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행하신 기적이 바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아 갔을 때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되었습니다. 잔치 집에서 술이 떨어진다는 것은 잔치를 주최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부끄럽고도 난처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요청했고, 예수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거절했으나 예수님의 어머니는 종들에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할 것을 당부하시자 예수님은 마침 곁에 있는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도록 명령하십니다. 아귀까지 물을 가득 채운 후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자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즙를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후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즙를 두었도다'라고 말하면서 물로 된 포도즙를 극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행하신 기적의 의미는 곧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전면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살펴봄으로 우리의 생애를 다시 한 번 진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릴리 가나 - 낮은 곳
'가나'의 말뜻은 갈대 혹은 낮은 곳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상태와 위치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곳 '가나'에서 사역을 시작하심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갈대와 같이 연약한 인간, 낮은 곳에 처한 죄인들을 찾아 가셨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처음 장소는 베들레헴 작은 마을의 구유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이고, 구유는 양식을 담아 먹이는 통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작은 마을의 한 구유에 나셨다는 사실은 구원 계획의 방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양식을 먹기 위해서는 작은 마을로 찾아와야 합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로 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언제나 낮은 곳이었습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세리와 같은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나주셨던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찾아왔고, 부자 청년도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그들은 결국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찾아가실 수 없는 너무도 높은 곳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면 보다 낮은 곳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겸손한 자세로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오히려 서로 상관이 있게 하기 위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게서 혼인자리에는 함께 계셨지만 아무런 관계도 아니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에 관해 듣고 배우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런 관계도 아닌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이 모태에서부터 말씀을 들었고 예배당 안에서 평생을 지내왔다고도 말하지만 전혀 예수님과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이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에수님과 상관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비결을 제시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말씀의 순종이 주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첫걸음입니다.
누가복음 5장1-11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깊은데로 가서 너희의 그물을 내려 한 번 끌어 당기라'(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우리가 발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잡은 것이 없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하고 바다로 나가 그물을 내렸을 때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자, 다른 배를 불러 두 배에 가득 채우는 일이 벌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어두운 밤에 양식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 베드로와 같이 지치고 피곤해져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평생을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주어지고 순종한다면 그들의 힘겹고 고달픈 인생은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의 시작은 말씀의 순종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또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그들이 자기들의 배를 뭍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예수님을 따르니라'(11절)는 부분입니다.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심으로 시작되었지만 결단은 그들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씀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도 세상 속에서 죄와 상관하며 살고 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나음을 입었지만 오직 한 명만이 감사할 줄 알았고, 구원을 얻었으며 나머지 아홉은 다시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일회성 관계가 되어지고, 기복 신앙에 젖어 단순히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만 관계를 맺고, 세상과의 관계 즉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곧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기를 잡던 자들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듯이 세상에 대한 모든 염려, 근심, 걱정들은 버려 두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 삼으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말씀이 주어졌다면 순종하고 그 결과로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출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치의 변화 - 물에서 포도주로
유대인들이 물을 쓰는 용도는 발을 씻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물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가치 없는 물의 상태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도덕, 철학을 담은 책으로 분류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임에도 성경을 빗대어 착하게 살아라, 정직하게 살아라, 욕심을 버려라는 등의 말로 훈계하는 모습을 봅니다. 냉정하게 본다면 예수님이 없는 성경은 일개 도덕책이나 명언집에도 못 미치는 그저 평범한 책에 불과 합니다. 집에 성경을 비치하고 있음에도 보지 않는 것은 분명 그 가정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물 속에 있는 물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손님의 발이나 씻기는 평범한 물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 가치 있고,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포도주로 변했듯이, 성경이 비록 평범한 도덕, 철학, 명언집보다 못한 책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을 알고, 보고, 느낄 수만 있다면 생명을 주는, 가치 있는 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람은 심판 받아 멸망당할 평범한 사람에 불과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의 사람은 천하보다 귀해서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 세상은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져감과 같이 우리의 생명이 점점 죽어져 가는 곳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오래 산다해도 80을 넘기면 장수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떨어져 가는 곳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듯 우리의 죽어져 가는 인생 속에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물(말씀)로 포도주(생명)을 만들어 영생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그 가치가 변하듯이 삶의 가치도 분명히 변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10절에 보면 여리고의 삭개오라는 세리장이 나옵니다. 