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에 헤롯왕이 자기 손을 뻗쳐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괴롭히려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 또 그가 유대인들이 이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더니 그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그가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군사가 넷씩인 네 소대에게 맡겨 지키게 하더니 이는 이스터가 지난 뒤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함이더라(사도행전12:1-5)
부활절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성경적인 절기로 인식되어 있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기적으로나 의미상으로 보았을 때 매우 흠 잡을 때 없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가장 의미있는 사건으로 보았고, 또한 증거했기 때문에 이것은 특별한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그 당시의 일만은 아닙니다. 지금에 있어서도 주님의 부활은 가장 소중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절기로서 지키고 있는 부활절(Easter day)에 관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부활절을 지켜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활절(Easter day)의 유래
우리가 의아하게 생각되어지는 부분이 있다면 왜 부활절을 영어로 부활을 말하는 "Resurrection"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Easter"라는 말을 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부활절이 본래부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지켜져 온 것이 아니고 이방종교로부터 유입되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독교회를 이방종교와 혼합시키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카톨릭 교회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교묘하게 바꾸어 버린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절기 역시 모든 이방 종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녀는 남편은 태양신으로 불리워지도록 하였고, 자신은 달신으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녀에 대하여 "하늘의 여신 혹은 하늘여왕"(렘7:18, 44:17-22)으로 불리워졌으며, 각 지역에 따라 아스다롯(삿2:13), 아데미(다이아나 행19:24) 등으로 불리워졌고, 이 여인의 이름이 로마로 들어오면서 "이스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 이스터 축제일은 새로운 생명이 소생하는 계절인 봄에 지켜져 왔으며, 그 안에는 다산과 새 생명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절기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풍습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교회들이 지키고 있는 각종 행사의 모습들과 유사한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전설이 있지만 대부분의 이교사회에서는 인류의 역사가 거대한 계란으로부터 부화되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이교 전통 속에 있는 이스터 풍습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풍습을 보면 토기가 되기를 소망하는 거대한 새가 있었는데, 여신은 그 새를 토끼로 변화시켜 주었고, 그에 대한 답례로 토끼는 매년 봄이 되면 여신을 위하여 아름다운 달걀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이스터 절기동안에 달걀을 먹는 풍습으로 바뀌어져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이스터
그렇다면 어떻게 이스터 축제일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성경 사도행전12:1-5에서 가장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무교절과 더불어 있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스터 역시 무교절 주간에 있는 축제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바로 이 절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즉 유월절과 이스터 축제일은 같은 기간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자료들을 통해 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특별한 날로 생각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비록 절기로서 그 날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의 주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 날이 특별한 날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을 기억하면서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로마에게 있어서도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교 숭배사상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한 날로 "이스터" 축제일을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들 모두에게 있어서 유월절과 이스터 축제일은 특별한 날이었고, 공교롭게도 같은 기간에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이러한 기회를 절대로 놓칠 리가 없습니다. 로마 교회는 즉시 이것은 한데 묶어 "부활절"로 지키도록 했던 것입니다.(물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한다고 말하지만 명칭은"Easter day"로 쓰고 있습니다)
부활절과 달걀
우리는 앞서 달걀을 먹는 풍습이 들어오게 된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중에 하나는 이 달걀이 모든 이방 종교마다 스며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사단숭배 집단인 드루이드 교도들은 달걀을 "거룩"의 상징으로 보고 있으며, 로마에서는 풍요를 기원하는 행렬에 달걀을 앞세웠고, 심지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계란을 축제 때 "봄의 여신"으로 섬기는 풍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와 이제는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모든 교회가 달걀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왜 달걀을 먹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주님이 부활을 생각하며 먹는다"고 말합니다. 과연 달걀과 주님의 부활이 서로 상관이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는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생명이 있는 달걀을 죽여서(삶아서) 먹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요?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이교적인 행위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걀을 먹는 풍습을 대부분의 이교도들이 받아들인 이유는 그것이 다산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달걀은 매일 낳을 정도로 그 생산성이 매우 풍부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의 수가 곧 민족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이 낳도록 장려했습니다. 그리고 워낙 질병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죽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다산은 그들이 가장 고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의 대부분이 이 풍습과 전통을 받아들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까닭으로 달걀을 먹어야 합니까? 달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통이며, 매우 이교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이교도들이 교묘하게 기독교회 안에 누룩으로 심어놓은 전통일 뿐입니다.
부활절과 새벽집회
우리의 어릴적 기억들을 떠올리면 부활절이 되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집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촛불하나를 손에 들고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나갔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각종 잡스러운 의식들을 모두 없애고, 대형 집회들을 준비하여 여러 교회가 연합하여 드리는 모양으로 바뀌어졌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도 이 새벽집회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새벽은 태양신을 섬기는 이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시간들로 지켜져 왔습니다. 왜냐하면 새벽은 태양이 나타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교도들은 언제나 새벽에 기도와 제사를 드리는 풍습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속신앙인들이 새벽에 비는 모습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새벽은 모든 종교인들에게 특별한 시간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과연 부활절의 새벽이 그토록 중요한 시간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근거를 둔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시간적으로 결코 새벽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만일 삼일 밤 삼일 낮을 지나 주의 첫날 부활하셨다면 유대인의 시간적인 개념으로 보아서 우리의 시간으로 본다면 안식일(토)이 끝난 오후 6시 이후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의 시간이 결코 새벽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에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들어서 그 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이 주님께서 부활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새벽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호화롭게 치장을 하여 대규모의 집회를 열고 있지만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새벽이라는 시간에 모여서 대규모의 집회를 가졌다는 어떠한 사실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전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의미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떠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부활절이 매우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들어 예수님의 부활을 소홀하게 대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로 인하여 놀라운 신분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15:2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고전15:20-51).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과 같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썩을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육신은 변화하여 부활의 몸으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를 위하여 넘겨지셨으며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로마서4:25)
에수님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은혜는 그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가 의로움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죽음만으로 그쳤다면 우리의 죄는 사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결코 의롭다함을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 문제는 해결하고 의로와지지 못했다면 결코 하늘의 왕국에 속한 백성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의로운 자라고 일컬음을 얻게 하심으로서 약속된 왕국에 들어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베드로전서1:3)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낳게 된 것도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지셨듯이 이미 썩을 육신의 몸으로 태어난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을 자로 태어났어야만 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우리를 다시 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켜 세우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의 처소들에 앉히셨으니(예베소서2:5-6)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놀라운 선물은 우리를 하늘의 처소에 앉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도 그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 앞에 나타날 때도 곧 그들은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늘의 처소에 앉히시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일들은 천사들조차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실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믿는 순간 역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또한 기본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히 절기나 행사 때 기억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것은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배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부활을 축제일로 지낸 것이 아니라 오직 부활을 증거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부활이 축제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루도 잊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초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시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노라(갈4:9-11)
우리가 계속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절기로서 기억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더 이상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자들의 계략에 우리의 믿음을 맡기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죽으심과 더불어 부활을 기억하는 자세로 근신하며 믿음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