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소문이 요압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돌이켜서 압살롬을 따르지는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따랐기 때문이더라. 그가 {주}의 성막으로 도망하여 제단의 뿔들을 잡으니라. 어떤 이가 솔로몬 왕에게 고하되 요압이 {주}의 성막으로 도망하였는데, 보소서, 그가 제단 옆에 있나이다 하므로 이에 솔로몬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며 이르되, 너는 가서 그를 덮치라, 하니라. 브나야가 {주}의 성막에 이르러 그에게 이르되, 왕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오라, 하시느니라, 하매 그가 이르되, 아니라. 오직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하니 브나야가 왕에게 보고하여 이르되, 요압이 이같이 말하고 내게 이같이 대답하더이다, 하매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말한 대로 하여 그를 덮치고 그를 묻을지니 이것은 네가 요압이 흘린 무죄한 피를 나와 내 아버지 집에서 제거하게 하려 함이라. {주}께서 그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니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사람 둘을 덮쳐서 그들 곧 이스라엘의 군대 대장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의 군대 대장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느니라. 그 일을 내 아버지 다윗은 알지 못하였나니 그러므로 그들의 피는 영원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씨의 머리로 되돌아갈 터이나 다윗과 그의 씨와 그의 집과 그의 왕좌에는 {주}로부터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하니라.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올라가 그를 덮쳐서 그를 죽이매 그가 광야에 있던 자기 집에 묻히니라. (왕상2:28~34)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을 말하라고 한다면 단연 요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압은 비록 다윗의 인생 초반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가 왕이 되어 통치하는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자입니다. 그는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로서 아비새와 아사헬의 형이기도 합니다(삼하2:13). 그의 이름은 “주(여호와)는 아버지 되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군대 장관이 된 것은 다윗이 왕이 되고 영토 확장을 위해 여부스족과의 싸움이 있게 되면서 “여부스 족속을 치는 자는 우두머리와 대장이 되리라”는 다윗의 약속이 있은 후 요압이 먼저 올라가 여부스 족을 침으로서 우두머리, 즉 군대 장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대상11:6).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이후로도 많은 전쟁에서 승전보를 울렸고,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의 인생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쟁의 위험과 모험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그가 왕으로 재임해 있는 동안에는 영토의 확장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었으며,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자가 바로 요압이었습니다. 다윗은 요압과 더불어 수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업적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다윗에게 있어서 충성스러운 군대 장관이었지만, 그가 행한 일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다윗에게 대적했었던 아브넬이 다윗에게 돌아와 충성을 다짐했을 때, 요압은 그를 조용히 불러 성문 곁으로 데려가서 죽입니다(삼하3:27). 그 이유는 아브넬이 자기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받아들였지만 정작 요압은 그를 원수로 생각하여 왕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조용히 죽였던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 왕에게 충성스러운 군대 장관으로 행세를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왕의 마음을 보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원수를 갚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처럼 많은 문제들은 존재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따라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고 행동합니다. 요압이 사람들에게는 매우 뛰어난 군대 장관이었지만 다윗 왕에게는 언제나 위험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 앞에서는 매우 뛰어난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분명히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훌륭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줄도 알았으며, 그의 몸은 경건한 삶이 체질화 되었을 정도로 흠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겉 모습과는 달리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요압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내면은 더러운 생각들로 가득 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성경은 외식하는 자, 혹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죽은 아브넬을 위하여 백성들과 함께 장례를 치룹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있습니다(삼하3:31). 백성들은 처음에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오해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장례를 통하여 자신이 결코 아브넬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다윗이 요압에 대하여 “스루야의 아들들이 내게 너무 강하니 {주}께서 악을 행한 자에게 그의 사악함대로 갚으실지로다”(삼하3:39)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요압은 그 세력이 너무 커져서 다윗조차도 그를 감당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압은 이미 다윗에게 있어서 너무 큰 존재감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요압은 언제나 다윗의 편에 있으면서 다윗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그를 도우려 합니다. 요압이 비록 반역을 행하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엄청난 권력으로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인생에서 그는 또 한 사람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은 그의 형 암논을 죽이고 도망해 있을 때,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오도록 했습니다(삼하14:1~3). 이일은 요압의 순수한 마음으로 다윗을 위로하기 위해서 했던 일이었지만 결국에는 압살롬이 반역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다윗이 왕궁을 피해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요압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은 데려 온 장본인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왕권을 잡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이루어놓은 모든 권세들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다윗의 편이 되어서 압살롬의 군대와 대적하게 됩니다. 전쟁의 경험이 많았던 요압은 결국 전쟁을 승리하게 되고 다윗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요압의 자세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압살롬을 사랑하였고, 그가 죽지 않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다윗의 군사들에게도 압살롬을 죽이지 말 것을 당부하였지만 요압은 친히 달려가 압살롬을 죽입니다. 이는 압살롬이 다윗과 백성들 앞에서 행한 악한 일들에 대한 심판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요압은 자신의 신의를 배신한 사람이라는 감정으로 죽였던 측면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살고 있었던 자입니다.
이 후에 다윗은 잠시 동안이지만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치기 위하여 요압을 대신하여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삼습니다. 이는 어찌보면 요압의 권세를 향한 욕망이 좌절되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의 시대가 끝났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요압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이 사실을 매우 분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세바를 치는 일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비새와 함께 가서 아마사를 죽입니다(삼하20:9~11). 이 일후에 그는 다시 이스라엘의 온 군대를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삼하20:23). 그는 평생을 살면서 권세의 끈을 놓지 않는 집요함을 보입니다.
이러한 그의 욕망은 다윗의 시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그는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자를 자신의 힘으로 세우려 합니다. 그는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려했고 결국 그와 더불어 반역하게 되면서 솔로몬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미 다윗은 솔로몬에게 요압을 반드시 죽일 것을 명령한 바가 있었습니다. 죽을 명분을 찾던 중 마침 반역이 있게되자 솔로몬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어 요압을 죽였습니다(왕상2:28~34). 그의 인생은 이처럼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요압의 인생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세상을 파란만장하게 살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가 때로는 신실하게, 충성스럽게 산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었음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매우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은 결코 행복하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공한 것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갔지만 결국에는 실패한 인생으로 결론지어집니다. 오늘 우리 삶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다 진실한 마음으로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인생을 설계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