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강해

조회 수 1000 추천 수 0 2022.10.06 06:42:13

인사(1:1~2)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2차전도 여행을 하던 중 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 사람이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마게도니아로 건너간 그는 기도하던 중 루디아를 만났으며,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한 마귀 들린 소녀를 만나 고쳐 주었고, 그 일로 인해서 감옥에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도 찬송과 기도 중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있은 후에 간수가 회개하여 그의 온 가족이 세례(침례)를 받게 되는 놀라운 일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많은 기적과 더불어 좋은 열매가 있었던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더불어 매우 친밀한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장소는 로마의 감옥이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 있는 동안 빌립보 교회는 사람을 보내어 바울을 위로하고 시중을 들게 할 뿐만 아니라 정성스럽게 헌금을 모아 보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 같은 빌립보 교회의 사랑에 대하여 바울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자신의 옥중 생활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라고 말함으로서 빌립보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이 서신이 로마의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죄수의 신분으로 기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감사와 기쁨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빌립보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감사와 간증(1:1-30), 둘째는 복음에 합당한 생각과 생활(2:1~4:9), 그리고 세 번째는 감사(4:10~20)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에는 그들을 향한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권면에는 깊은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까닭에 빌립보서는 누구나 행복한 마음으로 볼 수 잇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바울의 솔직함과 결코 권위적이지 않은 겸손함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고백은 모든 성경 안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주님의 일을 하는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은 언제나 주인의 명령에만 순종을 합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실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가 만일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인의 동의를 얻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자세입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려 할 때는 주님께 기도함으로 간청했습니다. 그가 병 낫기를 기도했지만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라는 말씀을 듣고 오히려 감사를 드리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그들 가운데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 수도 있으며, 병든 몸을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그것이 제 아무리 풍성한 것일지라도 모두 불태워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1:3~6)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성도들과의 사이에서 최고의 교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는 성경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바울의 초기 사역에서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이후에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게 될 때까지 오랜 시간동안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지만 교제는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아름다운 교제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기도 습관은 비록 그의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많은 교회와 사역자들과의 교제를 지속하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교회와 사역자들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1:9,1:16,딤후1:3,1:4). 이것은 바울이 비록 몸이 갇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더욱 왕성한 사역을 할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빌립보 성도들을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뻐하고 간구하는 이유는 복음 안에서 교제하였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교제라 할지라도 복음을 떠난 교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말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즉 그들은 한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가족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서로 맺어주신 관계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하여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서로 다른 관계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은 이 땅에서 뿐만이 아니라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도 여전히 한 가족이 되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교제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주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1:8)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다만 우리의 삶을 지켜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우리를 통해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또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라는 내용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는 것이었는데, 이는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선한 일들이 그리스도인 자신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더불어 한 몸을 이루고, 그 안에서 충성하게 되었을 때, 완성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그분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들을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기도하노라(1:7~11)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몸이 함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진정으로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의 편지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가 내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고, 빌립보는 멀리 떨어져 잇는 장소였지만 그들은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서로가 마음에 두고 기도하는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함께 하는 것은 서로가 마음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이 함께 있더라도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함께 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결박을 당하고 복음을 변호하며 확증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가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이방인들을 위해 자신이 갇힌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1). 실제로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오네시모와 같은 훌륭한 일꾼을 낳았다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1:10). 이처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비록 몸은 매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딤후2:9). 그렇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인 적이 없습니다.

 

