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Baxter(1615 - 1691)
Richard Baxter는 영국 Row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가난했고 그의 초등 교육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는 Wroxeter에서 학교를 다니고, Ludlow Castle에서 Richard Wickstead와 함께 공부했다. 그의 열심은 Castle안의 큰 도서관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나중에, 그는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법을 전공했었지만 집에 돌아오면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 지역의 성직자와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그는 두 명의 유명한 비국교도였던 Joseph Symonds와 Walter Cradock를 만났다. 그들의 신앙과 열정은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638년 그는 비어있는 문법학교의 선생으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Worcester의 감독이었던 John Thornborough에 의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자로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초기 사역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해에 논쟁거리들과 영국의 교회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감독 제도를 거절하면서 그는 교회와 그 제도를 추종하는 자들로부터 소외를 당하였다. 1641년 26세 되던 해에 그는 Kidderminster의 마을의 목사가 되고, 거기서 19년 동안을 사역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교회 개혁을 감행하였다. 그의 사역은 내전에 의하여 종종 중단되기도 하였다. 한 때는 군부대의 목사(군목)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660년 나라가 안정되자 Baxter는 런던으로 가서 찰스 2세가 통치하던 시대에 왕궁안의 교회 목사로서 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리를 거절하고 그의 위치와 Hereford이 감독직을 버렸다. 게다가 그는 Kidderminster의 그의 교구에서 설교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1662년부터 1687년까지 그는 계속해서 핍박을 받았다. 그는 종용하게 연구와 집필을 하기 위해서 Middlesex에서 Acton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체포되었고, 비밀집회를 연다는 이유로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말을 남겼다. “나는 결코 다시 설교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설교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는 것과 같이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다”
1685년에 그의 책 한권은 영국의 교회를 중상모략한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그의 재판은 영국 역사에서 역사가들에 의해 가장 잔인한 오해로 불리 울 정도였다. 그는 풀려난 뒤 다시 구속되었다. 그가 핍박을 받는동안 건강은 더 나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건들은 작가로서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후로 그의 책과 기사는 영국 내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게 되었다.
마침내 1691년 감옥에서 18년동안 지냈던 그는 건강을 잃고 죽게 되었다. 그는 왕, 하원, 런던 시장 앞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168권의 신학과 신앙 서적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경건한 행동, 커다란 재능, 영향력은 모든 세대에게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