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바울이 보는 하나님

조회 수 3095 추천 수 0 2010.06.05 10:37:58

1 장 바울이 보는 하나님

 

 

하나님을 어떠한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모든 신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서신을 연구함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는지를 먼저 살펴보려는 것은 그것이 가장 핵심이 되는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면 그의 글도 빈약한 내용들을 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그가 하나님의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면 그가 전하는 모든 내용들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과연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1.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바울은 하나님에 관하여 철저히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이방 문화가 뿌리 깊었던 다소에서 자랐지만 여전히 유대인으로서 교육을 받았고, 결코 이방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다신론적인 사고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적당한 사고로 타협을 시도하려 했다면 아마도 아덴의 사람들과 같이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쯤으로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17:22,23).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4-6).

이 내용을 가장 첫 번째 주제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울의 서신은 바로 이 기초 위에 작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단들은 다신론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며, 또한 다른 신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심지어 다른 신들을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신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구약의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한 이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처음으로 아버지라 부르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5:16).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과 가르치심을 가장 분명하게 실행한 것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서신의 처음 부분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심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살전 1:1, 살후 1:2, 1:3, 고전 1:3, 고후 1:2, 1:7, 1:2, 1:2, 1:2, 3). 그것은 신약 성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은 곧 믿는 우리들이 그분의 자녀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말은 믿는 이들이 모두가 그분으로부터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는 자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15). 이 말은 곧 그들의 거듭남이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성경의 시작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됩니다(1:1). 어떤 이들은 이 사실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믿는다면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것은 인류의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도전 받는 주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도 이러한 사고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2)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16-17)

바울이 보았던 창조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 창조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한 속성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3:9)

아직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창조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생각, 혹은 지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른 한 속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명확한 것이었습니다.

 

4. 하나님은 지금도 활동하신다.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이 결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은 그가 아시아로 가고자 했을 때, 그는 오히려 마게도냐 근방의 드로아 지방으로 향했고, 결국에는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며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16:6-10). 그것은 바울의 뜻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목적지는 아시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걸음을 마게도냐 지방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19,2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1:10)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을 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어떤 일을 지금 자신의 의지로 행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면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예로 그는 로마에 가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10-12). 그가 로마에 가고자 결심만 한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곳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고 있었고, 또한 주님께서 이 일을 계획하시고 준비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 죄수의 신분을 가지고 로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전 3:7)

믿음의 성장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간섭은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기 위해 힘쓰는 것은 목사나 혹은 교사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그렇습니다. 누구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자라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없다면 믿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나게 하실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주도하신 분이시다.

 

성경 전체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성경을 주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 곳곳에 말씀하고 있습니다(16:26, 3:8, 딤후3:16).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을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기록된 말씀에 따라 이루어 가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2-15)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위의 활동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것들입니다. 많은 거짓 전도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을 우리는 예수 유일주의자(Jesusonlyism)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의 육신의 존재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made(만드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1:3). 다시 말하면 하나님(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이 아들, 즉 예수님의 육신을 만드시고, 또한 그분 안에 아들 하나님이 거하심으로써 세분의 속성이 함께 약속된 대로 사역을 완성해 가셨던 것입니다. 이 일의 주도는 결코 예수님 한 분만의 사역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함께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1)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2:4,5)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사역을 계획하시고, 또한 그 일을 완성하신 것은 바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또한 믿는 이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전 세대를 통하여 이루신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놀라운 계획을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6.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목적을 완성하셨다.

 

위의 주제와 매우 흡사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보다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속성이 무시된 채 지나치게 예수님에게 치중하고 있는 예수 유일주의자들을 경계하고, 또 하나는 구원을 얻기 위해 유일한 길이 되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다른 곳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다원론자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목적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바울을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한 시도들을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행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부처를 이용하고, 이슬람교도들은 모하메드를 이용하며, 유교도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을 이용하고, 가톨릭교도들은 그들의 교황과 사제, 그리고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는 마리아를 이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것입니다. 그것은 전 세대에 걸쳐서 변함이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궁색한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방주를 지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대로 행했습니다. 그것을 믿음대로 행하는 것이 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과 방주와 율법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24:44).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즉흥적이고,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선지자들은 바로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 곳곳에 예언해 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세상에 오셔서 사역을 완수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20)

왜 하나님은 이러한 계획을 세우시고, 또한 목적을 완수하려 했습니까? 그 이유를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놀랍게도 믿는 자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계획을 세우시고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2)

하나님의 목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들로 입양시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분이십니다. 과연 죄 가운데 태어나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우리들이 그분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8:15,23,9:4). 이것은 주님의 가장 큰 목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4,5)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하신 일들에 대하여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하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은 금욕하며, 스스로 분리하고, 많은 부분에서 헌신을 함으로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가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있을 때부터 진행이 되었고,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을 통해 그분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며, 또한 완벽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은 완성되었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7.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신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설명하기는 매우 복잡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그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종교가 그들의 신에게로 다가가는 것이라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른다는 것입니다(살후 2:14). 종교가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복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모든 조건을 완성해 놓고 사람들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 쉽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주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탄의 교묘함으로 인하여 이처럼 간단하고, 쉬운 복음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분 안으로 들어오게 될 때에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구원으로 부르신 하나님

사람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멸망에 이르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님을 희생 헌물로 드리셔서 믿는 자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해 내셨습니다(고전 8:11). 주께서 구원하심이 없다면 누구도 그분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니 믿을 이유가 없다는 말의 표현이 더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또한 중요한 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2)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신 하나님

어떤 이들은 거룩한 삶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거룩함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는 한 거룩함은 없습니다. 오직 그분이 우리를 거룩함에 이르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살전 4:7)

 

(3) 화평함에 이르도록 부르신 하나님

어떤 이는 믿음 가운데 산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미움을 품고 삽니다. 이러한 미움이 커져서 나중에는 증오에 가까운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화평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평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에게 화평에 이르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들과의 화평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모두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한 형제요 자매로 지내도록 하셨습니다. 가족이 된 자들이 자신의 주장만이 옳은 것이라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분쟁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서로 화해하고 화평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4) 은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

은혜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어떤 기대나 바램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아름다운 미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바울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조차도 이 은혜 안에서 누리기보다는 여전히 다른 복음을 쫓아 스스로 고통스러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과연 주님의 은혜의 자리가 맞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1:6)

 

(5)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신과 교제를 한다고 할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 답은 당연히 아니요!”입니다. 세상의 모든 신들은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정성이 부족하다고 판단이 되면 가차 없이 징계를 가합니다. 거짓 신들이 요구하는 헌신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고 대화를 합니다. 높고 낮음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또한 필요를 공급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러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또 하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6) 그분의 나라와 영광에 들어가도록 부르신 하나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순간 신분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전에는 죄의 종이면서 마귀의 자녀였지만 이제는 당당한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머무는 장소는 장차 사라져버릴 세상이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장차 머물 처소를 준비하시고 이 땅의 심판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난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수치스럽지 않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욕에 대해서도 오히려 감사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장차 우리로 하여금 충분한 보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의 소망은 결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로 장차 있게 될 영광스러움에 더욱 큰 비중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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