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야고보서3:1)

조회 수 1889 추천 수 0 2010.06.07 23:44:29

내 형제들아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지니 이는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알기 때문이라(야고보서3:1)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선생이 되지 말 것에 대한 이 말씀들이 주일학교 교사나 혹은 가르치는 위치에서 봉사를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특별히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로 봉사를 하지 않는 자들은 이 말씀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지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믿음의 실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말의 실수를 줄이십시오.

성경은 많이 선생이 되지 말 것에 관하여 말씀하면서 "혀"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혀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배의 키""불"로 비유하면서 그것은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대로 움직이는 것이며, 또한 비록 작은 지체이지만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고 자신도 지옥 불로 불타게 될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또한 이 혀는 길들일 사람이 없어 이것은 다스릴 수 없는 악이요, 죽이는 독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3:2-8). 분명한 사실은 혀가 몸 가운데 비록 작은 부분에 속한 것이지만 온 몸을 다스리고, 또한 자신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실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후5:17).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신분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모든 존재가 변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럽던 몸은 이제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지옥으로 던져질 영은 이제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육의 일에 모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혼은 이제 하늘의 일들을 생각하며 오직 영의 일들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변했습니다. "혀"는 이 변화된 모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만일 여전히 구원받기 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의 구원은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이 시대에는 너무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촉망받는 젊은이였고, 또한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차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면 분명히 중요한 일을 맡아 나라의 일을 관리하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자신의 잘 못을 깨닫고 돈을 돌려주려 했지만 거부를 당하고 심한 자책감으로 인하여 결국 죽음의 길을 택했습니다(행1:15-19). 결국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전형적인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의 제자이기도 했으며, 또한 많은 기적을 보았고, 직접 전도를 하며, 능력을 행하기도 한 자였지만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한 자로 분류되고 만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모셔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훌륭한 교회, 훌륭한 목사가 구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바로 나 자신이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모셔들이는 결단의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일을 하셨다면 당연히 그 순간부터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들은 그의 모든 인격의 기준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자칫 말의 실수가 있게 된다면 누군가를 실족시키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실족하게 하는 자들은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우리 몸에 실족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찍어 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18:6-9). 끔찍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의중이 담겨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말에 있어서 신중합니다.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한 입에서 다른 말들을 내보내지 않습니다(약3:10-12).

2. 성경은 내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복음적인 교회 안에서는 그들의 독특한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성경의 기준 안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며,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질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것들은 때로 교회의 강단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지기도 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은 초신자들에게조차 성경에 기록되어지지도 않은 기준들을 가지고 권면하고 가르치려 합니다. 그들은 어느 덧 선생이 되어 있습니다.

가령 부부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을 해 봅시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교회에 오는 것이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여자들에 대하여 매우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는 말씀을 가지고 여자들의 입을 막고 그것이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다가 아내의 의무에 대하여 말하면서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골3:18)는 성경의 말씀을 들이밀고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요구하는 일들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이 어머니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가르침은 그야말로 매력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의 방법들은 그리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내들아!"라고 말한 것은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그것이 남편에게 가르치도록 주신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아내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반대로 "남편들아!"라고 말한 구절은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그것 역시 아내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녀들아!'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주신 것이요, "장로들아!"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장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명령되어진 말씀은 뒤로하고 다른 이들에게 주어진 말씀에 관심을 갖습니다. 아내가 불순종하기 전에 자신이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남편의 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 역시 남편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동아 보십시오. 자녀들을 보기 전에 부모로서의 자신을 돌아보고, 목양자들의 모습을 보기 전에 성도로서의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성경은 그 말씀을 받아야 하는 대상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선생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매사에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을 하게 될 것이며, 또한 판단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기준에 합당한 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기준을 두고 성숙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누군가를 가르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내게 주어진 말씀이며, 나는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르침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르치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기준이 되어 줄 것입니다.

3. 진정한 권위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복음적인 교회에서는 "니골라당의 교리"에 대하여 매우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다 같은 형제요 자매이며, 주님 앞에서 제사장임을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 적당한 권위를 가지지 않고 운영을 할 수 있을까요? 사실상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모두가 같은 형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해 가지만 실제로 그 안에서는 적당한 조직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교회의 조직적인 운영에 대하여 결코 판단하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겉으로만 성경적인 체 하는 위선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도 감독과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모두 같은 형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지만 교회의 운영을 위하여 섬기는 자들을 세우고 교회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봉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성도들은 그들의 결정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오늘날의 복음적인 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제가 있는 교회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없이 교회는 성장을 계속해 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핵심을 잡아내야만 합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교회 안의 권위자들에 대하여 순종할 수 있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그 사람들이 훌륭한 인격과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베드로나 바울, 요한과 같은 자들을 통해 훌륭한 지도력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들을 통해 훌륭한 지도력에 대하여 배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만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지도 못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어도 유대인의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당시에는 바울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의 스승 가말리엘은 당시에 최고의 학자였지만 그는 역사의 어느 곳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하기 힘들며, 바울이 만일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유대인쯤으로 기록되어 후대의 사람들에게 매우 악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복음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딤전1:11).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양육시키는 자들입니다.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다만 주님의 일들을 대신하고 있는 자들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권위와는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만일 권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들이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복음이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 권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고전9:27) 사실상 이 고백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회의 목양자들이 생각해야만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목양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한 현상들은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스스로 권위있는 자리에 앉아 있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그들이 가진 것은 바울의 고백과 같이 배설물로 버려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무엇이 권위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그 위에 어떠한 것도 올려놓아서는 않됩니다. 설교자가 권위가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자신의 철학이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복음을 말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교회에서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복음을 말하고 있다면 그는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존경하십시오. 그의 권위를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에게가 아닌 주님에게 순종하고 있는 행위임을 기억하십시오.

권위와 관련하여 중요한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아래로부터 올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성경을 붙들고 젊은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입으라"(벧전5:5)고 권면을 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 앞에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로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벧전5:2)는 말씀대로 살고 있지 못한다면 그의 가르침은 아무런 효과를 드러낼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먼저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진정 선생이 되고 싶다면 먼저 순종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선생이 되고자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을 배우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가르치고 싶어한다 해도 현재의 생활이 성경대로 사는 모습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선생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권위는 결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따르는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위에서 많이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하는 세 가지 이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성경은 더 많은 이유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실수하기 쉬운 것들만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까? 그리고 성경을 정죄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교회는 권위를 갖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돌아볼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디 우리의 모습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갈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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