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매우 독특한 인사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이 사도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사도라는 호칭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 쓰여 졌던 말입니다. 그가 이처럼 모든 서신들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사도로서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처음 12명의 제자 가운데 속하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그가 사도일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서신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사도됨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사람의 의지가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서는 믿음(believe)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은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는 더욱 많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faith)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말씀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롬10:17). 만일 누군가가 스스로 깨달아져서 하나님을 믿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분명히 종교인이자 이단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시고 그의 귀에 믿음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 그 말씀을 믿고(believe) 영접하는 자들에게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만으로 구원자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성경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계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인내하고 계십니다(벧후3:9). 그분은 여전히 과거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구원자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이 구원자로서 소개되고 있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본래부터 절망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길은 막혀있었고, 지옥으로 향하는 그들을 구원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일한 소망이 된 것입니다.
주(Lord)라는 표현에는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소망은 결코 아들 하나님만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 모두의 사역이자 계획이었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계신 분이었으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계획하시고 활동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만일 우리의 주변에서 누군가 지옥으로 가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Jesus)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 땅에 죄 없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롬3:23). 다시 말하면 이 땅의 누구도 죄를 없앨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는 방법 외에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Christ)라는 말에는 세 가지의 속성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에게만 기름부음이 행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님은 바로 이 세 가지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선지자로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를 중보하시는 제사장으로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왕으로 세상에 오셔서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그분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까닭에 여전히 지금도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주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그는 언제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의 행복을 생각한다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영광스러운 날들을 계획하며 사실 수 잇기를 바랍니다.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르심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매년 수천 명의 신학생들이 졸업을 합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실제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교회와 관련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모두 주님의 종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에 대하여 결코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주님의 명령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자신의 사도됨을 말하기 위한 것이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일을 맡은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소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소명이 없는 일꾼은 참 된 일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1:3)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고후1:1)
바울은 다른 서신들을 통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 혹은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름 받은 자들이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역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바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각자 다른 은사들이 있고, 주님은 그들이 가진 것들을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들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을 알고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
바울의 이 독특한 표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는 디모데를 친 아들(my own so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 후서에서는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아들(my dearly beloved so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딤후1:2).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이러한 표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독신주의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카톨릭은 이 부분에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참된 믿음의 아들”(딤전1:2)“아들같이 사랑하는”(딤후1:2)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결코 디모데에게만 쓰인 것이 아닙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딛1:4)
바울은 디도에게도 친아들(my own son)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아들에 대한 표현이 결코 육신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표현으로 아들이 된 것은 믿음 안에서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를 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믿음 안에서 친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육신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을 낳는 일이 결코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은 사람이 복음의 말씀을 전함으로 거듭나는 것이므로 믿음에 있어서는 전하는 자가 아버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표현은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도 수많은 믿음의 아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 일들을 위해서 전하는 일을 계속해야만 하겠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이러한 인사는 바울만이 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서신서에도 이러한 동일한 인사가 편지의 처음 부분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고자 했던 소원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1:3)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유1:2)
은혜(Grace)는 아무런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은 구원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은혜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과 같이 병 고침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부자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소망은 더 이상 이 땅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더욱 많은 것들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긍휼(Mercy)이라는 말의 의미는 때로는 자비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불쌍히 여겨서 돌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만큼 어렵고 힘든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위로가 필요했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의 직접적인 돌보심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강(Peace)은 말 그대로 주님의 도우심 속에서 그들이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주님의 손에 의해 결정이 될 것입니다. 제 아무리 사람들이 평화를 외치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연약한 자들일 뿐입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