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이 떨면서 말할 때에는 이스라엘에서 자기를 높였거니와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할 때에는 죽었느니라. 이제 그들이 더욱더 죄를 범하여 자기들의 은으로 자기들을 위하여 형상들을 부어 만들되 자기들이 깨달은 대로 우상들을 만들었으니 이 모든 것은 장인들이 만든 것이라. 사람들이 그것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희생물을 드리는 자들은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고 사라지는 새벽 이슬 같으며 타작마당에서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겨 같고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주 네 하나님이니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말지니 이는 나 외에 구원자가 없기 때문이니라』(호세아13:1-4)
우리는 가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어린 아이일수록 자신의 자리를 알고 더욱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가령 예를 들면 아이들은 그들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필요하면 엄마에게 다가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 비싼 장난감이 필요하면 아빠에게 달려가 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상황은 매우 달라집니다. 그들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를 모른 채 서 있습니다. 그리고는 망설임을 거듭하다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하지만 그들은 돕는 채 하고는 곧 상처만을 남기고 그의 곁을 떠나 버립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그분께 데려오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이는 하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신 후에 거기를 떠나시니라.』(마태복음19:13-15)
예수님께서 하늘의 왕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분명하게 구하고 의지하는 자들의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오직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하나님 한 분뿐임을 알고 그분께 구하며, 의지하고 충성하는 생애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문제를 해결하셨고, 그들이 필요할 때마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난 후에는 그들의 구할 대상을 잃어버리고 방황을 거듭하다가 오히려 우상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문제를 말하고 해결 받으려는 어리석음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주 네 하나님이니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말지니 이는 나 외에 구원자가 없기 때문이니라.』(4)
하나님은 지속해서 그들을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버지를 곁에 두고 다른 사람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곁에 두고 우상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은 이유
하나님은 그들의 심각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따라야 할 이유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기 전 광야에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계셨습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외면했고,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초장이 내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매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서 나를 잊었느니라.』(6)
하나님께서 광야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들을 지키시고 돌보심으로 그들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풍족한 생활은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편안한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고 오히려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고 오히려 우상에게 다가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곤고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다가와서 은혜를 구함으로서 평안하고 풍성한 삶을 지내지만 오히려 점차 하나님을 잊어가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이 가진 물질은 자신의 정욕대로 사용하고, 교회에서 적당한 명예나 지식을 소유하게 되면 오히려 교만해져서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가난이 주는 유익함
때로는 가난함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이 가난은 우리의 영까지도 가난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을 훼손시킬 부요함이라면 우리는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5:3)
『그 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매』(마태복음19:23,24)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주님 앞에 부요함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이 복음의 순수함으로부터 이탈하여 거짓 진리와 속임수로 교회들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들일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이 가난하다 할지라도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우리의 구원에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서 더욱 큰 구원을 이룰 수 있다면 부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이 그에게 유익하다면 가난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의지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이 있다면 야게의 아들 아굴의 대언의 말씀인 아래와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헛된 것과 거짓말들을 내게서 아주 멀리 옮기시오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며 오직 알맞은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는 내가 배불러서 주를 부인하며 말하기를, 주가 누구냐? 할까 염려함이오며 또는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할까 염려함이니이다.』(잠언30:8,9)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의 멸망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들의 멸망은 실로 비참합니다. 새끼 잃은 곰같이 그들을 만나서 그들의 심장 꺼풀을 찢고 거기서 사자같이 그들을 삼키며(8),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 오래 머무름과 같다고(13)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의 최후는 멸망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보실 수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일에 대하여 관대하시며,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언제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와 함께 머물러 있는 동안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일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지식으로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고자 하지 아니하시느니라.』(이사야59:1,2)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계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와의 관계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안에서 머물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으십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받은 구원에는 변함이 없을 수 있겠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결국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로마서8:13)
이 일들을 위해서 주님은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즉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모습들을 제거해 가실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의 모습들을 몰아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성령 안에서 사는 자들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참 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와 더불어 살지 않습니다. 그도 성령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죄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멸망 가운데서 구원을 약속하심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분명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들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무덤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으로부터 구속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4).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멸망받기를 원치 않으시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전서15:55-57)
무덤과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결국 율법아래 살던 자들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온 인류의 유일한 희망임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의 죄로 인한 멸망의 상태에서 건져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이미 예비 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한 이후로는 더 이상 상관이 없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 예수님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아는 자라면 그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될 것입니다. 즉 많은 이들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전하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이 멸망의 세대에 주님의 복음을 들고 충성스럽게 전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