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서로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듣는 자들에게 오히려 나쁜 영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듣는 이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내용을 회중들에게 전하기 전에 충분한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의 설교는 풍부한 사회적인 지식들을 요구합니다. 근본주의적인 교리에 기초해서 설교를 하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오직 성경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회중들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설교자라면 현대인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2000년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매우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상황과 전혀 동떨어진 설교는 회중들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회중들에게 보다 구체적인 말씀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의 전달만으로 설교를 마무리한다면 그들은 머릿속에서 아는 것으로 끝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원하는 것은 변화된 삶, 그리고 신실한 삶입니다.
현대인들은 점차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은 점차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윤리는 점차 실종되어가고 음란한 사회로의 진입은 그 속도를 빠르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화, 섹스, 스포츠에 열광을 하고 점차 부패된 삶에 자신을 맡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쾌락에 있으며, 결국에는 그것으로 인하여 파멸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2000년 전에 기록된 것을 들려주는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매순간 기적을 바라는 설교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당연히 그 시대상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타락된 문화가 성경에서 어떻게 조명이 되고 있는지를 찾아내고 회중들을 향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돈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왜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하며, 자녀를 바르게 양육해야 하는지, 이 사회에서 유혹하는 것들에 대하여 절제해 나가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가 구체적이지 못하면 회중들의 삶도 당연히 우유부단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설교자들을 크게 좌절시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들의 삶에서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회중들이 설교를 듣고 일어설 때에는 매우 소망적인 마음을 품고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회중들이 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보다 능력있는 삶을 살이 원하고, 지치고 힘든 순간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 생활하기를 원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회중들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설교자들이 대부분 책상 앞에 앉아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과는 다르게 회중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땀을 흘리고, 피곤한 삶을 경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이 절망적인 이야기만을 들려주게 된다면 그들은 지쳐서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교자들은 지친 회중들을 일으켜줄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 까닭에 그들을 더욱 알아가고, 희망을 주며, 언제나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책망할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조용하게 개인적으로 만나서 훈계하고, 훈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을 향한 애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으며, 설교자로서 회중들 앞에 섰을 때에는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설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입에서 절망적인 말이 흘러나갈 때, 회중들은 절망하며, 내 입에서 소망의 소리가 나갈 때, 회중들이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