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7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9:13)
죄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바로 본문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표준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모습 속에서 다른 이들은 상종하지도 않았던 자의 죄 문제까지 해결해 주셨고, 당시 가장 악한 자로 평판이 나 있던 세리를 부르심으로 죄인을 사랑하시는 범위가 무한하심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더구나 자신을 신랑이라는 표현을 쓰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신부 되어 한 몸 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와 한 몸을 이루고 계십니다. 더불어 우리의 속에 있는 모든 죄악들은 이미 용서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혈기로 인해 저질러지는 죄에 대해 때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 까닭에 증거 되는 메시지가 힘을 잃어 가기도 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더불어 새로운 기운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세리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 세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운명주의에 빠져 삶의 회의를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것과, 삶의 목표가 크게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뒤돌아보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음은 영적 중풍병자와 세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온전치 못한 지금 우리의 모습들, 무엇엔가 심한 갈증을 느끼며 하루 하루를 소일하는 인생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해결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1.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
(1) 중풍병자의 삶
중풍병자라 함은 반신 불수 혹은 전신마비 증세를 가진 자로서 뇌혈관 마비, 뇌출혈로 인한 뇌성 마비 환자라고도 불리운다. 이 병은 과거로부터 불치의 병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자들은 체념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곧 운명주의에 빠져서 인생을 비관하며, 자포자기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중풍병자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건강한 육신을 가졌다 할지라도 세상을 비관하며, 삶을 포기하고, 반항주의적인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 중풍병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병약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2)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던 중풍병자를 데려 왔던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통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중풍병자의 병은 고쳐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진정한 사랑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짐으로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어느 곳에서든지 반드시 사랑의 실천이 함께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영적 중풍병자들. 그들은 주님 앞에 모시고 나올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오늘 내 속에서부터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서기관의 생각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바로 그분을 향해 신성모독이라고 서기관들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흠을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영적인 교만으로 가득차 있었고, 겸손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직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거룩한체 하려는 외식주의자들, 바로 오늘의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 일 것입니다.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모습을 진단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진리로 새롭게 무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4) 권세자 예수님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보실 때 가장 큰 문제는 육신의 병이 아닌 죄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죄문제는 인생들의 근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권세가 있다함은 바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셨기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신 후에 가르치시길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사역의 목적을 죄 문제에 두셨음을 명시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가? 육신의 안락을 주시는 분인가 아니면 어려울 때 피할 피난처인가? 부패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오직 죄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1) 세리였던 마태
당시의 세리라 함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 관원에게 바치는 직업을 말합니다. 곧 유대인이긴 하지만 로마를 위해 일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기 까닭에 그들은 자기만을 위해 살수밖에 없었고 백성들로부터는 원망과 손가락질을 한몸에 받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태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열심히 일하였지만 역시 소외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진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나를 좇으라"하실 때 즉시 그 뒤를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빗나갔던 그의 인생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서 비로소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세금 장부를 복음서로 바꿀 수 있었던 세리 마태의 모습과 함께 오늘 나의 변화를 위해 진리를 기다리는 자의 모습을 가져야겠습니다.
