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6편은 시편 105편과 짝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시편 105편이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과 구원의 역사를 찬양한 시라면, 시편 106편은 그 언약의 사랑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순종했던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회개의 시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은혜로우시고, 인자는 영원하시지만, 인간은 반복해서 잊고, 배반하고, 죄 가운데 넘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불러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우리 모두가 드려야 할 회개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먼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절) 이 고백은 시편 전체의 신앙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불순종은 끊임없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은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회개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우리가 변했어도 주님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시며, 그 인자(헤세드, חסד)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언약적 신실함으로부터 나옵니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그 모든 찬양을 다 선포하랴.”(2절)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너무 크고 놀라워서 다 말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어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과 민족의 죄를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6절) 이 구절은 단순한 역사적 반성이 아닙니다. 시인은 과거 조상들의 죄를 ‘그들’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로 고백합니다. 즉, 죄의 책임을 피하지 않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회개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의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뿌리를 내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때의 사람들”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모습 속에도 동일한 불순종과 교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회개를 원하십니다 — 타인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회개.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배반을 고백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놀라운 일을 깨닫지 못하고,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며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7절)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은혜를 금세 잊었습니다.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셔도, 우리는 곧 그것을 잊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으면 감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염려로 불평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를 잊는 순간,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나니 그의 큰 권능을 알리려 하심이라.”(8절) 이스라엘이 불순종했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곧 자신의 신실하심과 명예를 위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불순종해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보다 자신의 언약을 더 소중히 여기십니다.
시인은 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사건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14절)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였도다.”(19절) 광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보다 눈에 보이는 고기를 원했고,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원했습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의 죄는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는 세상적 성공과 안락함을 더 신뢰합니다. 말씀보다 물질, 은혜보다 조건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 외에 무엇인가를 더 의지하는 순간, 그것이 곧 우상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 속 금송아지를 깨뜨릴 때, 하나님은 다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시인은 이어서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불신앙을 회상합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을 멸시하며 그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24–25절)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불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현실의 거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의 길을 열어주시지만, 우리는 종종 불신으로 그 문 앞에서 멈춥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으로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황을 초월한 신뢰입니다. 믿음은 현실의 벽을 넘어,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타락과 죄를 언급합니다. 그들은 이방 신들과 섞였고, 그들의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아들딸을 귀신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쳤도다.”(37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를 이방 신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결국 가장 소중한 것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가치에 물든 신앙은 결국 가정과 자녀를 잃게 만듭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 후대는 신앙을 잃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믿음은 단순한 모범이 아니라, 가정을 살리는 영적 유산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편은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깊었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그보다 더 깊었습니다. “그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그들을 위하여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의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에게 긍휼을 받게 하셨도다.”(44–46절) 이 얼마나 위대한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징계하셨지만,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심판하셨지만, 끝내 회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도,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불러도, 혹은 침묵해도, 주님은 언약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시편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주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어다. 모든 백성이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47–48절) 시인은 마지막에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사 모으소서.” 이 말은 단순한 회복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고, 상한 자를 싸매시며, 죄인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찬양으로 끝납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시편 106편은 인간의 죄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대조합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잊고, 하나님은 반복해서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넘어지지만, 하나님은 매번 손을 내미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 고백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연약하나, 주의 인자는 영원합니다.” “주님, 제가 자주 잊었으나, 주님은 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그분의 언약 안에서 다시 서는 은혜가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