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하기

조회 수 207 추천 수 0 2024.11.09 14:36:55

세상을 이기는 삶(10) 화해하기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12:58)

 

예수님은 법정에 서는 것 자체를 불손하게 여기시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법과 질서는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법정에 가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먼저 화해를 하고 할 수만 있다면 법정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내용을 보면 금전적인 문제로 법정으로 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돈으로 갚아야만 하는데, 이는 빠른 시간 안에 갚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철저히 돈을 빌린 채권자에게 화해를 해서 어떻게든 옥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가 만일 옥에 갇히게 된다면 갚을 수 있는 기회조차 잃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더욱 많은 고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염두 해 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빚진 자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반드시 화해를 해야만 합니다. 만일 화해하는데 실패하게 된다면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분의 구원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1-5)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6:40-42)

 

티와 들보는 실제로 약간 과장되게 표현한 단어로서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티는 원어로 카르포스인데 이는 조그마한 나무 조각을 말합니다. 그리고 들보는 건물을 짓는데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을 건너지르는 나무로 지붕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눈 속에 들보가 있는 것은 맞지 않지만 그만큼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잘 못된 선생들의 과오를 지적하기 위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과오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때때로 삶을 바르게 인도하고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더욱 많은 사람들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적하여 실족하게 만듭니다. 특히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7:15)고 말씀하시면서 듣는 자들이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느 세대든지 많은 거짓 교리들이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으며,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일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실체가 어떤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율법으로는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물었던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며 고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들 중 누구도 이 여인에 대하여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모두 여인의 곁을 떠났고, 예수님조차도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으며, 다시는 죄를 짓지 말하는 권고를 하시고 여인을 돌려보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정죄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죄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다만 그녀가 다시 돌아가서 죄를 짓지 말도록 권고하셨을 뿐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다른 이들의 죄에 대하여 정죄하려 한다면 그는 이미 예수님의 권위를 뛰어넘은 행위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죄에 대하여 지적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위선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적하는 그들도 실제로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도 죄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만일 누군가를 지적하려거든 먼저 자신이 죄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 안에 들보가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이는 곧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떠한 상처를 주게 될 지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선적이며, 지극히 외식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다루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자리에 있는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언제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또한 상대방을 가르칠 때,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인지, 아니면 치료가 될 수 있는 말인지를 생각하고,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다가서야만 할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18-2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쫓으라”(12:4)는 말씀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화평하고”(3:17)등의 말씀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바로 이 화평함 때문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이기도 합니다(요일4:10). 그런데 바울이 화목하라는 가르침에 조건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할 수 있거든입니다. 이는 우리가 화목하고자 하지만 불가피한 상황도 있을 것임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가령 우리가 화목하고자 하지만 상대방이 화목의 조건으로 우리의 신앙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결코 화목해지기 어려운 조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에 있어서도 상대방이 지속적으로 위협했을 때, 수비적인 자세로는 화평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의 평화는 서로가 군사적인 균형을 이루었을 때 평화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화목할 수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며,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화목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경고합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갚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신명기 32:4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만일 우리가 스스로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침범하는 행위가 될 것임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명히 우리는 억울한 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로부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하여 보복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이 문제에 친히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원수에 대하여 친히 보복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원수에 대하여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할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원수에 대하여 선행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효과는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로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숯불은 상대방에게 대한 과도한 호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설명한다면 원수에 대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호의로 수치심과 번민을 가지게 될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피해를 입은 자가 보복하지 않고 선행을 하는 것은 이처럼 오히려 상대방을 더욱 곤란한 상황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비결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보복하는 삶이 아니라 그들에 대하여 더욱 겸손하고,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않는 것은 그들에 대하여 대적해서 싸워 이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불의에 대하여 저항하고 다투는 것을 봅니다. 시위현장에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에 대하여 욕설을 하기도 하며, 폭력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에 대한 모든 심판을 그분께 맡기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6:37-38)

 

이 짧은 가르침 안에는 비판과 정죄, 그리고 용서와 나눔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생활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에 대한 것들에 대하여 다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가르침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혹은 거듭났더라도 주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걷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판단을 하지 말하고 권면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권한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성경은 주께서 오시기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전4:5)고 권면합니다. 성경이 오직 한 가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 하는 것”(14:13)입니다. 이는 곧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어떠한 것도 판단할 수 없지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고, 또한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유익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매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자세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죄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신분으로는 의로운 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전히 수많은 죄에 유혹 속에서 살아가고, 또한 그 죄로 인하여 넘어지는 자입니다. 즉 그는 여전히 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위선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7:3-5). 이는 판단하려는 자들에 대하여 교훈하시는 말씀이지만 정죄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본래 신분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남의 죄에 대하여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는 용서와 관련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하여 관계없이 죄의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는 죄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와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만 달란트(일 달란트는 현재의 가치로 은으로는 약3억 이상, 금으로는 약50억 이상)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일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 빚진 자를 옥에 가둔 것을 말씀하시면서 용서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18:23-35). 이미 예수님은 용서에 대하여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1:22)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명령입니다.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위해 모든 자들과 화해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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