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전할 것인가?
(행8:26~31)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인상적인 찬송가가 있습니다. 특히 사역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즐겨부르는 찬송이라고 생각됩니다. 찬송가 323장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1절)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 없이 드리리다(2절)”
그러나 오늘의 현실을 돌아 볼 때 이 찬송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 감동적이거나 즐겨 부를만한 찬송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매우 이성적인 상태에 있으며, 헌신보다는 효율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도심에서 사역을 하고 싶어 하며, 또한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서 단시간 내에 뚜렷한 결과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외형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선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방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있는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하면서 복음은 놀라울 정도로 전파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한 번의 설교로 5,000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성도들은 스스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순식간에 예루살렘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났으며, 그들은 새로운 곳을 향해 전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나선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이 때 집사였던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더욱 확장되어갑니다. 당시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행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빌립은 주저하지 않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물론 이 일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교회에 핍박이 있어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널리 흩어진 결과이기도 합니다(행8:1). 중요한 사실은 빌립이 사마리아 도시로 내려가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는 사실입니다(행8:5).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놀라운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빌립은 복음을 전하는 대상에 대하여 구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장소에서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특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과 주변, 아니면 대학 캠퍼스나 공원, 그리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거리설교를 하는 것으로 자신이 훌륭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효율적이고 성경적인 방법은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빌립은 어쩔 수 없이 사마리아로 왔지만 그곳에서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곳이 바로 복음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의 전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도시에서의 성공적인 복음전도 활동을 뒤로하고 주의 천사의 말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데 그곳은 사막이었습니다(행8:26). 그것은 빌립의 입장에서 황당한 일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매우 훌륭하게 사역을 하고 있는 그가 사막으로 가는 일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빌립은 천사의 말을 따라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밑에서 국고를 맡은 큰 권세를 가진 병거를 타고 가던 내시를 만납니다. 빌립은 성경, 즉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그에게 접근하여 그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고, 내시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 깨달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빌립이 병거에 올라와 자신과 함께 앉을 것을 요청합니다. 이후로 빌립은 성경을 풀어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후 다시 가이사랴로 돌아옵니다.
많은 사역자들은 자신의 사역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대한 교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려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여전히 회중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빌립이 사마리아에서의 사역으로 만족하고 안주하여 했다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구원받는 일은 없었습니다. 또한 내시를 통하여 오늘날 동북 아프리카에 해당되는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필요로 하는 지역이라면 자신의 상식을 벗어난 어떠한 지역이라도 가서 복음을 전할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복음 전도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십시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역자들이 각종 성범죄에 연루되기도 하고, 교회 세습의 문제로 파당이 일어나며, 재산분쟁으로 인하여 법정 소송까지도 벌이기도 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 성도들의 헌신이 담긴 물질을 쏟아 붓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고, 사회적으로는 복음을 전할 통로를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과연 그들이 처음부터 마치 삯군과 같은 자세로 사역을 시작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타락한 상태로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스스로 안주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물질과 명예, 그리고 머물기 좋은 환경은 그들을 더 이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새로운 곳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을 포함한 복음 전도자들은 결코 한 곳에서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새로운 곳을 향해 갔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가는 곳마다 놀라운 전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만일 그가 안주하여 했다면 에베소나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베뢰아와 같은 지역의 교회에서 머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세운 이후에 미련 없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이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간 젓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본래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오히려 드로아에서 환상을 통하여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그를 인도했고, 결국 자신이 원했던 지역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던 장소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것을 원했지만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로마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복음 전도자로서의 자세는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닌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어느 곳에 있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복음 전도자라면 한 곳에 안주하려는 자세는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어느 장소로 인도하시든지 그곳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역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과연 우리는 현재 있는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지를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