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날들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녀에게로 들어가겠나이다, 하니 라반이 그곳의 모든 사람을 함께 모아 잔치를 베풀고 저녁때에 자기 딸 레아를 데려다가 야곱에게로 보내매 야곱이 그녀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자기 하녀 실바를 자기 딸 레아에게 여종으로 주었더라. 아침이 되니, 보라, 이는 레아라.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 일을 행하였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어찌하여 외삼촌이 나를 속이셨나이까? 하니 라반이 이르되, 우리 지방에서는 결코 맏/딸/보다 작은/딸/을 먼저 주지 아니하느니라. 그녀를 위하여 이레를 채우라. 우리가 이 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녀를 위하여 또 칠 년 동안 나를 섬길지니라, 하매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녀를 위하여 이레를 채우매 라반이 자기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자기 하녀 빌하를 자기 딸 라헬에게 주어 여종이 되게 하니 야곱이 라헬에게도 들어가니라. 그가 또한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기니라. (창29:21~30)
레아라는 한 여성을 관찰하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세상에서 많은 수모와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곱에 의해 사랑을 받았던 라헬이라는 여성에게 주목하지만 실제로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위로하시고 은혜를 주신 것은 레아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녀는 처음부터 남편에게 관심을 끌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관심을 끌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동생이었던 라헬과 비교하여 매력적이지 못한 외모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눈매가 연약하다(tender)고 기록한 사실로 봐서 그리 총명해 보이지도 낳았을 뿐 아니라(창29:17), 라헬과 비교한 사실만으로 봐서도 그리 아름답지도 못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을 가지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야곱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라반의 사욕과 강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아내가 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 봐서 그녀는 매우 순종형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기 보다는 평범하면서도 단순한, 어찌 보면 우둔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레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련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진정 어리석은 자들을 통하여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고전1:27). 레아는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여인입니다.
둘째로 그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생애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하여 매우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창29:30)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 바로 레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매력적인 여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야곱과 평생을 살면서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야곱의 편애가 라헬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야곱에 레아를 사랑했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레아는 다만 야곱의 후손을 이어주는 즉 자녀를 낳은 도구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불행한 세월들을 보낸 여인이었습니다.
그 증거들을 보십시오. 라헬이 죽은 이후로 레아는 모든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야곱은 라헬의 아들이었던 요셉과 베냐민에게 모든 사랑을 집중시킵니다. 성경은 이러한 야곱의 행위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야곱)이 “자기의 모든 자식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요셉을 위하여 채색 옷을 지어 입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37:3). 이러한 야곱의 행동은 레아에게 있어서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이 레아의 자녀들에게도 얼마나 크게 영향을 이치고 있는지는 그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이 일에 가책을 느껴서 결국 이집트(애굽)의 종으로 팔아넘기려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그들의 어머니였던 레아에게 있어서도 매우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평생을 이처럼 남편의 편애 속에서 견디어야만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녀가 결코 불행한 여인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행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낳은 아들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데 있어서 중심에 있었고, 하나님은 그녀의 후손에서 메시야(그리스도)를 탄생시키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시대에는 그녀의 둘째 아들이었던 레위의 후손들을 통하여 제사장을 삼으셨고,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셨으며, 넷째 아들이었던 유다의 후손에서 다윗 왕을 세우셨고, 유대의 역사를 이끄셨으며,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수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받는 고통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는 것은 바로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얻을 유익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서 분이라면 우리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아는 세상에서 매우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도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불쌍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모든 쾌락과 육신을 만족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하여 인내하며 어찌 보면 스스로 고난의 길로 들어선 자들과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생활을 면해 보기 위해서 힘쓰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결과들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이미 증거 해 준 것입니다.
레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낙심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살아갈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미련한 자들일지라도 결코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지 못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지 말 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도 합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의 능력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하고 천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철저하게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세상에서의 명예를 얻기 보다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고, 또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