회자나 성도들이 가끔 혼돈을 일으키는 것중에 하나는 교회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재산을 두고 분쟁하기도 하며, 주인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교회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직접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목회자나 헌신적인 성도의 물질을 기초로 해서 세워집니다. 그 까닭에 교회가 그들의 소유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들의 헌신이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교회는 세워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가정 교회 형태의 소그룹 중심의 교회가 대부분이 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어찌되었든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교회는 규모 있는 성장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주인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교회를 물질로 농락하거나 오염시키는 일들을 단호하게 차단하셨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상당한 부자 중에 하나인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물질을 드렸지만 재산의 일부를 숨겨 둠으로서 교회를 농락한 결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소유주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소유 안에서 누리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실제 소유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안에 사는 자들에게 규칙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규칙에 따라 살도록 하셨습니다. 어느 국가에서나 규칙에 따라 살 때 상을 주고, 규칙을 어기며 살아갈 때 벌하듯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 사는 자들이 규칙(말씀)대로 사는 자에게는 심판 후에 상을 주시고, 또한 규칙(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된 자리를 결코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아무리 시대와 환경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이니라"(엡 1:23)
쉬지 않고 기억될 수 있는 자랑거리들
우리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통하며 신앙에 도전을 받으며 소망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눈을 들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처럼 간증은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성도들의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많지는 않지만 일부 교회에서는 매주 성도들의 간증 시간을 따로 두어 같이 은혜를 나누는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자신의 성공담을 말하는 설명회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증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어야 하고, 건강과 물질에 이상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기준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면 간증의 본래 의미는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위대한 복음 전도자 중에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건강과 물질에 이상이 없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의 소외 계층으로 있었고, 핍박의 대상이었으며, 과도한 열정으로 인해 몸은 대부분이 허약했고 청빈과 검소함으로 항상 가난한 삶을 유지했던 자들입니다. 그러한 속에서도 그들은 감사했고, 오히려 복음을 자랑함으로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됐으며 순수한 교회를 지탱해 오는 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하고 있는 간증이 오히려 성도들을 사회적 성공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공을 동일시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열등감을 가중시키며, 자칫 교회를 사회적 성공의 열쇠로 착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교회가 복음을 농락하는 일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순수한 복음의 본질을 되찾고, 그 안에서 쉬지 않고 기억될 수 있는 자랑거리(간증)를 찾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기억하고 있는 세 가지를 말함으로서 그들의 영원한 간증이 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간증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2,3)
(1) 믿음의 역사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우선할 수 있는 것은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행함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믿음이 단순하게 어떤 불가능한 사실이 기적적으로 되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문제를 위해 땀흘리며 일하는 것보다 더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간혹 어떤 간증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기도했더니 문제가 해결되더라'는 말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물론 다윗과 같이 쫓기는 신세가 되어 아둘람 굴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기도함으로 훌륭한 병사도 얻고, 훗날 왕이 되는 기초를 마련했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코 매사에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 안에서 사는 생활을 통하여 그의 삶을 하나님이 주관해 주시도록 바라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그리스도인이 자랑하고 간증해야 할 것이 있다면 "내가 믿음으로 기도했더니 이렇게 응답하였다"가 아니라 "내가 믿음 안에서 살았더니 나를 이렇게 인도해 주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때로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 줄 만한 내용을 구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의 수단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하여 삶이 변하는 역사를 기대하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물질의 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자신의 가진 것들을 모두 교회에 바치고 자신은 헐벗고 굶주리며, 죽음의 사역을 위해 뛰어들어감으로 믿음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결코 우리로 하여금 사회적 성공과 물질의 부요함 속으로 인도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며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니라"(빌 3:18-21)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즉 믿음의 삶에 역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배만을 생각하고, 땅의 일들만을 생각하는 자들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의 삶을 올바르게 개척해 가는 성도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2) 사랑의 수고
사랑이라는 말 역시 믿음과 더불어 가장 오해되고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사랑이라는 것이 서로가 좋은 감정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돕고, 마음을 나누는 것 정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통해 조명해 보는 사랑은 한마디로 죽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죽어야만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6:25).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죽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의 이유도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영혼 구원'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러한 의미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무시한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자신의 자존심과 배경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배경을 쓸모 없는 배설물과 같이 버렸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였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삶의 모양이 없이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모습은 바로 완전한 자기 포기의 선언입니다. 이러한 수고가 지속되었을 때 영혼 구원이라는 뜻을 이룰 수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무수히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사랑의 힘에 의해서 였습니다. 심지어 빌립보 감옥에서 도망할 수 있었음에도 간수의 목숨과 영혼 구원을 위해 도망하지 않았던 모습은 진정한 사랑의 수고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자랑이 낮아짐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요(빌3:4-9).
(3) 소망의 인내
성도가 자랑할 수 있는 마지막 내용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에서 인내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말은 어떤 어려움에 대하여 참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목하여 볼 것은 하늘에 소망을 둔 자는 환란과 어려움을 당해 왔다는 점입니다. 과연 오늘날에도 하늘에 소망을 둔 자가 어려움을 당할까? 저는 감히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늘에 소망을 둔 자가 이 땅의 일들에 매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정직할 것이며, 성실할 것이며, 비진리와 타협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거짓과 요행과 비진리가 만연한 세상에서 그가 발붙일 수 있는 곳이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요즘 방송과 언론을 통해 보면 각종 모함과 술수를 통해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악당으로 변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자기 변호를 하려던 자마저 모함과 술수에 가담하는 경우를 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어느곳 하나도 진실한 자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힘이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소외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오늘을 견디며, 장차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너무도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내하고 심지어 죽음도 불사하며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하늘은 소망 삼았던 믿음의 선진들은 환하게 웃으며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랑거리(간증)가 있다면 현재의 어려움을 소망 삼고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야말로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육신의 안녕과 평안이 자랑이 되지 않고 오히려 수치로 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삼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며, 영혼 구원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며 복음을 위해 당하는 수치를 부끄러워 말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