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날짐승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그러나 아담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합당한 조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그 남자와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 (창2:20~25)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선물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습니다. 즉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아담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몇 평의 땅과 건물들을 가지고 자랑을 하고, 또한 그것들을 얻기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담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담은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삶과 동행할 조력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곧 그가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습을 보셨고, 결국에는 그를 잠들게 하신 후 갈비뼈를 빼내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이를 보고 매우 만족했고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여자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와(이브)가 바로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게 주신 최초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선물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아내는 하와(이브)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하와(이브)는 아담의 참 아내였습니다. 그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그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여자가 아니라면 그 여자가 아무리 아름답고, 우아하고,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참 아내가 아닙니다. 오직 아담의 가슴을 열고, 그 안의 갈비뼈를 부러뜨려, 그 갈비뼈로 만든 여자라야 만이 아담의 진정한 아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아담에게 있어서 하와(이브)는 자신의 분신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날 결혼하는 부부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갈비뼈가 위치해 있는 곳은 심장이 있는 곳입니다. 심장은 바로 피를 받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곳 심장이 위치해 있는 곳을 보호하던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심장에 있는 피를 모두 쏟으시고 주님의 교회를 사셨기 때문입니다(행20:28). 바로 그 교회는 예수님의 피를 기초로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이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일들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내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오히려 자신을 존중해 줄 것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으로서 좋은 자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좋은 남편은 언제나 자신의 아내를 소중하게 다룰 줄 알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줄 수 있는 자입니다. 아담이 하와(이브)를 향해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자신보다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은 아내를 자신보다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뒷받침 되었을 때 정상적인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여자의 위치는 어떨까요?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신들이 사랑을 받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가정에서 여자의 본분은 남편의 조력자라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매우 섬세합니다. 이에 비해 남자들은 신념이 강하고, 추진력이 있으며, 의지가 강하지만 세심하게 배려하는 부분은 매우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가 다른 성품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바로 서로가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여자는 남편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만일 여자로서 남편의 사랑을 기대하면서 자신은 정작 남편에게 조력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아내의 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성공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녀가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할지라도 남편의 위치에 따라서 그녀의 자리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남편의 성공은 곧 그의 아내의 성공이기도 하며, 남편의 실패는 아내의 실패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패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남자에게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여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조력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혼자로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다릅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홀로 사는 남자는 쓸쓸해 보이지만 홀로 사는 여자는 부족해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자는 당연히 남자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결혼의 목적이며, 훌륭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결혼과 동시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 한 육체, 즉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이브)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옷을 입지 않고 오직 사람만이 옷을 입고 다닌다는 사실을 보면 우리가 오늘날 옷을 입는 이유는 죄로 인해 상대방의 모습을 보게 되고, 또한 그 속에서 부끄러워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죄로 인한 허물들은 상대방에게 부끄러움이 되기도 하며, 또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벌거벗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상대방을 사랑스럽게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서로가 한 몸, 즉 한 육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부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의미는 매우 특별해집니다.
부부가 살면서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한 집에서 부부로 살아가다 보면 많은 허물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은 많은 다툼 속에서 갈등하게 될 것이며, 힘든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부부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부부, 즉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부부라면 다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부부는 결코 따로 떼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아내의 실수는 곧 남편의 실수이며, 남편의 실수는 곧 아내의 실수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남편의 성공은 곧 아내의 성공이기도 하며, 아내의 행복은 곧 남편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부부는 결코 서로가 완전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듯이 처음부터 완전한 부부는 없습니다. 부부도 서로가 양보하고 배려하며, 어려움 중에서 인내하고 서로에게 용기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완전한 몸, 즉 완전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힘써야만 합니다.
원수의 관계는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서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곧 부부가 서로 원수가 되기 가장 쉬운 위치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항상 곁에 있다고 함부로 대하거나 예의 없이 행동하는 것은 결코 좋은 부부의 모습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누구보다 가장 존중하고, 친절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을 때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부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부부로 남은 인생을 멋지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