이 은혜에 대하여 빌립보 성도들 역시 함께 참여한 자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며 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으로 함께 동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주님을 위한 모든 일들이 사역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일을 하는 자들은 사역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돕고, 협력하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역자라 할지라도 그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돕는 자가 없다면 그의 사역은 열매를 거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역은 결코 혼자 이루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변의 많은 교회들과 더불어 주님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먼저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9)해 지기를 구했습니다. 사랑이 아름답게 결실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올바른 판단력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을 구제나 자비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결과이지 사랑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주님을 바르게 알고 이해하는데서 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바울은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도록 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주님의 교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를 받았더라도 그가 주님의 교회 안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은사들을 사용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성도들은 당연히 그들의 은사들을 교회 안에서 사용함으로서 건강한 그분의 교회를 세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한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10) 이르기를 권면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할 이유들을 보여줍니다. 교회 안이나 밖에서 사람들이 실족을 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경건치 못한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을 함부로 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기도 하며, 때로는 믿음과 관계가 없는 일들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상대방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 있는 상태라면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라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지막 바울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들로 가득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는 단순히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형통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열매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것이 대부분 물질이나, 명예, 권세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인격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성령의 열매를 들 수 있습니다(5:22~26). 그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실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기를 구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주 안에서 경건한 삶을 유지하기를 원하시며, 또한 그 안에서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성경은 그들에 대하여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1:10). 우리의 신실한 삶을 통하여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하고, 또한 그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1:12~18)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의 복음 전도에 관한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 사역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소개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28: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 스스로 그의 서신을 통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2:9)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결박당한 상태에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일들을 이용하여 성실하지 않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방법이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상관없이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스도가 선포된다면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최종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방법과 전하는 자의 마음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비록 전하는 자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떠한 방법이든지 복음이 선포되기만 한다면 그는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교리나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에 대하여 그들의 사역을 부정하려는 자들에게 대하여 말하는 엄중한 경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바울의 마음이 기뻤던 것처럼 주님의 마음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있습니다. 복음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지만 복음 전도자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는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고후11:13)이 있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11:14).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성경이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8)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반드시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만일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도 후에는 이단의 교리에 빠져 결국에는 주님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으로 변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은 맞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2:3) 여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든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겠지만 양육의 과정에서 겉치레만 있고 속으로 교만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결국 열매를 얻을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3:14)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양육의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순결하고 겸손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또한 그 안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고 성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복음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판단과 분별로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행위에 대하여 정죄하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1:19~24)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우리의 믿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10:17)에서 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자는 성령을 통하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역시 오직 믿음을 통하여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3:5)고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믿음에 관하여 듣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이미 그분의 소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고 말합니다. 또한 스스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자였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온전히 드려진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소유된 백성은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기도나 전도, 봉사나 구제와 같은 활동을 통하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경건한 모습을 통하여 거룩한 삶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어디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일꾼이 되기 위하여 가지는 자세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지 않은 헌신은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다만 그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그는 주님께 온전히 드려진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가 소망하고 있었던 것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고 고백합니다. 그는 현재의 상태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23)라고 말합니다. 주님과 같이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4)고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마지막에 이르면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4:6)고 고백하는 모습은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잘 소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소망은 오직 하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땅의 사람들과 더불어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자세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하라(1:25~30)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당부는 그들의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보고 싶어 했으나 이미 로마의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얼굴을 보기는 쉽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도들을 향한 당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의 당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권면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며, 또한 확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의 당부는 매우 단순하지만 강력합니다. 그는 복음에 속한 믿음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함께 싸우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은 사실 그들 안에 있습니다. 각종 분열과 갈등은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싸움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그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고 말합니다. 한 마음으로 전쟁에 임하는 것은 싸움을 하는 자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교회 안에 모인 자들이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마귀는 그러한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의 활동은 바로 그들이 서로 분열이 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마귀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자세를 분명하게 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4:1)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2:2)을 가지고 생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생활 방식을 하늘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하늘에 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3:20). 복음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는 반드시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싸움을 지속하는 동안 많은 고난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14:22)고 말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도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1:5)고 권면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한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보상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5:12).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도 수많은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1:29)고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지속해야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붙드는 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딤전6:12),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딤후4:7). 싸우지 않은 상태에서 승리는 없습니다. 모든 승리의 뒤에는 반드시 많은 준비와 희생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들, 곧 전쟁을 피하려 하는 자들에게 승리의 기쁨은 없습니다. 또한 이 싸움을 위해서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서 스스로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싸움은 사실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유혹을 뒤로하고 복음으로 무장하고, 선한 일들을 위해서 수고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많은 보상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위해서 더욱 많이 수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2:1~4)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드러나는 몇 가지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다른 이들, 즉 이웃들을 위해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가져야 할 몇 가지 의무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주님의 교회 안에서 지켜져야 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는 먼저 기쁨이 있는 삶을 위해서 하나가 될 것을 권면합니다. 그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2)을 가지고 생활할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서로가 한 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성경 안에서는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기형적인 것입니다. 