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난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꾀한 꾀에 빠지게 하소서 그는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나이까 주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 여호와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편)
시편 10편은 다윗 혹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정의가 왜 더딘가, 왜 악인이 활개치고 의인은 고난받는가에 대한 탄식에서 시작하여,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공의로 응답하신다는 확신의 찬송으로 마무리되는 말씀입니다. 이 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깊은 울림을 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악한 자들은 교만하고, 가난한 자들은 억울하고, 세상은 하나님의 정의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편 10편은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얼마나 솔직하고, 깊은 신앙의 고백입니까? 이 구절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다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셔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 역시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주님, 왜 이러십니까?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이 탄식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하나님이 정의롭다는 신뢰 위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이어서 악인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난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악인은 겉으로는 잘 나가 보이고, 자기 꾀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압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그들이 자기가 꾀한 꾀에 빠지게 하소서.” 이는 단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간청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다면, 이 세상은 악인의 꾀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구합니다.
악인의 죄는 구체적으로 나열됩니다. “그는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며 멸시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 악의 뿌리가 욕심과 교만에서 비롯됨을 봅니다. 악인은 자기 힘으로 인생을 살아간다고 여기며, 하나님이 감찰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내 삶에 간섭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오늘날 세속적인 삶의 방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자신이 성공한 것이 자기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이 악인의 모습은 점점 더 선명해집니다. “그의 입은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가득하고 그의 혀 밑에는 재앙과 죄악이 있나이다.” 이는 단순히 나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삶 전체가 죄로 물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고, 폭력으로 사람을 억압합니다. 그의 삶의 방식은 악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다시 고백합니다. “주는 보셨나이다.” 여기에서 전환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보시고 계셨다’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세상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원한과 눈물을 기억하시고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감찰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손으로 갚으신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실행된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이는 하나님의 침묵을 깨워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손을 내리고 계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손을 다시 높이 들어 달라는 간청입니다. 이 땅의 억울한 자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보게 하시고, 악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그리고 마지막에 시편 기자는 확신의 선언으로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여호와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지금 당장 악인이 흥하는 것 같아도, 결국 이 땅의 통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그분의 통치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위해 심판하시며, 세상의 거만한 자들이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시편 10편의 탄식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고, 악한 자가 잘 되는 것 같고, 의로운 자는 고난받는 현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 현실 속에서 ‘주는 보셨나이다’라고 고백하며 믿음의 눈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감찰하고 계시며, 반드시 갚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공허한 외침이 아닙니다. 외로운 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악한 세상을 향한 분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향한 믿음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버림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억울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의로우신 왕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