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더하기

조회 수 208 추천 수 0 2024.11.09 11:32:40

세상을 이기는 삶(7) 사랑 더하기

(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말하는 것을 금전적인 빚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남에게 빚을 얻는 것은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빚을 얻는 것에 대해서 죄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고금리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는 것이나, 빚을 갚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갚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금하고 있을 뿐입니다(22:25-27, 5:1-11, 37:21). 빚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것인데 그것을 죄로 규정하는 것은 잔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빚을 얻는 과정이 게으르거나 투기와 같은 목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죄 받을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성실한 삶을 통해서 금전적이든, 그 외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 빚을 지는 것에 대해서 언제나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유일하게 허용하고 있는 빚은 사랑의 빚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안에 사는 모든 성도들이 이미 지고 있는 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전에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가치에 있어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일시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마다 그 생명의 가치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 까닭에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 것을 말하는데 이는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갚을 수 없는 빚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와 같은 계명을 예로 들면서 이 모든 것들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어느 계명이 크냐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7-40)고 답하신 바가 있습니다. 결국 율법을 종합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하도록 만든 하나님의 규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살인하지 말아야 합니까? 왜 도적질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왜 이웃의 것을 탐하면 안 됩니까? 이런 탐욕과 악한 생각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이웃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왜 안식일을 지킵니까? 이는 단순히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는 차원을 넘어 주인이 종들을 착취하는 일을 멈추고,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안식을 제공함으로 쉼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습니다.

 

결국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는 곧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율법을 포함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악에 대하여 대적한다는 이유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심지어 그들에 대하여 복복, 혹은 심판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태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하여 용서하고, 사랑하며, 비록 손해를 입게 되더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품어주는 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 모든 답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종교와 복음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구원이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있습니다. 종교는 철저히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선한 행위를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완전한 삶을 요구받습니다. 그것이 어떤 자들에게는 매우 합리적이고 쉬운 방법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구원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와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행위로 인한 구원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심으로 사람 스스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2:8). 이러한 구원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있어서도 동일한 기준을 정해 주셨습니다. 사랑 역시 우리, 즉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19~21)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 중에서 베드로를 만나시고 질문을 하신 부분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에 걸쳐서 질문하십니다. 그 때마다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세 번째에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21:15~17).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26:69-75). 그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 앞에서 그 사랑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동일한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역시 주님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지만 그 최종적인 대답은 주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증거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형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로 규정합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이웃들을 외면하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많은 속이는 자들은 이웃과 형제들의 아픔은 뒤로하고 오직 진리를 생각하며, 하나님께만 충성을 하면 그것으로 완전한 삶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6:2)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이웃, 즉 형제들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구합니다. 많은 교회들은 헌금을 거두고, 그것으로 운영하며, 각종 교회 사업에 투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것들이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고, 그들의 삶에 유익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매우 인색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언제나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이웃들을 얼마나 돌보며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1~14)

 

현대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세대에 걸쳐서 평등은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평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차별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평등이라는 말이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된 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세계 어디에도 평등을 위한 법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민족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평등의 사상을 버려야했고, 또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특정한 사람의 대변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만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옳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10: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차별을 둘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했다면 이후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새로운 신분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에 대하여 차별의 시각으로 보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세상에 속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면을 하신 이유는 그것이 결코 지키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미 악한 것들의 지배 아래 놓여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귀들은 수많은 방법들을 통하여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명령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용서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11:2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 따라 주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살게 된다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책망을 듣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명령을 하나 듣게 되는데, 그것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사랑이 없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모두 가식적인 것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사랑이 없는 모든 경건한 행동들은 모든 종교에서 이미 흉내를 내고 잇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함은 바로 그의 내면에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5:2)는 말씀을 기억하고 그 일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삶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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