그는 몸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한 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오직 머리로부터 나오는 지시에 따라야만 합니다. 그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소개합니다. 세상 만물이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으며(1:22), 머리이신 그분 아래서 자랄 수 있을 것이고(4:15), 그분으로 말미암아 온 몸이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2:19).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1:18). 바울은 교회와 그분의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살아갈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3) 여기며 생활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2:16)는 말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겸손은 자기보다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자신을 낮출 수 있는 행동을 말합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자신의 성품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안에 겸손함이 없다면 그는 결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걸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4)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15:2)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이웃들을 위해서 살아가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땅이 불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벧후3:7). 그들의 관심은 오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있으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우리의 성숙한 믿음의 모습들은 바로 우리가 이웃들을 향한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인격에 대하여 소개하시면서 당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갖게 된다면 안식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인격은 바로 온유와 겸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인격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격과 더불어서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원했던 마음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이 그리스도인들 또한 희생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행동은 분명히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때마다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는 바로 그 이유를 잘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그분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5:18)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10:33)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고통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짊어지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수모를 당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참으셨던 이유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고 말씀하심으로 이 땅에 오신 분명한 목적을 소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9:12)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친히 모든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고통을 피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약속의 말씀을 이루고 또한 사랑하는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친히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순종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의 누구도 완성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8:3) 정하신 분이십니다. 이 모든 일들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드렸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친히 자신의 아들은 십자가에 희생물로 드리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 희생(순종)희생은 오늘날까지 모든 백성들에게 죄로부터 자유를 안겨 주셨습니다(10:10).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 희생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이 땅을 사는 동안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두렵고 떨림으로(2:9~12)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고 선언합니다. 이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마치 행위가 구원을 완성시켜 주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12)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work out your own salvation)는 말로 번역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행위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라면 행위를 통하여 드러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받은 자답게 행동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간증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던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스스로 결정하신 것입니다(2: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나 땅에서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대언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45:23)고 말했습니다.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14:11). 입술을 통하여 고백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며,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구원의 조건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10:9)고 말합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즉 고백이 없는 믿음은 사실상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복음을 마음으로 믿었을 때 올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앞 서 말한 것과 같이 구원은 행위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입술의 고백과 복음을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이고, 점차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성장의 기본을 요약하여 설명하기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자신은 얼마나 낮추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는가에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더해질수록 주님은 그와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고백들은 성경 안에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백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온전한 순종의 삶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육신적인 배경과 능력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습니다(3:8). 진정한 성숙은 스스로 낮아지는데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과의 관계는 매우 특별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서신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 교제를 지속해 온 관계입니다(1:5). 그는 자신이 있었을 때뿐만 아니라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낼 것을 말하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일할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에는 신중함과 진지함을 포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잠언에서 말하고 있는 지혜와 지식과 명철의 근본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고 그분의 인도 아래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2:13~16)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주님의 일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의 이면에 주님께서 함께 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온 맘을 다해 수고하는 것들에 대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주님의 일들을 행하면서 얻어진 결실들은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13:21)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주님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과 더불어 다양한 방법으로 그분의 사역을 하십니다. 그것이 순종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6)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부요함과 가난함, 그리고 각종 기적과 심지어 연약함까지도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들에 대하여 불평이나 시비가 없이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그의 서신을 통하여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고 권면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오히려 상대방을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4:9)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곧 상대방에게 불만이 있을지라도 오히려 그에게 선대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세상의 빛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될 날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들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사는 동안 행실을 바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통하여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정직하게 살면서 선하게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본이 되는 생활을 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도 있으며, 반대로 부끄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세상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제시함으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힘쓸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이라고 평가합니다. 그의 삶은 비록 비참하게 보였지만 스스로 매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하여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2:2)고 다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4:11)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자신의 삶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함과 동시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고 고백함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비록 세상에서는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을 보낸 자이지만(고후11:23-27), 그는 성공한 복음 전도자이며,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2:19~24)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훌륭한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사역자에게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바울은 사역자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했던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초기 사역에는 노련한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마가의 일로 결국 헤이지기도 했지만 바나바는 그의 사역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주님께 드리고 온전히 주님께 헌신했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4:36,37). 그의 헌신은 바울이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가진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도록 하는데 영향을 주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나바와 헤어진 후 바울은 실라와 더불어 동역합니다. 그는 비록 성경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들이 드물었지만 묵묵히 바울과 더불어 주님의 일을 수행했던 자였습니다. 그가 빌립보 감옥에 함께 갇혔을 때에 바울과 더불어 기도하고 찬송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신실한 사역자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16:25). 그는 언제나 바울의 곁에서 그와 함께 웃고 눈물을 흘리며, 모든 시간들을 함께 했던 자였습니다. 실라는 바울의 사역에 큰 힘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으며, 묵묵히 그와 더불어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썼던 자였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완성시켜 주었던 또 다른 사역자는 디모데였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섬겨 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교회들이 사역자를 필요로 할 때마다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그는 이미 고린도 교회와(고전4:17), 데살로니가 교회에(살전3:2) 파송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에베소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 의해서 심겨진 교회들을 견고하게 성장하는데 쓰임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바울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는 자이며, 또한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목격한 자로서 그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고전16:10)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을 가장 잘 이해했던 자이며, 또한 그와 동일한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역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마음으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면 그들은 결코 동역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다툼만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대하여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22)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자식이자 제자와 같은 자입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충실하게 자신의 소명을 다했습니다.

