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사도행전1:12-14)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에 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하게 합심해서 기도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이 결코 옳지 못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합심기도의 형태가 변질된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합심해서 기도하는 모습들은 계속되어져 왔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기도는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상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는 믿음의 분량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합심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종종 인도자에 의해 모든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기도하기를 청하지만 어떤 이는 열심히 기도하고, 또 어떤 이는 기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자칫 초신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스럽기까지도 합니다.
우리가 혼자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구하는 말이나 자세들이 적극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기도를 들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보다 자신감 있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이 기도하는 자리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기도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사실상 기도를 크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간절함 때문에 구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자기보다 더 큰 소리가 나면 더욱 크게 부르짖는 모습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크게 기도한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부르짖어 기도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할 수만 있다면 혼자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 방법이며 예수님께서도 기도할 때에 골방으로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마6:6). 그러나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혼자 기도하는 것만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합심해서 기도해야할 이유를 성경을 통해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필요에 대한 응답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던 제자들과 여자들을 포함한 120명의 사람들이 기도했던 모습들은 우리가 합심기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와 간구를 계속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기도했던 방법들이 아마도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기도했거나 순차적으로 기도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다 거기 있어"(13)라고 말하고 있고,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공동의 문제를 두고 기도해 왔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를 당한 후 베드로 역시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기도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일은 결코 베드로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까닭에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사도행전12:5)
교회가 기도를 했다고 하는 사실은 단순히 제자들에 의해서 기도할 것을 요청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모여서 기도를 계속했고 이 기도를 통하여 천사를 통하여 베드로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사도행전12:12)
그들의 기도 제목은 분명했습니다. 핍박이 있었던 당시에 모여서 기도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했던 이유는 그들의 기도가 속히 응답이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을수록 더욱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순교가 거듭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이 주님을 향해 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합심해서 기도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가 모여서 기도하는 일을 주저한다면 그들은 교회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어떠한 응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삶들을 가진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 까닭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파괴하려 들 것입니다. 때로는 핍박으로, 때로는 거짓 진리로..... 교회는 이러한 위험이 닥쳐 올 때마다 더욱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수한 교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
이 말은 결코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혼자 기도할지라도 그 간절함과 필요에 따라서 주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든지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가 극히 주관적일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 사람이 합심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18:19-20)
한 사람의 기도는 때때로 응답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기도하면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한 사람이 기도하면 자기 중심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기도하게 된다면 자신의 입장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편에서 기도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두 사람이 합심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를 요청하고는 합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일, 즉 가정, 자녀, 사업, 물질 등의 문제를 위해 기도를 요청하고는 하지만 믿음의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는 더욱 주님의 편에서 옳은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 두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주님이 그 한가운데 계셔서 보실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바른 결정과 결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성도들이 서로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한 것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의 기도에 대하여 분명히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적극적인 제안을 드린다면 믿음의 성도들이 만날 때마다 서로 기도할 내용들을 나누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도 합심해서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결코 혼자서 하는 기도의 방식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심에 있어서도 우리(~us)라는 말을 사용하심으로 오히려 합심해서 기도할 때의 형태로 기도를 가르치시기도 했습니다.(마6:9-13)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방식에는 합심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기도를 혼자서 하라는 의미로서 행동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셨고 그들에게 기도하기를 요청하시기도 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마태복음26:36-46) 오히려 기도하지 않고 피곤해 하는 그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합심해서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모여서 기도하는 일에 힘쓰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세상에서 더욱 견고하게 성장해 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더 큰 사역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로새서4:2-4)
바울은 교회들에게 쓴 편지에서 언제나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빌1:19, 살후3:1,고후1:11) 특히 감옥에서 쓴 바울의 편지는 더욱 간절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몸인 매인 상태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감옥에서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물질 등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교회 또한 그에게 이러한 삶에 필요한 도구들을 공급하는 일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도 힘든 사역을 하고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물질이나 삶에 필요한 도구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다른 대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복이나 양식, 그리고 물질이 아니라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바른 진리 위에 서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에게는 굶주림이나 헐벗음, 그리고 가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방황하는 혼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방치해 두거나 육신의 연약함, 혹은 세상이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막음으로부터 오는 힘겨운 싸움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기도 외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교회가 힘겨운 사역자(목회자나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역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다 목회자나 선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합심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더욱 많은 결실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드리는 기도는 더 큰 사역의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1:11)
우리는 때때로 편견이나 관습으로 인하여 믿음에 중대한 차질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합심기도에 대한 부분은 지금까지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혼자서 하는 기도가 좋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숙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심기도를 하는 일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합심기도는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교회의 사역에 매우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믿음이 성장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 역시 자라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지체들은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주님의 일을 하는 많은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일을 계속할 때 성장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