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교회의 조건[2]
성도의 자세
성경적인 교회의 기준을 설정함에 있어서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 이유는 성경 안에 나타난 다양한 교회의 모습들 때문입니다. 특히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들은 매우 질서가 없는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에 오늘날 다양한 모습의 교회를 형성하는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형성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신약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의 서신을 기초로 세워진 교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 자신도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며, 문제점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특히 주님은 이 일에 대하여 교회가 더욱 질서가 있기를 위해 바울을 통하여 각 교회마다 서신을 보내도록 했으며, 이 서신들이 모아져서 완벽한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 서신들을 제외한 다른 성경들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전혀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 졌던 마태복음이나 히브리서, 그리고 과도기의 상황에 있었던 교회의 역사를 담은 사도행전과 같은 서신들이 오늘날 교회에 여과 없이 적용되어진다면 많은 문제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을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행8:12-17,19:1-6). 또 어떤 이들은 타언어(방언)를 말해야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행2:4,10:4619:6). 실제로 성경 안에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후 타언어(방언)를 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례(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세례(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침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행22:16). 그러나 사도행전 안에는 세례(침례)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주장할만한 구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침례)를 받고 네 죄들을 씻어 버리라”(행22:16)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만으로 볼 때 세례(침례)는 죄 사함의 조건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교리에 적용하고, 주님의 교회를 형성하는 기초로 만들고자 한다면 자칫 교회는 혼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올바른 진리 위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불러내어진 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
성경에 교회로 일컬어진 최초의 무리들은 바로 이집트로부터 탈출해 광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행7:38). 물론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모두 주님의 교회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교회라고 불렀던 사실은 상징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상징되어지는 이집트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광야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가나안으로 들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최종 목적지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누구도 스스로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주장해서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마4:19,막1:17,눅5:10). 요한이 그물 깁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마4:21,막1:19). 또한 마태가 세금을 걷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마9:9).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있는 그를 보시고 그를 만나주셨습니다(요1:45-51). 다른 제자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누구도 주님 앞에 스스로 제가가 되겠다고 나선 제자는 없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 있다면 바로 바울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행9:1-9).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다메섹)로 향했습니다. 그는 도착하기 전에 예수님을 만났고, 그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누가 먼저 다가온 것입니까? 바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십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후에 가장 위대한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부르심이 먼저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르심이 있어야 응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와 복음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먼저 다가가는 것은 언제나 종교입니다. 복음은 먼저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은혜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롬1:1,6-7,8:28,11:29,고전1:1-2,24,26,7,18,20-22,24,갈5:13,엡1:18,4:1,4,빌3:14-15,살후1:11,딤전6:12,딤후1:9,히3:1,5:4,7:11,9:15,11:8,벧전2:21,3:9,계17:14). 이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져 있습니다(엡2:8-9). 만일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 죄 사함을 얻고, 또한 주님의 교회의 지체(member)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종교를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바로 주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불림을 받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특별하고도 신비(mystery)스러운 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회중의 모임에 참여했다고 그가 주님의 교회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속한 자들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몸에 연합되어야 합니다.
2. 오직 성경만을 기초로 하는 교회
많은 사람들은 참 된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토록 많은 핍박과 죽음을 당해야했는지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신실한 자들이었고, 죽음을 피하지도 않았으며, 전혀 정부에 대하여도 저항하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정부에 대하여 순종하는 자세를 가진 자들이며, 권세나 명예에 대하여 전혀 욕심을 가지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기초였으며, 무수한 핍박을 통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주님의 교회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지금까지도 교회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교회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나라들이 세워졌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단 한 번도 정치세력화를 시도하지도 않았고, 국가교회를 표방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영원히 보존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교회가 수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탄은 성경을 없애는 일을 포기하고 변질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일은 사실상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일이기도 합니다. 바로 뱀이 하와에게 교묘하게 접근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발견하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결국 하와가 범죄 하게 되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창3:1-6). 그것은 인류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기도 하지만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끝없이 변질 시킬 것이라는 암시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많은 부분에서 성경의 변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 놓고, 진짜는 가짜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권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는 성경 자체를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로마서 11: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라디아서 3:22)
그렇습니다! 성경이 직접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말을 합니다. 그것은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안에는 그의 인격과 생각들, 그리고 삶의 모든 모양과 방법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처럼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것입니다. 그곳에는 그분의 모든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이를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롬9:17,10:11,갈3:8,4:30). 어떻게 성경이 볼 수 있으며, 가두고 쫓아내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친히 말 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성경을 대하는 자세는 곧 하나님의 대하는 자세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도 틀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과 같습니다. 비록 성경이 종이나 가죽으로 되어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말씀들은 곧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것은 참 된 주님의 교회에 속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신앙이었습니다.
3. 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소망을 두는 교회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전부라면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전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간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전혀 행복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돌에 맞아 죽고(행7:54-60), 칼에 맞아 죽고(행12:2), 수많은 핍박을 당하며(고후11:23-27)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일을 멈추지 않은 것입니까? 만일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은 매우 우둔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또한 이 땅에서 극심한 핍박을 당하는 것을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만일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서 뿐이라면 그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 땅에 소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분 앞에 서게 될 날을 고대하고, 그분으로부터 얻게 될 보상을 생각합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보상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마5:12,46,6:1,2,5,16.10:41,42,막9:41,눅6:23,35,고전3:8,14,15,9:17,18,골2:18,3:24,히10:35,11:6,11:26,요이1:8,계11:18). 보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떠한 손해를 입은 자들에게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결코 자신들이 입게 될 피해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장차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3-18)
오늘날 거대하게 지어져 가는 예배당 건물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해지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복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자신들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다는 자세로 예배당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잘 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장차 다가 올 세상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소망을 키우고 장차 주님으로부터 얻게 될 상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만일 여전히 이 땅의 일들만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만일 이 땅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언제나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또 다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습니까? 과연 주님으로부터 불러 모아진 무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까? 혹시 내가 필요해서, 마치 사교단체 정도쯤으로 생각하고 주님의 교회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십시오. 주님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불러 모아진 , 즉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한 몸을 이룬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나의 성경에 대한 자세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만 합니다. 여전히 성경보다 목사의 말이나 교회의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성경의 권위 앞에 자신을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은 참 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고, 거짓 진리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장차 불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다가 올 세상에 소망을 두십시오.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을 고대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하루하루를 그리스도인으로서 후회 없이 살아가기에 힘쓰십시오. 이것은 성경적인 교회가 되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