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바울이 보는 전도

조회 수 3176 추천 수 0 2010.06.05 10:56:29

11 장 바울이 보는 전도

 

많은 사람들은 전도가 단순히 사람을 교회로 데려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데려왔다고 해서 그것을 전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데려오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전도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숫자로만 전도를 말한다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많은 회중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심을 하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반면에 스데반은 많은 이들이게 복음을 전했지만 오히려 돌에 맞아 죽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만일 숫자로 전도를 말한다면 스데반의 죽음은 매우 억울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그는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한 기도를 하였고, 주님의 영광을 체험한 자입니다. 전도는 숫자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내용과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전도는 말이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잘 하는 자들이 전하는 것도 잘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혜로운 자들이 더욱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도가 말이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자신의 말과 지혜로 증거 하려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오늘날 복음 전도자들은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들은 국내에서 대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부족해서 대학원 공부를 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일부는 유학을 통해 많은 지식들을 얻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도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 선포, 즉 전도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바른 전도는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으로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많이 배우고, 세상의 지혜가 있다고 해서 전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을 의지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자가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우리는 때로 전도를 위한 세미나를 갖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 올 수 있는가를 배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법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육을 통해 사람을 데려왔다고 할지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다시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전도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구원의 복음을 믿고, 그 사랑을 전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그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누리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2. 전도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훌륭한 말 솜씨가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도는 단순히 어떤 사실에 관하여 말하는 것 이상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세로부터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 9:13)

먼저는 전하는 자가 복음을 믿고 복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깨닫지도 못한 자가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복음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다른 사람에서 복음에 대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전도를 위해서는 먼저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복음 전할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교회로 인도할 때는 어떤 방법으로 데려왔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일 사업관계로 인도했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 사업을 구상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음악 때문에 왔다면 그는 복음보다는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또한 친구를 사귀는 수단으로 교회를 찾도록 만들었다면 그는 복음보다는 교제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복음을 듣고 교회를 찾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자세로 교회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적은 것은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를 찾기 보다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8)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일차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나눌 자세로 사람들에게 접근을 했습니다. 물론 이 글이 이미 믿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한 말이지만 그의 자세는 언제나 구원받은 자나 받지 못한 모든 이방인들을 향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적당히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힘을 다해 증거 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적인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구원받은 자나 혹은 받지 못한 자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복음 전도의 열매를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그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마치 자식을 낳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생각 없이 자식을 낳을 수 있습니까? 자식을 낳게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고, 또한 서로 사랑의 감정을 나눈 이후에 낳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먼저 누구와 사랑의 감정을 나눈 것입니까?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과의 충분한 교제가 있은 후에 그는 그 안에서 복음을 전했고, 귀중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남편 없이 자식을 낳은 여인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가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그것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전하는 자는 먼저 복음을 깨닫고 영접한 사실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해야 합니다. 즉 마음을 전합니다.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7)

마음의 교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전도는 단순히 어떤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을 다른 이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내게 있는 것을 나누어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전도의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전도에는 핍박이 따른다.

 

우리는 가끔 교회 내에서 전도 행사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한 자들에게는 커다란 상품을 주기도 합니다. TV, 냉장고, 노트북..등 많은 상품들을 진열해 놓고 열심히 전도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행사 기간 동안 수백 명을 데려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전도가 즐겁다고 말하며,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의 전도 방법들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능력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전하는 사람의 탁월함도 있겠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는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사귈 수 있고, 사업이나, 사회생활, 복지 등 다양한 방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전도 방법은 오늘날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살전 2:2)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살전 2:9)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바울은 왜 복음을 전하는데 고난을 당한 것입니까? 당시 환경이 나빠서 그런 것입니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당시의 상황이 핍박을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바울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핍박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복음의 순수함을 고집했고,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은 저마다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을 통해 자신의 길로 갔지만 바울은 죽을 때까지 오직 복음을 고집했던 자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핍박을 당했던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미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세상과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복음과 상관없는 많은 것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제는 오히려 복음이 아닌 것들이 바른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가지고 바른 복음을 제시하면 이단으로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복음전도자의 일에는 반드시 고난이 동반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받고 있지 않다면 자신이 가진 복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변질되었거나 거짓 복음에 속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바른 복음을 찾아 낼 수 있는 것입니까?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바울은 비록 자신의 몸은 죄인 취급을 받고 매인 몸이 되어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변하지 않고 활동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비록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말씀은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툼을 일으키려 합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1:17)

역사상 많은 이들이 복음을 핍박한다는 이유로 정부나 권세들에게 대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으며, 고난을 받는 것은 오히려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난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7-18)

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감수하는 것입니까? 그것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즐거울 수 있습니다. 만일 상이 없다면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장차 주님으로부터 충분한 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는 이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4. 전도의 내용은 복음이어야 한다.

