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여러 형태로 인간의 모습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점차 죽음에 이르는 인간 본질의 모습에 빗대어 문둥병자라고도 하고, 38년 된 병자와 같이 희망 없이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을 기다리는 자로 표현하기도 하며, 구원의 문제에는 관심 없이 표적을 구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디매오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매오도 우리 인생의 모습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바디매오의 아버지였던 디매오도 역시 직업이 거지였습니다. 결국 바디매오는 아버지의 직업을 그대로 물려받아 나면서부터 거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만일 바디매오의 아버지가 좀 더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집안의 사람이었다면 길거리에 나와 구걸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부모를 잘 만난다는 것은 매우 큰 행운입니다. 어떠한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것이 인생의 절반을 좌우한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인생은 성공적인 시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본래 우리의 아버지는 사단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죄인의 후손 즉, 사단의 자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죄인 된 백성을 양자로 삼으시는 일이 없다면 모든 백성은 결단코 하늘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버지의 유전을 그대로 이어받아 살 수 밖에 없듯이 우리의 인생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본래 아버지였던 사단의 유전을 이어받아 죄와 상관하고, 물질, 명예, 권세, 세상 지식을 따라 살며 세상 사람이 제공하는 음식에 의존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온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요일 2:16). 어떤 이는 사람의 마음속에 선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볼 때 선한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롬 3:10).
보통 사람들이 거지를 깨끗하다고 말하는 이가 없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깨끗하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낮아진 마음(겸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단의 종노릇을 접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돌아오십시오.
소경 바디매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바디매오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자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모습조차도 상상으로나 그릴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닥쳐 올 각종 재난에 대해서도 언제나 무방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아름다움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은 그 자체도 불행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몸에 베어있는 습관적인 삶으로 인해 이러한 고통과 아픔을 표현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소경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실상 우리는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만 수많은 재난 앞에서 무방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목표는 있지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지난 시간동안 얻어온 경험과 습관적인 생활을 바탕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실상 세상의 사람들이 근심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 소경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마 24:25, 26). 그들의 대부분은 앞날을 보장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소경 된 눈을 열어 보장된 삶, 안전한 삶으로 인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유일한 해결자이십니다.
거지 바디매오
거지에게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길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아가며 구걸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추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구걸하는 손길에 무엇인가가 주어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것이 거지의 처절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머무는 집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바디매오와 같은 거지와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은 모두 불타서 없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작은 공간도, 앞에 보이는 산과 들도, 자동차도 모두다 사라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보이는 집이 결코 심판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길거리에 앉아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구하는 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가릴 수 있지만 영혼을 지킬 힘이 없는 집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혼이 머물 집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는 이미 영적 거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각종 환난으로부터 구해줄 집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에 지어져야 합니다(고전 3:11). 그 집은 육신으로 볼 수 있는 거룩한 땅에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3:16).
우리 안에서 성령의 전을 지어가고 있지 못한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육신으로 짓는 집(나무, 풀, 짚)은 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오직 성령(금, 은, 보석)으로 짓는 자만이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고전 3;10-15) 부디 영적 거지가 되어 심판 받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르짖는 바디매오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바디매오는 군중들의 웅성거림 소리에 소리를 지르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이 하찮은 소경 거지의 모습에 '잠잠하라'고 꾸짖고 돌아갈 것을 말하지만 오히려 그는 더욱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소리를 지르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 도달하는데 걸림이 되었던 것은 눈도 아니었고 거지라는 신분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군중들이 그를 말렸고, 오히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소리지르는 일마저 하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부르짖었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데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기도한다면 주님은 언제든지 만나주십니다. 이 일에 최대의 방해자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절망적으로 만들며, 결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을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데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 확신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잡아야 합니다(히 3:14). 주님도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무기입니다. 대화 없는 가정이 행복할 수 없듯이 주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살전 5:17). 우리의 삶에 위기가 닥칠 때, 또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앞두고 있을 때 부르짖어야 합니다. 불 신앙을 심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향해 외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겉옷을 버린 바디매오
예수님께서 부르짖는 바디매오를 부르시자 그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당시에 옷은 보석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값진 물건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집이 없는 그를 겉옷이 바로 비바람을 막아주는 집이었고, 가치 있는 것이었으며, 모진 삶과 함께 한 동반자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함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나 요한이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쫓은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입니다(마 4:18-22).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적인 특징들을 예수님께서 버릴 것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것들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기 쉬운 사실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부분입니다. 자기 희생(헌신)은 강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겉옷은 그에게는 소중한 것이었지만 냄새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 옷을 입고 예수님께 갈 수 없다고 생각했고 겉옷을 버려 두고 예수님께 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있는 각종 죄의 모양을 가지고 예수님께 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을 좇았습니다(빌 3:1-9) 육신의 생각과 소욕을 버리고 주님께로 나아가십시오.
눈을 뜨기를 구한 바디매오
군중 사이를 뚫고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온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때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하자,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좇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바디매오의 믿음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어릴 때부터 거지로 생활했던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고 구원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서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여리고라는 지형적인 위치로 볼 때 성경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소경이고 거지였기 때문에 가르쳐 주는 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지나가는 이들의 대화에서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이야기 속에서 각종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도 볼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소망을 가졌고, 부스러기 같은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고, 이는 곧 메시야임을 고백하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했고, 그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현혹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를 좇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골 2:8). 우리를 소경으로 만든 세상 지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소경과 같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생각(정보)을 가지고 구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행 11:1) 마음에 두고(히 10:16,17)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며(빌 2:5) 생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응답 받는 삶의 모양들을 이루어 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