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 상 위에 전시하는 빵을 두되 항상 내 앞에 둘지니라(출25:30)
상의 크기는 길이가 이 규빗(91.2cm), 폭이 일 규빗(45.6cm). 높이가 일 규빗 반(68.4cm)입니다. 그리고 재료는 시팀나무에 금을 입히도록 했습니다. 네 모퉁이에는 금고리를 달게 하고, 상을 나르는 막대기도 시팀나무로 만들되 금을 입히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재료를 나무로 만들고 금을 입히도록 한 것은 장차 사람으로 오실 예수님과 만왕의 왕 되실 예수님의 모형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소 안에 이처럼 상을 두도록 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상은 언제나 교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져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이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데려와 자신의 상에서 음식을 나누면서 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삼하9:12). 비록 원수의 집안에 속한 사람이지만 함께 식사를 나눔으로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시편을 통하여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시23:5)라는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은 교제와 은혜가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의 모습을 보면서 흥미롭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상의 높이가 앉아서 먹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의자가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바닥이 흙, 혹은 모래로 되어 있어서 앉을 수도 없겠지만 우리는 이 교제가 결코 받아먹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서 움직이면서 먹는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교제를 하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은 매우 기초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듣는 이들이 말씀을 듣고 아는데 그치게 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서서 먹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설교를 들을 때 서서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절반이 교리를 가르친다면 절반은 행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상이 이동하도록 제작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만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결코 어느 한 곳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지 주님은 그들과 함께 머물 것입니다. 비록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곁을 떠나 미디안에 있었어도 주님은 그곳에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동굴 속에 있어도 그 속에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을 피해 광야로 피했어도 주님은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주님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주님은 함께 하실 것이며, 상을 베풀며 교제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과 더욱 가까이 살아가실 수 잇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