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교회의 조건(9)
교제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1-47)
어느 세대에나 교회는 믿음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만들어 주신 공간이며, 영적인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향하여 등을 지기 시작했으며, 교회 밖의 공간을 통하여 그들의 영적 양식을 공급받으려 합니다. 이미 TV, 인터넷, 그리고 각종 방송이나 언론 매체를 통하여 그들은 성경 지식을 얻으며, 일부의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교회라는 공간은 단순히 성경을 알고,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곳은 주님의 신비가 가득한 곳이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소속되어 영광을 드려야만 하는 공간입니다.
교제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미 우리는 문화적으로 모임을 통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교제할 수 있는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교제의 수단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가기 원한다면 교회 안에서 바른 교제를 이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1. 복음 안에서의 교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많이 변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마치 사회 복지 시설과 같은 형태로 변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강사들을 초청해서 세미나를 열기도 하며, 각종 사회 현안들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사회 참여를 강요하기도 하고, 각종 계몽운동에 앞장서면서 교회가 마치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매우 훌륭한 목회 방법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실은 이미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마치 교회가 사회적으로 매우 선한 일을 하는 단체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교회 구성원의 성격이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죄인들에게 의인인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요구가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 대하여 노력하는 동안 우리는 더욱 깊은 좌절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의로워질 수 있는 본성을 가진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교회 안에서 어떠한 교제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에 대하여 매우 명쾌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립보서 1:5)
한 마디로 교회는 복음으로 인하여 모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 복음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 모인 성도들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결코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마치 친교 단체쯤으로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공간 정도로 여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의 본질을 크게 잘 못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피로 값을 치르고 세워진 공간입니다. 이 말은 곧 복음의 가장 본질적인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성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공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비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교회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 안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면 그는 영적 신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의 교제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2. 섬기는 자로서의 교제
그렇다면 주님의 교회 안에서 교제하는 성도들이 서로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교제를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행을 하기도 하고, 각종 세미나를 열어서 지식을 더하기도 하며,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하여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참여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교제의 의미를 더욱 활성화 시켜줄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임이 추구하는 목적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린도후서 8:4)
한 마디로 모임의 목적은 성도들을 섬기는데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섬김은 교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돌아보십시오. 이미 교회는 니골라당의 침투로 인하여 마치 계급 사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섬기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군림하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마치 아래 사람들을 다루듯이 명령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교회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섬기는 본을 보임으로서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는 곳입니다. 더욱 명심해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지만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일수록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약하게 보이는 몸의 그 지체들이 더욱 더 필요한 존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고전12:22). 그들은 언제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들이며, 성숙한 성도들은 그들을 섬김으로서 안전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합니다.
교회가 섬김의 도리를 버리고 세상과 같은 조직적이고 안정적인 모임을 추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섬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주님께서도 섬기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희생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복음 안에서 바르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섬김의 도리를 가지고 주님의 교회 안에서 온전한 교제를 하게 될 것입니다.
3. 교제 아래 사는 자의 삶
우리가 교제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일차적인 대상이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마귀와 교제하는 자들이 많습니다(고전10:20).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마귀와 교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대단히 영적인 삶, 즉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온전한 교제하는 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6-7)
어떤 사람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죄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맞는 답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을 불러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온갖 사악한 일들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며, 마귀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즐깁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의 교회 안에서 이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하고 도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성도들로 하여금 도덕주의자, 혹은 율법주의자를 만들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교회 안에서 득이 되기보다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교회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으며, 이후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양육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성도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교회에 와서 젖을 달라고 조를 뿐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특히 자신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을 듣기 원합니다. 물론 교회는 그들에게 단단한 식물을 먹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린 성도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다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역할을 여기에서 멈춰버립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 안에서는 젖을 달라고 졸라대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납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성장을 멈춰버린 기형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빛으로서, 또는 소금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야만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세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폐쇄적인 경우를 봅니다.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켜가는 것이 믿음의 삶을 성공하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을 때 베드로가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살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하여 바르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방법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 간에 온전한 교제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온전한 교제를 통해서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교회 안에서 더욱 풍성한 삶을 위한 교제가 지속되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