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가 주는 교훈 (출애굽기 14:21-25)|

조회 수 4224 추천 수 0 2010.06.08 22:18:0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에 이르게 하실 때에 삼일 길이면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헤매게 하시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함에 있어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시고, 만나로 양식을 공급하셨으며 때로는 메추라기로 그들의 배를 채우셨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공급하셨으며, 각종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하며 살았다는 사실로 넘겨버리기에는 매우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광야의 기록은 곧 오늘날 교회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광야를 헤메는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교회의 지체된 우리의 모습을 조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방법대로 살아가는 땅 - 애굽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 받아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연을 가지면서도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 속에서 야곱의 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있는 동안에는 작은 사건 하나에도 하나님의 흔적을 볼 수 있었지만 기근으로 인해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후(창 46:7), 430년 간에 걸치는 삶 속에는(출 12:40) 하나님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땅에서 모습은 비록 숫자적으로 많아져가고, 굶주림으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들의 핍박에 의해 비로소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출 1:8-14). 결국 애굽은 그들이 기근을 피해 잠시 머물 안식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땅 즉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잊고 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은 곧 세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머물 안식처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 대하여 매우 비관적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리켜서 안개 같은 인생(약 4:14), 풀의 꽃과 같은 인생(약 1:10, 벧전 1:24)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머무는 동안의 인생은 아무리 부요 하고, 화려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영광에 비할 수 없으며(마 7:26-29), 자기의 육신을 위해 쌓아올린 탑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또한 만드신 동산인 에덴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곳에서의 생명과 안식은 지금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버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일명 지식의 나무)를 먹으므로 범죄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에덴에서 쫓겨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곧 땀흘려 일하며, 해산의 고통이 있는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에덴(하나님의 나라)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 약속해 있듯이 세상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둘째 아담(예수님)을 보내셔서 쫓겨난 그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에덴(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안식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부르심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건너야할 땅 _ 홍해의 마른 땅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 갖가지 재앙을 바로의 백성에게 내리셨고(출 7:-11:),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날 채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으로 이르는 길은 길 건너 광야가 기다리고 있는 홍해였습니다. 삼일길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길을 버리고 홍해로 인도한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가로막힌 홍해 앞에서 그들은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원망의 소리가 들려 오게 되었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미는 순간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셔서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건너갔고 뒤를 따르던 애굽의 군사들은 모두 수장이 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은 건너고, 애굽의 군사는 건너지 못했을까?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피를 바르므로 살아났습니다.

그의 백성들은 피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바르므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엇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기 전에 이미 피를 경험했고 하나님은 이를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키도록(기억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출12:14).

우리의 믿음의 시작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의 희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들을 사망으로부터 건져 주시기 위해 피 흘리셨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의 삶이 잠에서 깨어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 사건이 있기 전까지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사건 이후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었습니다.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 전까지는 세상이 인간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 천국은 개방되었고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을 놓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적용을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매여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내 마음에 예수님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이고, 종의 삶을 청산하고 자녀 된 삶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례 신앙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어떤 이들은 침례의 시작이 이방 종교에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이방인들도 침례(혹은 세례)와 비슷한 형태로 그들의 신들을 섬겨온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도 일월성신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 전에 목욕재개를 하는 모습은 의식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물에 완전히 수장되었다가 나오는 성경의 본래 의미인 '침례'라는 말보다 씻는다는 의미를 가진 '세례'라는 용어가 더 가깝게 여겨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침례가 있게 된 것은 결코 당시의 이방신에 의한 영향에서가 아니라,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는 신앙의 회복을 촉구하며 회개에 이르게 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마 3:6).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홍해를 건너기 전까지는 아직도 애굽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로막힌 홍해 앞에서 뒤따라오는 애굽군대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앞뒤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선택했고 홍해는 그들 앞에서 갈라졌습니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마른 땅이었지만 양쪽으로 물기둥이 서 있는 채로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건너갔고 뒤따르던 애굽 군사들은 모두 수장 당한 채 죽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자신의 목숨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면서 건넜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자아가 완전히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 신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을 때에는 이미 새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갈라진 물이 닫혀지는 순간 애굽과는 상관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단순한 지식만을 가지고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혹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인 죽으심과 부활(고전 15:1-4)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도 애굽인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에 참여한 자는 세상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벗는 날까지 한시적으로 세상에 머물러 있겠지만 이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빌 3:20). 부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여 침례 신앙을 경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머물러야 할 땅 - 광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소한 땅 광야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숙소 등 어느 것 하나 준비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홍해를 건너왔지만 삶의 변화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광야 한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과 구별된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그의 자녀들을 불러모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습니다. 물질, 명예, 권세, 지식 등 모든 것을 버리도록 말씀하시고(빌 3:5-9), 오히려 정치와 다른 종교의 세력으로부터 무수히 피를 흘리면서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어떤이들은 교회 다니면 부자가 되고, 병이 낫고, 만사가 형통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모습은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행 4:34-35), 오히려 병든 것을 은혜로 여기고(고후 12:7-9), 수많은 매와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애굽에서 나온 자 중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이른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애굽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참 안식의 땅 가나안에 이르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많은 잡족이 함께 따라왔습니다(출 12:38).

그들에게 있어서 가나안은 다만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장소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부요와 만족에 있었습니다. 자연히 이 섞인 무리(민 11:4)들은 광야에서의 삶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매사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하며 육신을 만족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원망을 심었고, 애굽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안식의 땅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수많은 잡족들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을 일삼고 있습니다(골 3:8). 교회 안에 원망이 있게 하며, 자기의 배를 채우고,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잡족들과의 교제를 지속하고 있다면 안식은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에 의해 잠시나마 육신의 행복을 누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심판 받아 죽어 장사지내는 것입니다(민 11:33,34). 결국 육체로 믿는 삶의 결과는 심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목적은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신 8:3).

광야는 애굽에서의 생활에 젖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장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방을 둘러보아도 육신을 만족시킬 만한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광활한 사막과 나그네로서의 위험은 그들을 더욱 절망스럽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가 아니면 먹을 수가 없었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아니면 혹독한 사막의 날씨를 견뎌낼 수 없었으며, 사십년동안 입었던 의복마저도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했었던 것입니다(민 8:4). 이러한 훈련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살아갈 것을 요구했지만, 언제나 이 참뜻은 외면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의 존재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한 훈련 장소입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가 점차 의식화 되어가고, 단순한 교제나 문제 해결의 장소로 변해 가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자녀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 방법에 있어서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생각하게 하시고 때로는 가난하게, 때로는 부요하게, 때로는 질병으로, 때로는 고난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도록 하십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육신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고 오직 그분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입술로 증거 하는 삶의 모양으로 살아 가야할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의 땅 - 가나안

광야에서 난 자는 모두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온 자는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통과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사는 자가 이 땅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모든 자들을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살전 4:14-17).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땅입니다. 또한 교회의 역사가 증거하고 있듯이 무수한 박해와 순교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곧 맞이하게 될 천국이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의 광야생활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나온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가나안을 약속 받지 못했다면 백성들은 흩어지고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교회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존재의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안식의 땅 가나안을 사모하여 40년의 광야 생활을 견디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같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며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광야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미 세상에 물든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다른 종교 집단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일한 권위를 두고, 세상과 짝하지 아니하며, 서로를 돌아보는 참된 교회라야 만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조명해보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설계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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