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보면 나무가 다 죽은 것 같습니다. 어느 나무가 살았는지, 어느 나무가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봄이 되어야 나무는 싹이 나고, 꽃이 피어, 결실 함으로 살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가 죽어 있다면 어느 계절이든 싹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 현상에 대해 종종 오해를 합니다. 남쪽을 향하여 서 있었더니 싹이 나더라, 어떤 비료를 주었더니 꽃이 피더라는 등...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은 무슨 거름을 주었느냐, 어느 쪽을 향해 서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꽃이 더 잘 피게 하고, 싹이 더 잘나게 하는 것뿐이지 생명을 만드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이 부분이 잘 정리되지 않으면 매우 혼동이 됩니다. 출생을 자기가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출생에 관한 한 우리에게는 전혀 조건도 없고, 출생하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나무와 같은 우리의 존재 위에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치 않고 생명을 부여하시는 주님! 부활은 이 사실을 증거해 주는 명확한 사건입니다. 죽음에서의 부활! 새 생명으로의 출발! 이것은 주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소망스러운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곳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어찌보면 현재의 상황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다시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장면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지금은 주님의 부활을 맞이했고, 주님과 함께 조반을 나누었습니다.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모습을 진단해야만 할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주님께서 만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늘 우리가 죽었었던 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동안 제자들은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예수께서 유대를 통치하실 왕이 되어지길 학수고대했습니다. 심지어 누가 크냐고까지 예수님에게 묻곤 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꿈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일종의 수치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일종의 기본적 양심을 가진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평소에 예수님께 제대로 충성하지 못하고, 말씀을 깊이 새겨듣지 못한 점을 한스러워 했습니다. 더욱이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는 순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깊은 회상에 잠겨 있었고 고기가 잡히지 않자 그들은 심히 괴로워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낙심과 절망속에 있는 제자들,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꿈을 포기해 버린 그들 앞에 주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공과 축복에 병들어 있습니까? 마치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엄청난 출세가 보장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가 이러한 생각들이 버려지고 자신의 죄인 됨을 자각하고 부족함을 시인할 때 만나 주실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죄인 됨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축복으로 그 증거를 나타내시더라는 것입니다.
성공과 축복! 그 자체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에 매달려 복음의 본질을 망각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그리 강하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결국 우리는 빵 문제에 넘어 지고 마는 것을 봅니다. 공산주의 같은 철두철미한 사상이라는 것도 빵 앞에는 굴복하지 않습니까? 비단 빵의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은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욥에게도 갑절의 축복을, 아브라함에게도 자녀와 물질을, 다윗에게는 명예와 권세를 주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베드로에게 생선을 가져 오라 하셔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혀 있는 고기들을 보게 하십니다. 이미 베드로에게 있어서의 생선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보게 하심으로 153마리나 되는 생선과 함께 모두가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막연하게 기쁨을 주기보다는 주님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의도가 서려 있습니다. 우리가 주 앞에 바로 섰을 때 주님은 반드시 세상 사람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풍성한 축복의 증거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은 함께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밤새도록 바다에서 지새웠던 제자들, 그들 앞에 고기들은 잡히지 않았고, 그들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지쳐있는 제자들 앞에 주님께서 나타나셨고, 예수님은 선장 되어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순종했고 153마리의 고기가 그물 안으로 몰려오는 기적을 그들은 체험합니다. 제자들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 주님과 함께 했을 때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 목회를 하면서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어느 노 목사님 한 분이 제게 와서 "이 목사 왜 그렇게 어렵게 일하나! 맡겨 버리게. 그러면 쉽게 할 수 있네"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면 밤이 맞도록 수고해야 고기 한 마리도 건져 올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유능한 선장이 필요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생명 없는 이가 어떻게 결실 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생명을 지니신 그분을 모시고 결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은 성도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망적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죽은 자였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모습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새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십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