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골라주의

조회 수 2766 추천 수 0 2010.06.05 14:56:27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곧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요한계시록2:6)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으니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요한계시록2:15)

니골라주의라는 말은 일반 성도들에게는 결코 익숙한 말이 아닙니다. 아니, 심지어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도 생소한 단어로 인식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가져다 주는 의미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단어는 극히 비성경적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매우 깊이 뿌리박고 있는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요한이 밧모 섬에서 유배되어 있는 동안 계시를 받고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책망할 때 쓰여진 말입니다. 사실상 "니골라"가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가정하에 많은 사람들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인 유대교 개종자 니골라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반박할만한 어떠한 내용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논쟁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니골라 당, 즉 니골라 주의가 무엇이며, 오늘날 어떠한 형태로 교회에 자리잡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니골라"가 사람이든 파당이든 관계없이 그 뜻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정복하다 혹은 지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니카오"라는 말과 "평범한 사람(교회 용어로는 평신도)"을 의미하는 "라오스"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로서 이 말을 정리하면 "평신도를 지배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니골라주의의 역사적 배경

우리는 요한이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쓴 편지에서 니골라 당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에베소교회에서는 "니골라 당의 행위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는 "니골라 당의 교리"라는 말로 책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니골라주의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초대교회 당시에는 "행위들"에 불과했던 니골라주의가 카톨릭 교회가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던 A.D325년 이후에는 이른바 니골라주의, 즉 계급주의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회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카톨릭은 그 시작부터 성직에 계급을 부여하는 제도를 썼습니다. 그래서 신부→주교→대주교→추기경→교황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제도가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회로 일컬어지는 교회들조차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초대교회의 사도권을 계승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대신해서 대리권을 가진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계급주의는 결코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니며, 바벨론 종교의 유산입니다.

니골라주의가 낳은 유산들

우리는 니골라주의가 단순히 목회자가 권위를 내세우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교회 안에서 매우 심각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 형식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생각보다 매우 심각한 것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의식은 대부분 이러한 니골라주의를 바탕에 두고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묵도(예배에의 부름)

대부분의 교회 의식에는 예배시간 전에 "묵도"시간이 있습니다. 이 묵도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하며 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목회자가 하게되어 있는데 이는 목회자가 성삼위 하나님을 부를 수 잇는 권한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권위를 높여주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목회자가 예배에의 부름이 없더라도 그곳에 이미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목회자가 주님을 모실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자체가 매우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어느 곳, 어느 때이든지 그분의 자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마태복음18:20)

#교독문

우리는 사회자와 회중이 성경을 서로 교독, 혹은 윤독(돌아가면서 읽는 것)하면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의식이 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동기 자체가 그리 순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카톨릭의 의식에서 가져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독문은 성경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찬송가 뒤에 부록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교독문은 사회자(대부분 목사)와 회중을 구별하여 읽도록 작성되어 있으며, 더욱이 각 절기와 시기에 맞게 편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카톨릭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회가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과거로부터 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목회자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도들과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세우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코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주님 편에서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독문과 같은 것들은 사실상 목회자와 성도를 구분하려는 시도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니골라주의를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져 왔음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축도

아마도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권위를 가장 뒷받침해 주는 의식이 "축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누구도 할 수 없으며 오직 목사에게만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예배를 참석하지 않더라도 "축도"만 받으면 모든 것을 모든 예배를 드린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말입니다.

축도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들을 수 있는 내용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람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고린도후서13:14)

이것은 그야말로 일상적인 문안인사였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성도에게 매번 동일하게 말하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이 "주기도문"과 같이 기도의 어떤 형태나 방법으로 제시된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바울의 문안 인사를 기초로 만들어진 축도가 더 이상 교회에서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더욱이 기복주의 신앙이 대부분의 교회를 잠식하고 있는 현 상태에서 축도는 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식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 안에는 독특한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사"라는 직책입니다. 그가 아무리 소명을 받고 신앙적으로 탁월하다고 인정을 받았더라도 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하면 그는 여전히 "전도사"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목사"와 "전도사"가 무엇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물론 교단에서 행정적으로 분명한 구분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역과 직결된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일단 접어두고, 교회 안에서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롭게도 목사는 축도를 할 수 있고, 전도사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과연 다른 이들에게 기도해 주는 것을 목사에게만 제한해 두셨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외 없이 서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축도"는 성경에도 없는 것이며, 사악한 교리가 낳은 열매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잘 못된 길로 인도하는 위험한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성도의 자리

그렇다면 교회는 질서 없이 누구나 목사의 일을 할 수 있고, 아무나 어떠한 일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결코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가 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높고 낮음도 없고, 한 형제인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목회자들이 구별된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목회자는 "은사적"으로 구별된 자입니다(로마서12:1-8, 고린도전서12장, 에베소서4:7-12). 이 말은 곧 목회자는 주님으로부터 그 소명이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미 수 차례에 걸쳐서 자신의 종 됨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말해 왔습니다. 이 말은 성도들에게 목회자의 사역이 존중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목회자에게 주어진 은사들이 성도들을 잘 다스려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특별한 위치에서 사역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니골라주의, 즉 계급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목회자는 한 지역교회를 다스리도록 부여된 직분(디모데전서3장, 디도서1-2장)임으로 성도들은 마땅히 한 교회를 대표하는 자로서 존중해야 합니다. 그가 비록 정치적인 지배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감독으로서 성도들을 돌아보는 직분을 맡은 자임으로 마땅히 존경해야 합니다.

너희는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혼을 위해 깨어 있기를 마치 자기가 회계 보고할 자인 것같이 하나니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브리서13:17)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여 겸손으로 옷입으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5:5)

목회자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오직 계속해서 기도와 말씀사역에 전념하리라(사도행전6:4)

사실상 주님의 일을 맡은 자들에게 부여된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것으로 존중받거나 권위를 찾으려 한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목회자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분적인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일을 맡은 자들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베드로전서5:1-3)

사실상 권위는 일반적으로 세상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권위를 위하여 많은 물질과 시간을 들여서 노력해 가는 것이지만, 영적인 권위는 먼저 섬길 줄 알고 헌신하는 자세를 유지함으로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골라주의는 구조적으로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영적 권위는 오히려 낮은 자세를 취함으로서 그 권위를 높여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니골라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실제로 많은 이단들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권위를 찾으려 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눈을 속여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행위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이러한 니골라주의가 들어오지 않도록 경계하고, 목회자와 성도가 그들의 은사와 직분에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서로 섬긴다는 자세를 지속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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