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데 있어서 베드로보다 좋은 모델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평범한 어부였고, 동생 안드레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초대교회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훌륭한 전도자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의 본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쓰임 받기까지 과정이 있었음을 알고 나의 모습과 견주어 생각한다면 성숙한 신앙에 이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쓰임받기 전의 베드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당시 요한의 제자였던 동생 안드레에 의해서 소개를 받게 되면서부터 입니다(요 1:40-42).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음을 통해서 입니다(마 4:20).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태도는 베드로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솔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결단력이 있어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부르심에 응하는 태도로 볼 때 장점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베드로는 쓰임 받기 위해 그의 내면에 가진 모든 것들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가 쓰임받기 전에 드러난 내면의 모습을 통해서 성숙한 신앙에 이르기를 소망하는 나의 모습에 견주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마 26:33, 51-5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당일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있는 목소리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목해서 볼 것은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에 모든 제자들도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마 26:35). 그는 두 번에 걸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부정하고 그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고 많은 물고기를 잡았고, 말씀을 듣고 즉시 따랐던 사실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는 이제 주님께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었지만 섬기는 방법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의해 제자가 되었지만 자신의 방법대로 섬기겠다는 자세와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랜 신앙경력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의지위에 믿음의 집을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환난이 오면 즉시 무너지게 됩니다(마 7:26,27).
둘째로 베드로는 깨어있지 못했습니다(26:36-46)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셨지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41). 그들의 깨어있지 못한 자세는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용납치 않고, 예수님을 잡으러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전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하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고 말씀하십니다.
이상의 말씀은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분명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있으면서도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깨어있는 자였다면 분명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기 까닭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용납이 되질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이 땅의 일들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 땅에 머무는 동안의 일들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각이 이 땅위에 고정되어 있는 자는 결코 쓰실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마26:5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실 때 베드로는 자신감 있고 혈기 많던 모습들은 사라지고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58). 한 소녀가 그에게 다가가 베드로를 향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말에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고, 맹세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했다는 것은 희망이 없이 최후에 쓰는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출세의 도구였습니다. 그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그는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시작점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완전한 절망은 곧 희망의 시작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완전한 절망은 닭 울음소리와 함께 새로운 시작점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자 말없이 감옥에 갇혀(행 12;5) 전혀 저항 없이 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벗어나고, 전에 제자들간에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를 놓고 싸우면서 최고의 자리에 앉기를 소망했던 그가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자리를 야고보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오직 복음 증거만을 하는 겸손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영적 지도자와 일컫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진다면 고소, 고발을 일삼고, 종교 단체의 대표가 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실로 어이없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겸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인 까닭에 율법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일이 바울을 비롯한 이방인 전도자들에 의해 지적되자(갈 2:11-14), 하나님은 성숙한 신앙으로 인도하여 쓰임 받는 도구로 만드시기 위해서 때로는 절망으로 인도하시게 될 것입니다. 고난이 주님과 가까워지는 길이며(사38:17), 고난의 결국이 유익이라(시 119:70,71)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절망적인 상황을 감사함으로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쓰임받은 후의 베드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베드로는 다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닷가로 나섰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고 그물을 던지자 그물은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혔습니다. 주님임을 알아본 제자가 주시라고 말하자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려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숯불이 있는 곳에 생선과 떡을 놓으신 예수님께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시고 조반을 먹은 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서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주셨고, 베드로는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요 21;1-17).
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베드로가 숯불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상황과 동일한 모습에서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40일을 동행하시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10일동안 주의 성령을 기다리던 중 성령이 임하여 베드로는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의 변화된 모습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요?
첫째로 그는 믿음으로 기탄 없이 설교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행 4:8)
한 소녀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져보겠다고 예수님을 부인하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지식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이 죽으신 후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었던 사실을 보아서도 3년 반 동안에 랍비(당시 선생)가 될 만한 실력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많은 회중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그를 더 이상 비겁하거나, 땅의 것을 연연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던 회중들이 이상히 여길 정도로 그는 해박한 지식과 논리로 청중들을 향해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베드로를 완전히 변화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행동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 하는 데 따른 손익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증거 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복음을 전하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에 관계없이 오직 진실된 복음을 안과 밖에서 증거 하는 자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절대 비겁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매우 겸손해졌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율법(특히 할례문제)에 대한 지적을 달게 받는 겸손함을 보입니다. 보통 전도자들이 교회 문제에 관하여는 자신의 논리를 굽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자신이 잘못됨을 알고, 굽힐 수 있다는 것은 그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대부분의 교만은 남의 말을 제대로 들을 줄 모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남의 말을 경청한 줄 알고, 자신의 논리를 굽힐 줄 아는 자세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굽힐 줄 모르던 베드로가 후에 사도 된 당시로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겸손으로 머리를 감싸시기 바랍니다(벧전 5;5).
셋째로 베드로는 편견을 깨뜨렸습니다.
베드로는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환상 중에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먹으라는 음성에 이방인이던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의 가정이 구원받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행 10:1-48). 이방인에게 구원이 없다고 생각한 베드로 최초의 이방인 전도 모습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편견은 매우 심각합니다. 기존의 사고 방식을 버리지 못한다면 더 이상 신앙의 성숙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성경이 아닌 많은 의식과 행사들이 존재합니다. 가령 대제사장이 아닌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고난받았고, 카톨릭교회만이 구원을 해줄 수 있고(거룩한 공회), 죽은 자와 교통(성도의 교통)한다는 카톨릭 교회의 의식 가운데 하나인 사도신경을 교회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고, 태양신(바알)의 축제일(탄생일)인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고(성탄절은 예수님 탄생일과 전혀 무관하다) 이집트 여신인 이스터 여신의 축제일을 부활절로 지내고 있고(계란 먹는 풍습은 이스터 풍습은 이스더 축제에서부터 시작됨),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지 말라(갈 4:10)는 성경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더욱 많이 만들어 지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기준의 가지고 있는 사고를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의 성숙한 신앙을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 교회안으로 들어온, 혹은 내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편견들을 없애고 말씀 안에서 굳게 서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마 7:21).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내 안에 박힌 육신적인 생각들을 없애가야 합니다. 베드로의 편견이 깨뜨려졌을 때 복음이 세계를 뒤덮을 수 있었듯이, 오는 우리의 편견이 깨졌을 때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가 풍성해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