 

디모데가 이처럼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대하여 철저히 순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대하여 요약된 것이 있다면 고린도 성도들에게 가르친 바와 같이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4)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역자에게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만일 사역자가 탐욕을 부리게 된다면 그는 삯군이요, 또한 도둑질 하는 자입니다. 섬김의 자세는 모든 사역자에게 있어서 매우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디모데는 매우 뛰어난 사역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의 동역자이기도 합니다.

 

 

에바브로디도(2:25~30)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바울과 빌립보 교회 사이에 가교역할을 했던 자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면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4:18)고 말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해 준비된 것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전달하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하여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25)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가 매우 특별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떠났지만 그들의 관계는 지속되고 있었고,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한 일꾼을 보내기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일꾼을 파송하는 일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그를 돕고 서로가 기도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질을 보내는 것으로 모든 사역을 다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왕래함으로서 서로가 동역자, 혹은 협력자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 힘쓰는 모습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병들어 죽게 된 상황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또한 바울도 근심 속에 있었으나 더 이상 근심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건강한 모습을 빌립보 성도들이 보고 안심하기를 바랐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도 근심을 덜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근심이 곧 자신의 근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사역만을 생각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빌립보 성도들들 가족으로 생각했던 자였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슬픔은 곧 자신의 슬픔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30)고 말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섬김만으로 바울의 사역을 돕는 것이 충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러한 부족함을 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사역을 도왔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에 감동하였고, 그가 충분히 존귀함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마음으로 사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사역을 하면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라고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온 힘을 다해, 즉 목숨을 다해 주님의 일을 위해 수고하는 마음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그것은 헌신된 자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자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또한 이 세상의 일들에 취해 있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일들을 생각지 않고, 온 맘과 목숨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수고하는 자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곧 할례파라(3:1~3)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4:4,살전5:16). 그가 이처럼 기뻐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기회를 틈타고 있으며, 육신마저도 정욕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기쁨이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육신적인 기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은 오히려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데서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것처럼 수많은 위험과 고통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비록 세상에서는 매우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히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칭찬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교회 안에서 조심해야 할 자들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먼저는 개들을 조심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개는 성경 안에서도 매우 사악한 존재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56:11)라는 말로서 개를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22:15)들과 함께 개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개들의 또 다른 속성은 서로가 물고 삼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특성을 알아서 경고하기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5:15)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상대방을 험담하고, 상처를 입히는 일에 대하여 아무런 가책도 없이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들은 개와 같은 자들로 언제나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행악하는 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지도자의 모습으로 성도들에게 말하지만 그들은 악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일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성도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도 성도들에게 짐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조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이후에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자랑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사람들을 종으로 삼거나 삼키거나 빼앗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고후11:13)고 경고함으로서 그들에 대하여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악한 일꾼은 결국 성도들의 것을 도둑질 하는 자입니다. 선한 일군은 오직 그들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자들임을 기억하십시오(10:11).

 

조심할 대상에 대하여 몸을 상해하는 자를 소개하는데, 이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양의 것을 도둑질 하는 자와 같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헌신할 것을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을 손해 보지 않으려 합니다. 오히려 성도들의 것을 강탈하고, 자신은 안전한 생활을 누립니다. 신실한 지도자라면 성도들에게 아픔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상처를 입었을 때에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안전한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 선한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을 상해하는 악한 지도자들은 언제나 조심해야 할 대상입니다.