당시 세리는 백성들에게 혈세를 받아 원망을 사고 죄인 취급받았던 자였는데 삭개오는 이들을 대표하는 세리장이었습니다. 그가 여리고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보고자 해서 뽕나무 위로 올라가자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 주셨고, 그의 집에 가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삭개오는 집으로 모셔들여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8절)하고 고백합니다. 전에 그는 불법을 일삼았던 자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재산을 얻을 수 잇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물질에 대한 모든 욕심이 없어졌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신에게 피해를 당한 자에게는 사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분명히 그는 변했습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변하는 것이 가치 있게 변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한 자가 부자로, 무식한 자가 지식 있는 자로, 병든 자가 건강한 자로 변하는 것을 가치 있는 자로의 변화라고 짐작하기 쉽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삭개오의 변화는 전혀 가치 없는 변화입니다. 가치 있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이는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그 가난은 심령의 가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겸손할 줄 알고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욕심은 죄를 죄는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물질만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 떠온 하인들 - 충성스런 사역자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하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터무니 없는 명령을 하고 잇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순종했고, 잔치를 즐기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포도주의 출처를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하인들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사역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미 이 시대에는 사역자들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으로 서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삶을 감시하고, 간섭하고, 길을 제시합니다. 물론 이 일이 순수한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행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 충성스런 사역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들 자신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성도들을 이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와 의는 제쳐두고, 궁전같은 예배당, 많은 회중들, 넉넉한 헌금이 사역자의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충성스런 사역자의 기준은 이러한 것들과는 무관합니다.
첫째로 충성스런 사역자는 순종하는 자입니다.
훌륭한 종의 기준이 충성도에 있듯이 훌륭한 사역자의 기준도 당연히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가에 있습니다. 종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습니다. 타협하는 행위는 곧 주인에 대한 도전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존재하는 각종 의식, 행사, 축제 등은 대부분이 세상과의 타협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과감히 제거하고 명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종의 사명임을 깨닫고 생활해야만 합니다.
둘째로 잔치를 즐겁게 하기 위해 힘쓰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오직 모인 무리들이 기뻐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무리들의 기쁨을 위해 음식을 나르고, 힘겨운 일을 마다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합니다. 종은 절대로 자신의 유익이나 기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있다면 무리들의 기쁨을 보며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성도들이 사역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충성하는 모습을 보면 바뀌어진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물론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은 최상의 모습일수 있지만 자칫 교만으로 인하여 종의 본분을 잃어버린다면 더욱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삶의 유익보다는 다른 이들의 삶의 유익과 기쁨을 주는 일은 사역자의 기본적인 목표입니다.
셋째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본문에서 종들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의 목격자이자 증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의 능력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은 아는 지식으로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면서 많은 이단들이 활동해왔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거짓 복음이 참 복음으로, 참 복음이 거짓 복음으로 오해되고 있을 정도로 거짓 복음의 위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거짓 복음의 출처는 바로 복음의 비밀을 가지지 못한 거짓 전도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으로, 때로는 신비적 체험으로, 혹은 경험으로, 다른 책들로 현혹합니다. 복음 전도자는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 받고 거듭나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분명한 체험과 확신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아직도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분명치 않고, 확실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사역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만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격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좋았다.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는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즙를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후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즙를 두었도다'하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주님의 생명이 세상의 쾌락보다 더욱 큰 기쁨을 가져다 줌을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만큼이나 엄청난 차이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매년 1회씩 제사를 드려야 죄 씻음 받지만 복음은 예수님께서 단번에 씻어 주셨습니다. 율법은 건물 성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이제는 육체 성전인 우리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살인할 수 없도록 만들지만 복음은 우리 안에 미워하는 마음까지도 없애줍니다. 지금 우리는 복음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증거 되고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만 합니다. 바로 말씀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호흡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세상의 욕심들(돈, 명예, 권세, 지식 등)이 사라져 갈 것이고,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언제나 처음보다 나중이 좋습니다. 물론 육신적인 눈으로 좋아지는 것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삶을 진행하는 과정 속에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들이 그들 앞에 있지만 그들은 오히려 더욱 많은 감사와 기쁨, 만족을 느낍니다. 매사에 행복해하고 자신의 일보다는 남의 일을 통해 더욱 큰 기쁨을 누리며, 그들이 장차 머물게 될 천국을 생각하며 웃음이 떠나질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