 

무엇이 전해지고 있는가?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이들은 전도할 때 복음보다는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목사나 건물, 혹은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자랑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데려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결코 옳은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도의 내용은 당연히 복음이어야만 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8)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사실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종교적인 모임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회봉사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에 대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은 복음을 가졌다는데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를 통해 교회로 들어 온 이가 복음 외에 다른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곧 실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종교가 선행을 가장 기본적인 교리로 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도덕적으로나 각종 사회사업은 세상의 이방 종교가 더욱 잘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오직 바른 복음이 전해지고 또한 그 복음 위에 교리의 틀을 세워감으로서 세워져 가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교회의 지체(Member)가 믿음의 시작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6:17)

전도는 처음 받아들이는 자의 입장에서 믿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시작이 잘 못되면 끝이 잘 못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른 복음 위에 교리의 틀을 세워가고 그 틀 안에서 순종하는 생애를 산다면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은 견고하게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전하는 내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하는 자들은 처음 믿음의 삶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말해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5. 전도는 직접 전해져야만 한다.

 

왜 복음이 전해져야만 하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굳이 사람을 통해 전해지지 않더라도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지 않으실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든지, 아니면 천사들을 통하여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오직 바울 외에는 결코 나타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십니다. 고넬료를 위하여 베드로를 보내고, 구스(이디오피아)의 내시를 위하여 빌립을 보내는 것은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0:15)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6:19)

바울은 사람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사람을 속이는 자들입니다. 복음은 전하는 자가 없이 듣지 못할 것이며, 듣지 못하게 된다면 믿음도 없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통하여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전하는 자가 복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들을 수 있도록 사람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훌륭한 건물을 지어 놓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는 마치 거대한 슈퍼마켓을 지어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상 오늘날에는 이러한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외에 어떠한 방법도 듣는 자가 복음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를 주님의 교회의 지체(Member)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복음은 누구에게도 들려질 수 없습니다.

 

6. 전도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사람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지만 그 주체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또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사실상 전하는 자는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15:16)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고후 2:12)

누가 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까? 바로 주님이십니다. 전하는 일은 구약시대에는 천사들이 했던 일입니다.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천사들의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전했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후 13:3)

그러므로 전하는 자는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명령을 받아서 증거 하는 것이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알아야 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것일 수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주님과의 교제를 해야 하며, 보다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하여 주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전도의 주체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7. 전도로 인한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된다.

 

바울의 전도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미 복음이 전해진 곳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모든 장소에서 교회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도시에서는 건물마다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이 말씀에 대하여는 불순종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15:20)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고후 10:16)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들을 순수한 주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단을 이루고, 정치 세력화 하고 있으며, 교리에 있어서도 심각할 정도로 훼손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주님의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미 복음이 전해 진 곳에는 더 이상 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는 자에 따라서 복음은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혼란을 겪을 것이 분명합니다. 같은 복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강조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교회들 간에 경쟁을 하게 될 수도 있으며, 나중에는 자신들의 교회가 진정한 주님의 교회라고 주장하며 다투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에 대하여 경계하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친절하고 문제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만일 같은 지역에 살면서 다른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을 만나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경계하고 멀리하려 할 것입니다. 물론 먼 지역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가까운 사람처럼 대하면서도 같은 지역의 다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처럼 원수같이 지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미리 경고하고 있습니다.

 

8. 전도는 명령이다.

 

전도가 명령이라는 사실은 이미 성경의 많은 곳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 주신 명령이 대부분 회중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바울이 복음 선포가 자신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선포의 명령은 바로 우리들 개인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자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1:3)

이것은 명령 이상의 또 하나의 의무를 포함합니다. 바울은 복음 선포의 임무가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명령이라는 것은 지키지 않았을 때의 결과들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명령을 받은 병사가 장교의 명령에 대하여 불순종한다면 그만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주님으로부터 대가가 치러질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순종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복종 시키고 있습니다.

말은 몸이 본래부터 불순종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가 혹시 육신을 따라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될까 하여 그의 몸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만일 육신을 따라 복음 전하는 일을 하다가도 그가 교만하여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며, 또한 교만해지게 된다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쓰시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쓰임 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구원 이외에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상을 바라는 자이며,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일을 사모했던 자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고, 많은 상을 얻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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