 

바울은 진정한 할례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할례의 의미는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증표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할례의 문제를 두고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논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할례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할례자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은 이미 마음의 할례에 대하여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2:29). 진정한 할례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마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성령 안에서 지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5:25). 오직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하고(4:23), 자신을 거룩한 믿음 위에 세워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며(1:20),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3:4~9)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자입니다. 실제로 그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하는 모든 것들은 자랑할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전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이 자랑할만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랑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고후11:18)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고후11:22~23)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그가 당한 고난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후로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23:6,26:5).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정통 유대인, 즉 순수한 혈통의 히브리인임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11:1,고후11:22). 이러한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분히 자랑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이며, 이 도시에서 당시 가장 존경할만한 선생이었던 가말리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서 가문과 지식에 있어서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22:3).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신이 교회를 파괴하고 사람을 죽이며, 남녀를 결박하여 감옥에 넘겨주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8:3,22:4)

 

이처럼 바울이 자랑할 것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dung)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결코 쉽지 않은 결심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더욱 소중한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것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자신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고 말합니다. 즉 그는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가졌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의 의에 참여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3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전히 자신 안에서 세상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살아가려 한다면 그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얻어지는 권력이 자신을 좀 더 품위 있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독과도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일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나 다윗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오히려 철저히 자신을 비워 주님께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자아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9:25)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가 올 세상을 준비하고, 영생을 보장받고 사는 자들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며, 또한 그것이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그분을 아는 자식에서 자라야만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그 까닭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기를 소망했고, 또한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를 위해서 바울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3:10~12)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것은 곧 복음으로 설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규례가운데 세례(침례)는 바로 이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간증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자신이 먼저 그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일치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신앙의 고백이 바로 그분의 죽으심 가운데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들어 온 자만이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은 자만이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능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1:4). 만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건이 없었다면 그분은 비록 하나님이셨지만 죄 가운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은 오직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5)고 말합니다. 주님의 희생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졌을 때 우리 또한 부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주님의 보혈을 믿고 고백을 하게 되었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그분의 죽으심 아래 있다는 것은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라고 말합니다. 또한 베드로 역시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고 말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싸움은 이 땅을 사는 동안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12)고 말합니다. 또한 생명을 취하기 위해서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딤전6:19)를 쌓을 것을 권면합니다.

 

