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에게 온 시험(창39:7-20)|

조회 수 4009 추천 수 0 2010.06.06 22:53:21

이 일들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말하기를, 나와 함께 눕자, 하나 그가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보소서, 나의 주인이 집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 손에 맡겼으매 이 집에는 나보다 더 큰 자가 없으며 주인이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니라. 그녀가 날마다 요셉에게 말하였으나 그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옆에 눕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창39:7-10)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시험이 있어왔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일수록 이 시험을 피해간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시기 위해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을 금식하신 후 시험받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마4:1-11). 물론 예수님의 시험은 메시아로서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도 이 시험을 피해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의 극복 여부는 그 사람의 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다가올 것이며, 이기는 자는 반드시 믿음의 분량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롬12:3). 요셉은 그가 당하는 시험을 통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게 될 시험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당할 수 있는 시험들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시험을 이길 수 있다면 그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왕관(면류관)이 주어지는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약1:12). 그러나 이러한 시험을 이겨낼 수 없다면 그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수도 있습니다(막8:38). 요셉은 시험을 이겨낸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당한 시험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1. 그는 고통과 배반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형들의 악한 행동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동생이었던 요셉을 시기하여, 처음에는 죽이려 하고, 이 일이 자신들의 양심에 걸리게 되자 결국에는 그를 지나가는 미디안 족속의 상인에게 팔아넘깁니다(37:28). 그들이 돈을 얻기 위하여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동생인 요셉을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형들의 입장에서 요셉이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형들에 대하여 무시하는 듯한 말을 했고, 또한 아버지로부터도 특별한 사랑을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요셉이 보았던 꿈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었으며, 또한 그 일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비쳐지고 있습니까? 그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있는 자신들만이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말들을 세상을 향해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거짓말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매우 불쾌할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을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분노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많이 보이셨고, 성경이라는 가장 분명한 기록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해 왔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통을 가하고 심지어 가족이라도 외면하고 분노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거짓 진리에는 그토록 관대하면서도 참 진리인 복음에 대하여는 그토록 적대시하는 현상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신비(Mystery)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후11:4).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순간부터 요셉이 당했던 고통과 배반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인하여 그의 가족을 떠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생활했듯이 우리도 세상(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에 가장 처음 겪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는 육신의 정욕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형들에 의해 끌려갔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했고, 급기야는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소유를 맡은 감독이 되었습니다(39:4-5). 그렇습니다. 그는 비록 종의 신분으로 들어갔지만 성공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새로운 시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끊임없이 요셉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기회를 보고 있던 그녀는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요셉을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시험이었습니다. 요셉은 적당한 타협으로 육신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 자리를 피했고, 결국에는 그의 옷을 벗어 던짐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쾌락을 포기하고 오히려 스스로 감옥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가 왜 그러한 길을 택한 것일까요? 그것은 육신의 즐거움보다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그분의 뜻에서 벗어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즐거움보다는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유혹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인 즐거움을 구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자신들에게 많은 물질이 있기를 구하고, 또한 가정에도 아무런 일이 없기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도가 잘 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건강한 믿음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보다는 자신의 육신이 만족함을 얻는데 더욱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생각해 봐야할 문제입니다.

 

더욱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적당히 교회의 모임을 게을리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사업과 친구와의 관계를 안정되게 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또한 공부를 위해서 당분간 주님의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것들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는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넘어간 것과 같은 처지가 된 것입니다. 육신의 안위를 위하여 주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간음과 일반적인 생활이 같을 수 있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가 큰가, 적은가를 가리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는 가장 먼저 주님의 교회를 생각할 것이며, 또한 세상과의 타협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쾌락의 늪으로 인도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곳에서 입고 있는 옷을 벗고 빠져 나와야만 합니다. 그 결정이 때로는 더욱 고통스러운 길로 인도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그 길을 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욱 좋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3. 그는 고독과 두려움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보복으로 요셉은 감옥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그는 그곳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감옥 안의 모든 일을 맡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39:21-22). 그러나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그는 가족을 떠나 있어서 누구 하나 면회 오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서 감옥 안에서 생활을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고독과 두려움으로 감옥 안에서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그의 모습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잔 맡은 관원과 빵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고는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요셉이 여전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가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력한 소망을 드러내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로움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형벌입니다. 왜 사람이 범죄를 하면 감옥에 가둡니까? 그것은 사람들과 격리가 된다는 것이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시험이 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훈령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는 동안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가장 중요한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훈련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격리를 통해서 올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위해서 찾아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심지어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반을 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홀로 된 것을 매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답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아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많은 시간을 기도하게 될 것이고, 또한 더욱 간절함으로 주님께 다가갈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시험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러한 기회는 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환경적으로 매우 두려운 것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믿음에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계속 훈련하실 것입니다.

 

4. 그는 명예를 얻은 이후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명예를 얻은 이후의 삶이 변질되어 가는 것을 많이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집트 왕 파라오의 꿈을 해석함으로서 온 이집트 땅의 치리자가 되었습니다(41:43). 자! 이제부터 요셉의 행적에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원수로 생각해야할 많은 사람들을 두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누명을 쓴 것과, 잔 맡은 관원이 자신의 일을 기억해 주지 않음으로서 감옥에서 더 많은 시간들을 보내야 했던 사실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형제들에 대하여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보복할 생각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보복할만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면 그들은 모두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보디발의 아내나, 잔 맡은 자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곡식을 구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찾아 온 형제들(42:2)에 대하여 처음에는 그가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결국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서로 상봉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45:2). 그는 오히려 그들을 사랑했고, 후에는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명예 앞에 고꾸라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어렵고 힘들 때에는 신실하게 살아가다가도 막상 명예가 주어지게 되면 사람들을 무시하고, 때로는 보복하기도 하고, 또한 스스로 높아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낮아지고, 섬기는 자세를 갖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을 보십시오. 그는 겸손함으로 사무엘이나 백성들로부터, 아니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왕이 되자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결국에는 스스로 교만해져서 제사장의 일도 대신하고,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유능한 장군이었던 다윗을 죽이려는 모습까지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의 최후는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그는 착각을 했습니다. 명예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보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의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분명히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일컬어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시대에서 그가 행동한 것을 보면 결코 스스로 명예롭게 살려고 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 전도를 위해 고넬료의 집으로 향했던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지금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일은 자칫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향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감독이 야고보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자리는 명예로만 놓고 본다면 베드로의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그러한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의 결정에 따랐고, 오히려 순종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바울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을 때에도 그는 그의 견해를 받아들였고, 이후에는 바울과 더불어 더욱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과거의 명예에 연연해 있었더라면 그의 사역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명예는 스스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가 포기함으로 더욱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높고 낮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려 한다면 자칫 더 낮은 자리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낮은 자리로 가고자 하는 자들만이 더욱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높은 자리에 있다면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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