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왕상16:29~33)

조회 수 3295 추천 수 0 2010.06.07 15:41:58

유다 왕 아사의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자기 이전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더라.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 가운데서 걷는 것을 가벼운 일로 여기고 시돈 사람들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으며 또 가서 바알을 섬겨 그에게 경배하고 자기가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집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세우며 또 작은 숲을 만들었으니 아합이 자기 이전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분노를 더 많이 일으켰더라. (왕상16:29~33)

아합은 북이스라엘 왕조의 역사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유독 악한 왕으로 보였던 이유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엘리야와 대적했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므리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7대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다른 왕들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다르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돈 사람들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으면서 그의 삶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세벨을 아내로 맞게 되면서 그는 북이스라엘 왕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여로보암의 죄들을 그대로 답습하며 바알을 섬기고 자신이 건축한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집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세우고 작은 숲을 만들면서 이전에 있었던 모든 왕들보다 더욱 더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이 심었던 우상숭배의 씨가 열매를 맺게 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겨자씨의 비유나, 누룩의 비유를 통하여 매우 작은 것이 심겨지거나 뿌려지지만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것들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심코 지나지만 그것들이 결국에는 모든 것들을 변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처음에 솔로몬의 여인들이 우상을 가져오고, 여로보암은 남북으로 우상을 세워놓는 것으로 끝날줄만 알았던 우상숭배가 아합시대에 와서는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는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버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 안에서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인생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아합의 악행에 대하여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든다면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대적하는 장면을 들 수 있겠지만, 아합의 당시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야말로 그의 악행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라고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들을 왕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 금하셨다는 이유에서입니다(왕상21:3).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합은 고민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포도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집착을 눈치 챈 아내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한 계책을 세웁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왕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나봇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합은 서명을 하고 그의 도시의 장로들과 귀족들이 이세벨의 계략대로 실행하여 나봇을 죽입니다(왕상21:11-12). 아합은 처음에 나봇을 죽일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탐심과 집착은 결국 나봇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 놓습니다.

본래 탐심이라는 것은 크게 죄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결국에는 살인을 불러오기까지 합니다(시39:6,출23:8).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분수에 맞도록 물질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 이상의 것들에 대하여 욕심을 가집니다. 그것은 결국 과욕을 부리고 범죄에 이르기까지 하는 것을 봅니다. 탐심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범죄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욕심들을 버려야만 하겠습니다.

탐심과 더불어 아합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은 집착입니다. 그는 이미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실망을 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분배하신 것으로 나봇의 집안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여전히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집착이 이세벨의 개입을 불러왔고, 살인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일에 집착한다는 것 역시 분별력을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대개 상대방에게 고집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서로가 대적하는 결과를 낳게 만들 것입니다. 물론 고집스러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바른 진리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고집스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근거한 집착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때때로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근거없는 집착들을 버리고 자신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합은 이 나봇의 사건으로 인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는 엘리야의 예언을 듣게 됩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그의 몸의 피를 핥게 되리라는 것과 이세벨 역시 개들이 예스르엘 성벽 옆에서 그녀를 먹게 되리라고 예언합니다. 물론 그의 후손도 끊어지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왕상21:19-23). 죄의 결과는 매우 참혹합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고(왕하9:30-37), 이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합의 전 생애를 파멸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건 하나는 아합이 엘리야의 예언의 말씀을 들은 후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몸에 두르며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눕고는 천천히 갔다는 것입니다(왕상21:27).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주님으로부터 겸손함을 인정받았고, 그의 시대에는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시대에 재앙이 있게 되면서 그의 왕조는 완전히 끝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전히 인자하신 주님의 모습을 목격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멸망하시기 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리시는데 목적을 두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도 동일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벧후3:9). 주님은 징계와 심판의 하나님으로 인식되어지기 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불려지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신실한 가정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합의 인생은 결국 이세벨이라는 여인을 만나면서부터 완전히 파멸되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을 얻는 것은 매우 보배로운 것입니다(잠12:4,31:10). 그러나 잘 못된 만남으로 인하여 불경건한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 결과는 매우 비참한 것입니다. 신실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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