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신약 성경는 유대인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손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로서 영원히 비난받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또는 그들에 대한 증오심에 대하여 변호를 하고 있는 것이 해로운 범죄에 대하여 정당화 해야 하는 것입니까? 신약 성경은 유대인에 대해 정말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유대인이라면, 이 말들은 당신을 위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2명의 유대인이 하나의 주제를 놓고 논의하고 있을 때 그들은 3개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때때로 그리스도를 따라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은 마르틴 루터(프로테스탄트의 개혁의 아버지)가 유대인의 박해를 조장했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재침례성도(Anabaptists)로서 유대인들의 모임에 대하여 박해를 조장하고 종이에 기록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는 침례성도들의 조상으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유대인은 러시아의 침례 성도들이 그 땅에서 그들의 곁에서 고생하고 있더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사람을 미워하는 정도들 가지고 그리스인인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침례 성도는 이스라엘의 국가를 위한 지지자들 가운데 가장 강한 블록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매우 진실한 것이며, 우리 믿음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만일 침례성도의 믿음에 있어서 중심에 하나의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이 모든 진리에 대한 절대 권한이다라고 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추리, 철학 또는 전통에 대하여 어떤 것이라도 불완전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주어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는 신약과 구약을 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인의 Tenach와 같은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보다 3 배나 길다는 것은, 성경의 75%가 유대인들과 당신이 같은 것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엄청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나 Tenach에서 반유태주의를 지지할 수 없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이 유대인에 대한 미움을 가르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아니오”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이 유대인과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설명함에 있어서 매우 정직하게 가르치고 있지만, 유대인에 관해 가르쳐지는 것의 대부분은 절대적으로 분명합니다. 신약 성경의 권위의 나의 신앙은 유대인에 대한 나의 강한 애정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신약 성경이 유대인에 대해 정말로 말하는 것을 읽고,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1.구원는 유대인 안에서이다
예수님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의 여성에게 영원한 삶에 관해 말을 걸었다. 그녀는 하나님에 예배할 정확한 장소에 대해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으로서의 산으로 오르는 믿음과 또는 유대인들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경배하는 것에 대하여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하고 우리는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요 4:22).
그래서 그것은 명백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유대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고, 그것을 폐하지 않기 위해 오셨습니다(마5:17). 적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Tenach에 의한 가르침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2.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로부터 왔다
일부 그리스도인 가운데 유대인이 어떤 이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을 때, 사도 바울은 그들의 주장에 동의 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모든 면에서 많으니 주된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것이라”(롬.3:1-2). 하나님이 맡기신 것은 그분께서 말하시고 기록되어진 말씀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심지어 신약 성경까지도 유대인에 의해 써졌습니다. 유대인이 없었다면, 나는 성경을 가질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 큰 선물에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선물은 유대인으로부터 왔습니다.
구원과 하나님 말씀의 선물을 넘어, 하나님이 주신 다른 선물이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말하기를“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삼으심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하나님을 섬김과 약속들이 속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체에 관한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9:4-5). 양자 삼으심, 영광, 언약, 율법, 하나님을 섬김, 약속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비록 이 선물이 이스라엘에게 존재했지만, 모든 인류는 그들에게서 유익을 얻었습니다. 예를 들면, 법이 주어졌는데. 그 법이 이스라엘을 위해 있었습니다. 여전히 오늘날도 모든 좋은 국가의 통치는 십계명에 의거하는 약간의 방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선물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것은 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저는 당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귀중한 구세주의 선물에 대해 아직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관하여 말했습니다.“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나는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히2:16). 그가“다윗과 아브라함의 아들”(마1:1)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한 사람이 완전하게 한 분이라는 개념이 당신에게 이상하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개념은 원래 신약 성경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Tenach에서 온 것입니다. 이사야서 9장6절에 인용된 이 구절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있고 그의 이름은 기묘라 묘사라 강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임이라" 어떻게 이러한 신성한 칭호들이 단지 한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아직 나는 계속 진행하기를 원합니다.
4.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거절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요1:11)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백성(his own)은 유대인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미움에 관해 언급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에 관한 언급입니다. 전체적으로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들의 메시야로서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다른 부분에서 예수님을 증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증오의 기초로 사용되어지는 몇몇 다른 구절들이 있지만 증오를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오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부분들을 참고해 보십시오.
베드로 사도는 설교하기를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스스로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님을 통하여 기적과 표적을 너희 한 가운데서 행하사 그분을 너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정받은 사람으로 삼으셨느니라 그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졌거늘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으나"(행2:22,23) 베드로는 사악한 손에 의해 예수님을 붙잡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악한 사람들은 이 구절을 사용해 오고 있으며 몇몇 다른 구절들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들이라고 부르기 위해 그리고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에 있어서 그들이 관여한 부분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반면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ㄷ르의 책임도 인정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로마의 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이 구절이 만들어 지고 난 뒤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이르되 주여 주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시오 또 주의 종 다윗의 입을 통해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이교도둘이 격노하며 백성들이 헛된 일을 꾀하는가? 땅의 왕들이 일어서며 치리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도다 하신 분이로소이다 이는 진실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모여 주께서 기름부으신 주의 거룩한 아이 예수님을 대적하였음이오니 이것은 무엇이든지 주의 손과 주의 계획이 미리 작정하사 이루고자 하신 것을 다 행하고자 함이니이다”(행4:24-28).
