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번에는 내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창29:34)
두 명의 자녀를 낳고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야곱의 아내 레아는 셋째 아들을 낳은 후 이제야 비로소 내 남편과 연합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연합한다는 의미인 ‘레위’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아들의 이름을 남편과 연합한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 지었다 할지라도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집 안에서 매우 견고한 자리를 차지했음이 분명합니다. 삼겹줄이 견고하여 끊어지지 않듯이 세 번째 탄생한 자녀는 그녀에게 있어서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레위는 모세와 아론의 선조가 되는 사람으로 후에 12지파를 대표하는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은 지파입니다.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봐서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얻은 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을 동안에 행한 일들을 보면 결코 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였던 야곱조차도 살인자로 규정한 포악하고 잔인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배경만으로 볼 때는 레위가 의로운 행위를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그의 여동생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여동생 디나는 밧단 아람으로부터 세겜의 도시 살렘 땅에 이르자 그 땅의 여자들을 보기 위해서 마을에 들어갔다가 그 땅의 추장이었던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하몰과 세겜은 야곱의 장막으로 찾아와 디나를 세겜의 아내로 줄 것을 권했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히위족속의 아들들이 모두 할례를 받으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합니다. 결국 이 약속 이후로 디나를 사랑했던 세겜은 자신의 족속들에게 할례를 하도록 명령하였고, 히위족속의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은 후 통증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을 때에 시므온과 레위는 칼을 들고 하몰의 장막으로 들어가서 세겜과 히위족속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창34:1-31). 그들이 행한 것은 자신의 여동생을 창녀로 대하듯 수치스럽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행위들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잔인한 도구가 그들의 거처에 있도다. 오 내 혼아, 그들의 은밀한 일에 가담하지 말지며, 내 영광아, 그들의 모임에 연합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이 분노 중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 의지대로 벽을 파내려 갔음이로다. 그들의 분노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진노가 잔인하니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그들을 야곱 가운데서 나누며 이스라엘 가운데서 흩으리로다. (창49:5~7)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완수하실 때까지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획들을 행하셨다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의 의미, 즉 연합한다는 말대로 그는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해시키는 일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하게 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고, 사람들 사이에서 재판을 하는 기능을 이행함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도록 만드는 일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면 레위가 결코 거룩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살인자였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수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성경의 많은 곳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여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출신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고 오히려 죄인이라고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여인들이 기록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자식을 얻었던 다말, 창녀 출신이었던 라합, 근친상간(아버지와 딸)을 통해 나온 모압의 후손이었던 룻, 다윗이 강간을 해서 얻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같이 비록 죄 가운데 잇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베드로라는 인물이 어부였을 때 부르심을 입은 후 쓰여 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부르심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야 비로소 주님께서는 자신의 일들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요21:15-17). 그 시기가 언제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을 때, 닭 울음 소리와 함께 회개한 이후였던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했을 때 주님께서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유능한 젊은이로서 하나님의 일들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나섰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들을 위해 사용되어졌고, 그가 주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의 일이 얼마나 잘 못 되었는지를 발견하고 회심하여 주님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나니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레위의 후손을 통하여 제사장의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이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의인을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서는 오히려 죄인을 쓰시고,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죄인들을 인도하도록 하는 특별하신 섭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은 처음부터 의인이었고, 지금도 의인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자만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잇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자신이 과거에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결코 사용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죄인을 불러 그분의 일을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았던 사람가운데 누구도 죄인이 아닌 자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회개한 사실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죄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께 다가가십시오. 주님은 따뜻한 손으로 반겨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