사람들은 힘겨운 인생 속에서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멈추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사는 동안 마귀는 이 싸움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키기 위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은 결코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기뻐하였고, 또한 장차 받을 상을 생각하면서 행복해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의 시간들이 놀라운 영광으로 변하게 될 것을 소망하면서 풍성한 삶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6)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 성장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장은 몸에 관한 것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몸보다는 정신적인 성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성장은 점차 자라서 나중에는 쇠퇴하게 되지만 마음의 성장은 육신이 죽을 때까지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교육을 받고, 수많은 경험들을 통한 지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만큼 마음이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도 성장을 지속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62)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을 뒤로 돌이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한 목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6:1~2)나아가는데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자들이 기초적인 학문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더 나은 지식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은 더욱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졌던 과거의 모든 영광을 잊기 위해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으며, 죽은 자의 부활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그 결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주어질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주어질 영광보다 장차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상에 관심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 상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푯대를 향해 밀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상을 얻는 자가 아무런 노력이나 목표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9:24)고 말했습니다. 상은 결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가운데 가장 위로가 되면서도 위험한 것이 바로 구원의 안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과, 심지어 범죄의 유혹 속에서 넘어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들어 줌으로서 보다 안정적인 믿음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이 구원이 안전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장하려 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살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상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경기를 하는 운동선수에게 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경쟁해야 하고, 그 싸움에서 이기는 최종 승자만이 최고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땀들과, 심지어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 가운데 가장 큰 목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이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경건한 삶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물론 그것은 열심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며, 자신이 듣거나 보는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인지를 언제나 분별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7:17). 푯대를 향해 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앞에 놓여진 수많은 장애들을 뿌리치고 밀치며, 지치지 않고 나아가게 된다면 놀라운 영광의 날들이 자신 앞에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3: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같은 권면을 합니다(고전4:16). 바울 뿐만이 아니라 베드로 역시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는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3)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말로만 가르쳤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 먼저 본을 보이며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자신들이 보여준 본보기를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을 주목하여 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고후11:13)입니다. 바울이 각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20:31)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짓 진리에 대하여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8:5)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 가운데 사는 자들이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육신에 속한 자들에 대하여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6:18)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스스로 속이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교회 안에 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를 두고 믿는 자들을 파괴시키려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활동이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면서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악한 모습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벧후2:3)고 말합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의 편에서 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도들을 자신의 탐욕거리로 생각하여 배를 불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며, 주님 앞에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 방식, 즉 시민권이 하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믿는 자들은 세상의 일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3:2)고 권면합니다. 또한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2:19)고 말합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늘에 소망을 두고, 성도들과 더불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4:1~3)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사도 바울의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사랑은 매우 극진합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지방(마게도냐)으로 넘어오면서 첫 번째 세운 교회이며, 또한 그 관계를 그가 죽을때까지 지속했던 특별한 교회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가 매우 훌륭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 사이에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비록 여인의 몸이었지만 교회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권면을 살펴보면 그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 이 두 여인으로 하여금 주 안에서 같은 생각을 품게하는데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두 여인의 사이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빌립보교회의 초기 사역부터 매우 중요한 일을 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 여인들에 대하여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머문 기간이 길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여인들은 거의 초기부터 바울이 서신을 쓸 때까지 지속적으로 헌신했던 여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은 대부분 지도자들에 의해서 발생됩니다. 초신자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덮어 주고 감싸주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성숙하고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을 때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교회의 초기부터 함께 해왔고, 많은 수고를 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분열하게 된 동기가 교리적인 문제였는지, 아니면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 다투는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서로 분열하고 있는 상황만으로도 빌립보 교회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기쁨을 되찾고 평화로워지기 위해서 그녀들은 반드시 화해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로부터 그녀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을 위해 수고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를 위할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교회 안에서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 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의 분쟁이 비록 그들을 지옥으로 던져 넣은 일은 없을지라도 그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될 때에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지도자는 언제나 서로에 대하여 존중하고, 축복할 수 있는 마음으로 대해야만 합니다.

 