당신은 이 말씀을 읽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유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교도들과 헤롯과 빌라도 역시 유죄였습니다. 당신이 보시다시피 온 세상은 예수님을 거절한 것에 대해 유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희생제불로 드려지게 했으며 우리 모두는 그분을 거절했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1:11)라고 말하는 바로 그 구절 앞에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되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고"(요1:10)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을 거절했으며 우리 모두는 인류의 한 인간으로서 그분의 피에 대하여 유죄입니다. 신약성경을 통해 보았을 때 유대인의 학대에 대하여 어떠한 정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어떤 사람들은 신약 성경을 거절해오고 있습니다.
5. 유대인들의 의로움을 얻기 위한 시도
유대인들에 대하여 가르쳐지고 있는 다른 신약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재판관이 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에 대하여 말하면서 "내가 증거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면서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음이라(롬10:2,3)
저는 이 말이 불쾌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노여움을 억누르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열심과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유대인들의 모습에 대하여 신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충실한 유대인들의 모습에 들어맞지 않겠습니까? 그는 의롭게 살기 위해 매우 열심히 행했습니다. 그의 열정은 선조들의 전통을 신중하게 따르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이 무엇이 무지하다고 말합니까? 그는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유대인은 하나님의 의의 위대함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의 무지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중요한 어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사도 바울의 증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그가 자랑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3:5,6) 아직 바울은 그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가 그 문제에 대하여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길뿐더러"(빌3: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것들을 헤아리고 있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얻은 것을 잃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9)
유대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지칭하는 대부분을 포함해서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의로워지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노력들을 사용할 수 있는 약간의 계획을 궁리해 오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그들 자신의 의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전도서 7장20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을 행하고 범죄하지 않는 의인이 땅위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 솔로몬도 말하기를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4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대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저주아래 놓여져 있습니다. 신명기 27장26절에서 율법을 주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확인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사람들이 율법에 기록된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어떤 점에서 율법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인류를 향해 말하기를 "그들이 다 치우쳐서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시14:3).
유대인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로운 삶이 비록 있다할지라도 그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의로움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부 유대인들은 의를 이루기 위해 새로운 규칙들과 규정들을 찾고 주장하는데 몰두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전통들을 버리면서도 겉으로는 그것들을 지키는 것처럼 해 오고 있습니다. 매우 많은 유대인들이 무신론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들의 종교는 그들에게 평화를 주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의를 전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교리에 대한 최초의 가르침은 Tanach로부터 왔습니다. 아브라함을 봅시다. "이에 아브라함은 주를 믿으니 그분께서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창15:6) 그것은 의가 전가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으면 하나님은 그에게 의를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의 의가 우리 위로 놓여지게 될까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놓여지는 순간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이것은 참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나의 주시오 구원자로 믿습니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으로 나는 살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의로움은 나에게 전가되었으며, 나는 매일 그분의 의로움 안에서 성장해 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 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니라...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이니라"(롬10:9-10,13)라고 말합니다.
6.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분의 왕국을 받게될 것입니다.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을 지지하는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창12:3) 또 다른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왕국이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그분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그 왕국을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다시 왕국을 회복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착각할 것을 우려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대답하시기를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왕국이 회복될 때가 올 것이지만 그 때와 시기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가르치기를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롬11:25)고 말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방인들이 지배하는 시대는 어느 날 끝날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니 이것은 기록된 바 시온에서 구원자가 나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시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죄들을 제거할 때에 그들을 향한 내 언약이 이것이기 때문이라 함과 같으니라"(롬11:26,27) 신약성경의 다른 한 부분에서는 언젠가 이스라엘이 장래에 다시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진리에 대하여 확인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오, 그것은 얼마나 영광된 날입니까?
7. 그들의 메시야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될 유대인들
바울은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느냐?"(롬11:1) 그는 대답하기를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11:1,2)라고 말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오직 홀로 남아 있었다고 생각한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바알의 형상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에 대하여 상기시키셨습니다. 바울은 그 다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은혜의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 언제 어느 때이건 예수님을 진실한 메시야로 인정하는 유대인이 항상 있을 것이며, 아마도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결론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니 곧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롬10:1) 그는 더 강도를 높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큰 근심이 있고 계속해서 슬픔이 있으니 이는 육체에 따른 내 형제 내 친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임이니라"(롬9:2,3) 바울은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 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구원을 얻게 될 수 있다면 하늘에서 그의 자리를 단념할 만큼 너무도 사랑했습니다. 놀라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사랑의 표현은 대언자 이사야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당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니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찔림을 받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 당한다 하였노라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라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서 이사야 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해당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기름부음 받으신 한 분뿐인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십니다. 당신이 그분을 맞이하든 맞이하지 않든 저는 그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저의 사랑은 당신이 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오는 평화를 알기를 원합니다. 조금이라도 그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