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1:5-7)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는 말이 서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지식이 내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면 절제는 행동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들에 대하여 자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며,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동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곧 지식과 절제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지식이 쌓이게 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들은 자신보다 무지한 사람들에 대해서 오만한 자세를 가지기 쉽고, 자칫 이러한 행동들은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실족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와도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에 대하여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곡식이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하며 사람들이 성숙해질수록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자 앞에서 무지한 자는 열등감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더욱 모욕감을 더하게 된다면 상대방은 좌절감과 더불어 수치심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당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매우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식이 있는 자에게는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에 대하여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혜롭게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령 상대방이 다리 한쪽이 없어 의족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만일 그에게 ‘저 사람은 다리 한 쪽이 없는 병신이야’라고 말한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게 될까요? 물론 상대방도 매우 충격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말을 한 자는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즉 정직하게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 말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만일 칼을 가진 자가 절제력이 없이 함부로 사람들에게 휘두른다면 많은 사람들은 상처를 입고 심지어 사망에 이를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은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의사와 같이 사람을 살리고, 훌륭한 요리사와 같이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식을 쌓아 갈수록 더 많은 절제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오늘날에는 더욱 많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탐구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을 탐구하는 일에 대하여 소홀히 해서도 안 되겠지만 지식을 쌓아갈수록 더욱 많은 절제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