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에 관하여 비판적인 생각을 말이나 글을 통해 쓸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기도를 하지 말도록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떤 것보다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관하여 많은 설교와 글들을 써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이러한 기도생활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틈만 나면 개인적으로 기도하기 위해 힘을 기울입니다. 물론 제가 기도하는 방식이 사람들을 모아두고 기도회 등의 모임을 인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좀 더 은밀한 시간을 갖는 것이 저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는 기도의 방식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마태복음6:6)
그러나 우리가 이 부담스러운 주제인 기도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 안에 기도가 너무도 형식화되어 있고 실제적인 의미를 너무도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은 이단이거나 믿음이 없는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보다 냉정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드릴 수 있다면 드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새벽이라는 시간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으로서 묵상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시간일 뿐만 아니라 주님과 은밀한 시간을 갖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새벽에 기도하러 외진 곳으로 나가셨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새벽에 아직 날이 밝기 훨씬 전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외진 곳으로 나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마가복음1:35)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이후에 가장 먼저 나타나신 시간이 새벽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비록 상징적인 것이긴 하지만 새벽은 주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며, 경건하게 사는데 있어서 유익을 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어떠한 말로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나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분명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벽기도를 드리느냐? 마느냐? 의 문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새벽기도의 잘 못된 관행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교회들이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부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교회는 새벽에 몇 천명의 성도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먼 곳에서도 자동차를 타고 교회를 찾는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 교회의 실정이 어떠하든 간에 많은 교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새벽기도회에 대한 또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교회에서 드리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것이 한국의 교회가 부흥을 가져 온 이유이며, 또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지금 이 시대에도 자랑거리가 될만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한국에서 새벽기도회의 역사에 대하여 논하기를 과거 농촌지역에 어떤 목사님이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을 시절에 전기 불이 없기 때문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게 되자 혼자 기도하게 되었는데, 그 뒤에 성도들이 기도에 참여하게 되었고, 점차 숫자가 많아지게 되자, 이러한 소문이 점차 전해지면서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가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은 우리나라에는 과거에 복을 빌기 위해 지성을 드리는 일들을 주로 새벽에 했었는데 이러한 관습이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새벽 기도회가 생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아울러 이러한 사실을 바벨론 종교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종교, 즉 세계의 대부분의 이방 종교들은 태양신을 주로 섬기고 있는데, 태양은 감추어져 있다가 새벽에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태양을 맞이하기 위한 관습이 있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 종교의 대부분은 새벽에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들어와 오늘날 새벽기도회의 형태로 변질이 되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극단적인 모임에서는 새벽기도회를 하는 것은 이방 종교의 관습을 따르는 것이므로 매우 마귀적이고 세상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정죄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회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와 같은 논리로 주장을 하게 된다면 오히려 더욱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일을 중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벽 기도회에 대하여 우려하는 것은 그것이 우상숭배나 동기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어떤 목회자이든지 교회를 시작하게 되면 당연히 새벽기도회를 시작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새벽기도회는 주일 예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는 "새벽기도회만 없다면 목회가 결코 힘들지 않다"고 고백할 정도로 새벽기도회가 목회자들에게는 매우 힘겨운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정작 자신들은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 교회의 목회자는 능력이 없는 목회자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교회는 결코 성장할 수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느덧 한국 교회는 새벽에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신 모습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러 가실 때에 무리를 지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회중들이 모인 곳으로 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한적한 곳을 찾아 홀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가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새벽기도 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많은 회중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아 기도하기 위해 나섭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기도를 합니다.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들은 너무도 성경과는 거리가 먼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하루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복을 빌며, 그들 자신의 정성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새벽기도회가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선전합니다. 그들은 백일 기도, 천일 기도를 시키면서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려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새벽기도회를 하면 모든 기도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새벽의 기도가 하루의 모든 기도를 대신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이 후로는 기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의 의미는 모여서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5:17)
기도는 호흡과도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새벽의 한 시간만을 호흡하고 나머지 시간은 호흡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장 죽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새벽기도회가 하루의 모든 기도를 대신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면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새벽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일을 하면서, 공부하면서, 밥을 지으면서, 그릇을 닦으면서 모든 순간순간마다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새벽에 기도하는 자들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회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기독교회는 새벽기도회가 관습처럼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길거리에 서서 기도하는 모습과 같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시간을 가졌듯이 이제는 참 된 경건의 삶을 위해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기도를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요철야 기도회
우리는 사실상 철야 기도회라는 것이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하여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예수님이 밤새워 기도하시는 몇가지 장면들을 볼 수 있는데, 먼저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모습(눅6:12)과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명의 제자들이 모두 졸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사실을 들어 밤을 새워 기도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냉정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요일을 철야기도회를 하는 날로 정한 것은 이 날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날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 문제부터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요나가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듯이 삼일 밤낮이 지난 후에야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식 후 첫 날, 즉 주일 새벽에 이미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은 금요일 저녁이 아니라 수요일 저녁이 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이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을 온전히 기도한다는 것은 전혀 성경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수요 기도회나 각종 모임을 갖는 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더욱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금요 철야 기도회를 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이미 모든 이방 종교에서는 금요일을 거룩한 날로 성별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특히 카톨릭 교회는 이 날을 특별한 날로 규정하고, 금식을 하며, 수도원과 같은 곳에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는 관행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것이 기독교회의 중심에 들어오게 되었고,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이와 같은 관행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밤을 새워가며 성도들이 모였던 장면을 목격할 수 있는 데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한 밤중까지 말씀을 선포하다가 유두고가 하는 젊은이가 졸다가 삼층 다락방에서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바울은 그를 다시 일으키고 날이 새기까지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올라가 빵을 나누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사도행전20:11)
사실상 성경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밤을 새웠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는 있지만 기도하기 위해서 밤을 새웠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말이 우리가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들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일정한 틀 속에 가두어 놓고 기도하도록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특별한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도록 요구하고, 그것이 자기 의가 되도록 훈련을 시킨다면 이것은 더욱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7:21)
우리가 철야기도회의 현장에서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은 큰 소리로 주님을 부르며, 기적과 능력을 구하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하기 전에 자신이 분명한 복음 안에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 가운데 복음으로 인한 생명이 없다면 그들의 응답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속이는 자들이 이 세대에는 존재합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바로 이처럼 생명 없는 상태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을 보면서 희망적인 것이 있다면 이제는 많은 교회들이 무모한 기도회를 피하고 진정한 기도의 모범들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삶 속에서 기도하도록 가르치며, 또한 육신적인 기복신앙을 피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도우며, 생명이 있는 성도로서 주님과 호흡하는 일들을 위해 바른 기도의 모습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나 금요철야 기도회는 기독교회 안에 이미 관행처럼 되어져 온 모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위하여 각종 모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진정한 기도가 결코 형식 속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디 쉼없이 기도하는 성도로서 경건한 삶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