(2) 예수님의 부르심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검사나 판사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서 남을 정죄하고 멸시했으나 예수님의 모습은 언제나 의사의 눈으로 바라보심으로 진단하시고 치유하시고 계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병인 죄를 없애시기 위해 사랑이라는 약으로 생명을 살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는 예수님에게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죄인 된 자만이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 하셨습니다. 식사는 가장 친한 벗과 함께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일 것입니다. 당시 가장 추악했던 죄인이었던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함께 오늘의 내가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겸손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온전치 못한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면 자포자기 상태로 살아가는 자와 무언가 열심히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으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은 결코 만족을 가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만 가중되어 가듯이, 세리 마태가 자신의 직업에 충실했지만 진리의 갈급함이 더해 갔듯이 모든 인생들은 부족함 투성이 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분 예수께서 우리 곁에 계셔서 친구가 되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음의 그릇을 비우고 진정한 삶의 인도자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죄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바로 본문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표준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모습 속에서 다른 이들은 상종하지도 않았던 자의 죄 문제까지 해결해 주셨고, 당시 가장 악한 자로 평판이 나 있던 세리를 부르심으로 죄인을 사랑하시는 범위가 무한하심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더구나 자신을 신랑이라는 표현을 쓰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신부 되어 한 몸 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와 한 몸을 이루고 계십니다. 더불어 우리의 속에 있는 모든 죄악들은 이미 용서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혈기로 인해 저질러지는 죄에 대해 때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 까닭에 증거 되는 메시지가 힘을 잃어 가기도 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더불어 새로운 기운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세리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 세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운명주의에 빠져 삶의 회의를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것과, 삶의 목표가 크게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뒤돌아보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음은 영적 중풍병자와 세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온전치 못한 지금 우리의 모습들, 무엇엔가 심한 갈증을 느끼며 하루 하루를 소일하는 인생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해결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1.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
(1) 중풍병자의 삶
중풍병자라 함은 반신 불수 혹은 전신마비 증세를 가진 자로서 뇌혈관 마비, 뇌출혈로 인한 뇌성 마비 환자라고도 불리운다. 이 병은 과거로부터 불치의 병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자들은 체념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곧 운명주의에 빠져서 인생을 비관하며, 자포자기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중풍병자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건강한 육신을 가졌다 할지라도 세상을 비관하며, 삶을 포기하고, 반항주의적인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 중풍병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병약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2)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던 중풍병자를 데려 왔던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통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중풍병자의 병은 고쳐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진정한 사랑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짐으로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어느 곳에서든지 반드시 사랑의 실천이 함께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영적 중풍병자들. 그들은 주님 앞에 모시고 나올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오늘 내 속에서부터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서기관의 생각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바로 그분을 향해 신성모독이라고 서기관들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흠을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영적인 교만으로 가득차 있었고, 겸손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직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거룩한체 하려는 외식주의자들, 바로 오늘의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 일 것입니다.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모습을 진단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진리로 새롭게 무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4) 권세자 예수님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보실 때 가장 큰 문제는 육신의 병이 아닌 죄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죄문제는 인생들의 근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권세가 있다함은 바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셨기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신 후에 가르치시길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사역의 목적을 죄 문제에 두셨음을 명시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가? 육신의 안락을 주시는 분인가 아니면 어려울 때 피할 피난처인가? 부패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오직 죄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1) 세리였던 마태
당시의 세리라 함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 관원에게 바치는 직업을 말합니다. 곧 유대인이긴 하지만 로마를 위해 일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기 까닭에 그들은 자기만을 위해 살수밖에 없었고 백성들로부터는 원망과 손가락질을 한몸에 받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태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열심히 일하였지만 역시 소외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진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나를 좇으라"하실 때 즉시 그 뒤를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빗나갔던 그의 인생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서 비로소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세금 장부를 복음서로 바꿀 수 있었던 세리 마태의 모습과 함께 오늘 나의 변화를 위해 진리를 기다리는 자의 모습을 가져야겠습니다.
(2) 예수님의 부르심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검사나 판사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서 남을 정죄하고 멸시했으나 예수님의 모습은 언제나 의사의 눈으로 바라보심으로 진단하시고 치유하시고 계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병인 죄를 없애시기 위해 사랑이라는 약으로 생명을 살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는 예수님에게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죄인 된 자만이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 하셨습니다. 식사는 가장 친한 벗과 함께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일 것입니다. 당시 가장 추악했던 죄인이었던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함께 오늘의 내가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겸손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온전치 못한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면 자포자기 상태로 살아가는 자와 무언가 열심히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으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은 결코 만족을 가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만 가중되어 가듯이, 세리 마태가 자신의 직업에 충실했지만 진리의 갈급함이 더해 갔듯이 모든 인생들은 부족함 투성이 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분 예수께서 우리 곁에 계셔서 친구가 되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음의 그릇을 비우고 진정한 삶의 인도자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