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왕이 사울의 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모든 것을 내가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열매를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먹을 음식이 있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빵을 먹으리라, 하니라. 이제 시바에게는 아들 열다섯 명이 있었고 또 종 스무 명이 있었더라. 그때에 시바가 왕께 이르되, 내 주 왕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대로 주의 종이 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에 관하여는 왕이 이르기를, 그가 왕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처럼 내 상에서 먹으리라, 하였더라. 므비보셋에게 젊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거하던 모든 자가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이처럼 므비보셋이 계속해서 왕의 상에서 먹었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었더라(사무엘하9:9-13).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성경의 인물을 대표할 만한 우정을 보였던 관계였습니다. 비록 요나단이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과는 결코 좋지 못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윗의 편에 서서 그를 보호하였습니다. 또한 나이가 많은 연장자였지만 언제나 동등한 입장에서 진정한 친구의 관계를 가졌던 자였습니다. 비록 그 우정의 관계가 결코 길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통하여 보여준 모습을 통하여 그 우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 므비보셋의 이름은 “바알의 영웅”이라는 의미를 가진 므립바알이었습니다(대상8:34). 그러나 후에 다시 “부끄러움을 해치는 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므비보셋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습니다. 아마도 바알 신에 대한 반감이 이름을 바꾼 계가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므비보셋이라는 인물은 어찌보면 비운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왕족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였던 사울을 비롯하여 아버지 요나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족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졸지에 고아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의 형제들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게 되었을 때, 그의 유모가 므비보셋을 데리고 도망하다가 떨어뜨려 그의 두 발을 다 절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였던 사울과 아버지였던 요나단과 같이 전쟁에 나설 수도 없는 존재였으며,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를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왕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시 누군가의 보복을 피해 요르단강 동쪽 로드발의 마길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이 되어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죄인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 때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어진 아담이 그 죄로 인하여 두려워서 하나님과 천사들의 눈을 피해 도망하고,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는 영문도 모른 채 죄인이 되어 절망적인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그의 옛 친구였던 요나단을 기억하여 그의 가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였고, 사울의 모든 재산을 찾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우시이 사울의 후손을 해치려는 복수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요나단과의 약속을 생각하여 그 혈통을 도우려는 의도에서 므비보셋을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는 므비보셋을 위해 과거 그의 집안의 시종으로 있었던 시바에게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의 선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자신의 식탁에 므비보셋을 앉혀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삼하9:1-13). 그것은 곧 므비보셋을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가 왕족으로서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피해 다닐 이유도 없으며, 오히려 왕의 후손으로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게 된 순간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과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녀였고, 지옥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언제나 두려움 속에서 희망 없는 인생을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후에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사건이 므비보셋에게 일어납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피신하게 되는 일이 발생되었을 때, 므비보셋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삼하19:26). 이 때 시바는 다윗에게 다가가서 그를 모함합니다. 그는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집이 오늘 내 아버지의 왕국을 내게로 되돌리리라”(삼하16:3)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의 말을 믿고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건네줍니다.
후에 다윗이 다시 돌아왔을 때 므비보셋은 수염도 깍지 아니하고, 옷도 빨지 않고 왕 앞에 나갑니다. 왕이 므비보셋에게 자신과 같이 가지 않았던 이유를 묻자 그는 다리를 절어 종의 도움을 얻어 나귀를 타고 왕에게 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종이었던 시바는 자신을 속이고 왕에게 자신을 모함했노라고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이후에 왕은 종인 시바의 재산을 다시 므비보셋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지만 므비보셋은 거절을 합니다. 오히려 종이었던 시바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가지도록 말합니다(삼하19:1-30). 이것은 성경에게 므비보셋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때는 므비보셋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시험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귀는 여전히 그들을 유혹하고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매우 억울하기도 하고,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로 되는 것은 진실함으로 주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된다면 주님은 모든 것을 받아주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 있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을 아무런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였던 요나단과의 약속과 공로로 인하여 은혜를 입게 된 것 같이 우리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의 자리에서 함께 권세를 가진 자라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므비보셋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신에게 다시 주어지게 될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오직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하게 된 사실만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다윗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으며,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다윗으로부터의 자신이 잊혀지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눈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해 있어야만 합니다. 재물과 명예, 권세와 같은 것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그는 매우 위험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일에 힘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직 하늘을 소망 삼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광스러운 생애를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