바울의 권면에서 매우 특별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 편지를 수신한 자에게 두 여인, 즉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울 것을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비록 두 여인이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녀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녀들을 도와 교회가 하나 된 모습으로 피차 헌신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도록 권면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10:20). 그것은 곧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 즉 한 가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서로가 미워할 이유가 없는 자들이기도 하며, 또한 한 몸을 이루어서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언제나 한 몸을 이루기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살전5:16-18).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면서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토록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의 상황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결코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조차도 로마의 감옥 안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 역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바울은 거듭해서 기뻐하도록 권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이 절제하는 삶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절제는 죄에 대하여 참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도록 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수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구했고,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또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도 인내하고 너희 마음을 굳건히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우니라”(5:8)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죄에 대하여 참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곧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기도에 대한 권면을 하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 것을 말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염려 없이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님께서도 믿는 모든 자에게 먼저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대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권면하시기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6:25)고 말씀 하시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염려 속에서는 그 가치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염려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았을 때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이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대화가 없는 상태에서 그분의 뜻을 알 수는 없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반드시 기도 생활을 필요로 하며, 그 속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3:18)에 대하여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모든 이해와 지식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을 뛰어 넘는 능력이 그들 안에서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그러한 자세들에 대하여 성경은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16:3)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26:3)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3:15)고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내려놓고 오직 그분만 신뢰하고 굳게 붙드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게 된다면 우리는 또 다시 죄의 사람이 되어 재앙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오직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4:8~9)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생각해야 할 것들을 소개합니다. 이것들은 교리적인 가르침이나 진리의 내용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마음의 자세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은 곧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신실하게 살아가기도 하며, 때로는 마귀의 종노릇을 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그 안에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말함으로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나열하면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기준에 해당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5:13-16).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이 결코 교회 안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주님으로부터 와야 하는 것이며, 또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것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가르침에 대하여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살피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아픔이 되게 한다면 그 행동은 잘 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을 씻길 때 제자들은 차라리 그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습니다(26:6-13).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제자들의 생각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여자를 칭찬하셨고, 그녀의 이름이 복음이 선포되는 모든 곳에서 기념하여 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최고의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같지 않습니다. 그 까닭에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필요가 있으며, 기도를 통하여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곰곰이 생각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단순히 말이나 글로서 가르쳐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미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3:17)고 가르친 바가 있습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다른 이들로 하여금 본이 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책상 앞에서 지식으로 전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임으로서 따르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질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4:10~13)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을 돌보는 일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매우 기뻐하고 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가 기뻐하는 이유가 단순히 자신을 물질적으로 돕고 있기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누구에게나 신세를 지는 일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자신이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후11:9)고 말합니다. 바울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일에 대하여 동역하는 마음을 회복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의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기를 띠게 된 사실을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역을 감당하는 가운데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만족은 곧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믿는 자들에 대하여 모든 은혜를 넉넉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넉넉하게 하신 것은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고 말씀합니다. 특히 주님의 일을 맡은 자들에 대하여 권면하기를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바울은 만족에 대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8)고 권면하였습니다. 이 만족과 관련하여 성경은 분명한 약속을 해 주었는데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5)고 말합니다. 이는 곧 만족하는 자에게는 모든 일들이 그분의 뜻 안에서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는 결코 평탄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7)고 고백한 것처럼 매우 험난한 인생을 살다 간 자입니다. 그 속에서 만족하며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토록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그 속성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부자가 되거나 명예와 권세를 얻게 될지라도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까닭에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에 바탕을 둔 목표를 따라 끊임없이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결코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평가할 때에 만족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노력을 한다고 부자가 되거나 명예와 권세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알고, 또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3:16)라고 바랐던 것처럼 자신의 속사람을 살펴야 할 것이며,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되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라고 고백한 바울의 모습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주님의 일들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감당했을 때 행복해 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모든 일들을 해 낼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를 힘쓰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4:14~20)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관계는 단순히 교제의 차원을 넘어서 바울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돕고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 안에서 이 서신을 쓰는 상황에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빌립보 성도들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앞서 그들이 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1:7)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교제는 마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임을 바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돕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돕는 자들이 빌립보 교회 외에는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이미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빌립보 성도들이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후11:9)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바로 빌립보 성도들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교회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성도들이 실족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역자들의 생활비를 공급하거나 사역자들이 넉넉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사역을 보다 효과적이고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의 사역을 이해한다면 일단 사역자가 그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넉넉하거나 안정된 생활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하였고, 또한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빌립보 성도들로부터 보내 온 것들을 무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이 공급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울을 매우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주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행복보다는 빌립보 성도들이 드렸던 것들이 주님의 회계 장부에 남아 그들에게 넘치는 열매가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선물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마음을 기쁘게 만든 것 뿐 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을 위해 공급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것을 말하면서 그들의 모든 필요들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나눔은 매우 가치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13:16)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들을 나누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돕는 자나 받는 자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풍성한 생애를 누릴 수 있기를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문안과 인사(4:21~23)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일반적인 편지가 문안과 인사를 앞에 두는 것과는 달리 바울의 서신에서는 주로 뒤에 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문안과 인사 안에는 축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축복으로 시작하면 기분을 좋을 수 있겠지만 권면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들을 바르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철저히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성도들에게 말함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함으로서 자신이 권면했던 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온 것임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의 문안과 인사는 이러한 지혜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도록 말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특별한 위치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대하여 문안하는 것은 그들에게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안이 바울 한 사람이 아닌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 즉 로마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가장 극심한 핍박을 당하고 있었던 자들이 바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당시 황제가 네로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이 얼마나 험난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좋은 환경에 있는 자가 열악한 사정에 놓은 사람을 위해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욱 좋지 않은 환경에 놓인 자가 비교적 무난한 환경에 놓인 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축복할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명령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8)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2:14)고 권면합니다. 축복하는 것은 단순히 가르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문안 인사를 통해서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황제의 집안사람들과 그 측근들을 전도하고 그들이 또한 같은 성도의 자격으로 문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는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감옥 안에 있지만 어떠한 경로에서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결과들은 심지어 황제의 가족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한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일반적인 성도들은 환경이 어려우면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모습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위기에 있어도 복음을 전했던 스데반이나 바울처럼 장소나 환경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과 함께 성도들을 축복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은혜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성도들을 축복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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