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면류관, 고통 속의 영광
본문: 마태복음 27장 27–31절 / 요한복음 19장 1–3절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조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마태복음 27:27-30)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세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요한복음 19:1-3)
‘면류관’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영광과 존귀, 권세를 상징합니다. 고대 제왕들은 황금으로 된 면류관을 머리에 씌우며 통치권과 위엄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쓰셨던 면류관은 세상의 영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시로 엮어 만든 면류관이었습니다. 피와 상처, 수치와 고통이 흐르는 면류관이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그 가시 면류관의 의미를 묵상하며, 그 안에 담긴 깊은 복음의 진리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쓰신 가시 면류관은 첫째, 인류의 죄와 저주를 상징하는 표지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의 타락 이후, 땅은 저주를 받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됩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세기 3:17-18) 이 말씀은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결과로 가시가 생겨났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가시는 인간의 죄악, 타락,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쓰셨다는 것은, 단지 로마 군병들의 조롱의 도구가 아니라, 그분이 인류의 죄와 저주를 머리에 이셨다는 선언입니다. 머리는 생각과 지혜의 중심이며, 동시에 인간 존재의 가장 높은 자리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머리에 이셨다는 것은, 인류의 모든 죄와 저주를 가장 깊이, 가장 철저히 담당하셨다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로 인해 피 흘리시며, 그 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속죄제사와도 연결됩니다. 제사장이 죄인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는 죄의 전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제사장이 아니라 친히 희생양이 되어 우리의 죄를 자기 몸에 전가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고린도후서 5:21)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순간이 바로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 시점입니다.
둘째로, 가시 면류관은 세상의 조롱과 폭력에 대한 주님의 침묵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27장과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군병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며,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로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주님을 왕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왕이라는 칭호를 희롱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이 조롱의 배경에는 세상이 바라보는 ‘왕’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상은 칼과 권력, 부와 명예를 통해 다스리는 왕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과 희생으로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마가복음 10:45)
예수님은 그 모든 모욕과 조롱, 고통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반항하지 않으셨고,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53장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7) 그분의 침묵은 무력함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인내요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조롱,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주님이 대신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가시 면류관은 영광의 시작, 승리의 출발점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가시 면류관은 수치요 패배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기 위한 시작점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모습으로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5:6) 그 어린 양은 더 이상 무력한 희생이 아니라,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이처럼 가시 면류관은 금 면류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문이 되었고, 고난은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은 잠시이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영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4: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혹 지금 우리의 머리에도 가시 면류관이 얹혀진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억울한 일, 원치 않은 고난, 이해되지 않는 조롱과 실패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도 그 길을 먼저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부활과 승리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바라봐야 할 면류관은 세상의 금 면류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라지고 썩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 (야고보서 1:12) “의의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의의 면류관이니.” (디모데후서 4:8)
오늘도 우리는 주님이 쓰셨던 가시 면류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그 면류관을 조롱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과 희생, 그리고 승리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도 고난이 있을 것이나, 그 고난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 너머의 부활과 면류관을 소망하며 나아가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노라.” (요한계시록 2:10)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오늘도 가시 면류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영광은 고통 너머에 있습니다. 승리는 십자가 뒤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