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묵상을 시작하며
로마서와 더불어 가장 기본적인 교리들을 가르치고 있는 에베소서를 다루는 것은 매우 쉬운 듯 보이지만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성경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동안 망설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지금에서야 묵상할 수 있도록 글로 남길 수 있어서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에베소서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교리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3장에 걸쳐서 비교적 논리적이고 딱딱한 교리적인 내용들로 기록하고 있지만 후반 3장에 걸쳐서는 실생활과 매우 밀접한 내용들을 다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해주기 위한 책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매우 훌륭한 생활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에베소서는 역사적으로 정경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신학자나 목회자들에 의해서 확고하게 가장 믿을만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만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바른 믿음의 삶을 위한 나침반과 같은 성경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쪼록 이 에베소서를 묵상하는 동안 믿음의 삶이 더욱 견고해지는 경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이 묵상의 일차적인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소망하는 부족한 종에게도 깨닫는 지혜를 통하여 풍성한 은혜의 삶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에베소서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사도라는 직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복음 전도활동이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행26:16-18, 고전 9:1).
일반적으로 사도라는 직분은 주님께서 친히 임명하신 자(막 3 : 14), 요한의 세례(침례)으로부터 승천시까지 예수님와 동행한 자(행 1 : 21),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행 1 : 22) 등으로 보통 예수의 12제자만을 가리키는 칭호였는데 점차 그 개념이 확대되어 주께 직접 임명되지 않은 '바울'과 '바나바'(행 14 : 4, 14), '실루아노'(살전 2 : 6), '주의 형제 야고보'(고전 15:7;갈 1 . 19) 등도 '사도'라 불리워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라는 직분 그 자체는 단순히 사람들로부터 얻어지는 자질과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 소명이 주어졌느냐 하는 문제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날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모든 사역자들과 일반 성도들조차도 이 문제에 관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 “성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물론 가톨릭에서는 이 세상을 떠난 죽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부패된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매우 구별된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그들에 대하여 “신실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신뢰와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4:17, 벧전 5:12,요삼 1:5). 에베소의 성도들은 단순히 그들 자신의 머리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 성도들임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며 인사합니다. 이러한 인사 방법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롬1:7, 고전1:3, 고후1:2, 갈1:3, 빌1:2, 살전1:1, 살후1:2, 딤전1:2, 벧전1:2, 벧후1:2, 계1:5). 아마도 당시 초대교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인사법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처럼 축복의 인사가 앞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상대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먼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자세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먼저 축복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이웃들에 대하여 과연 축복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언제나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할 수 있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에베소서1:3)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우리가 찬송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고 명쾌하게 답해주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의 많은 곳들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의례적인 인사쯤으로 넘어가기 쉽지만 사실상 이 말씀 안에는 놀라운 비밀들이 숨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우리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매우 역사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머리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이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장 감사하면서도 찬양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뿐만이 아니라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복을 주시는 내용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복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복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물질적인 풍성함이나 건강, 가정의 화목과 형통한 삶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이러한 것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이 우리에게 임하는 경로들을 추적해 보면 매우 현실적인 삶을 추구하는 우리로서는 다소 실망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먼저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하늘의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하기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어떠한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감동 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행위가 있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실이 없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떠한 복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 편에서 바라볼 때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복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하늘의 처소에 속한 그 복은 영적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매우 간단하게 정리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물질과 명예와 권세와 같은 모든 것입니다. 먼저 하늘에 속한 것, 즉 영적인 것들을 소망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더욱 형통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택하사(에베소서1:4)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선택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이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논쟁을 벌여왔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들을 미리 구별해 주셨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그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여 심지어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획 자체를 무시하고 오직 우리의 의지로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가 우리 개개인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하나님의 경륜, 즉 모든 세대에 걸친 계획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종교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얻어보려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분명한 경고의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택에 대한 교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구원에 대한 계획은 철저히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그분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그분을 통하여 성취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많은 고민을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수없이 사탄으로부터 십자가를 피해가도록 하는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에 대하여 더욱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계획은 하나님이 세우셨으나 그 일을 순종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 일을 완벽하게 준비해 두셨으나, 순종의 몫은 우리에게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택을 계획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성경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을 살면서 우리는 결코 거룩해질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말에 대하여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하신 목적은 바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인생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으니 자신은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주권으로 자신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으니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그가 매우 큰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이며, 만일 구원을 받은 자라면 당연히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신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그분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한 구원과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예정하사(에베소서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미 앞에서 설명한 선택에 대한 교리와 여기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예정에 관한 교리는 바른 적용이 아니면 매우 혼란스러운 구절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향을 받고 있는 교리적 체계는 바로 칼빈의 5개 신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권위를 매우 높여드린다는 의미에서 긍적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매우 나태한 신앙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칼빈의 5대 신조에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와 영속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구원 얻을 자들을 예정해 두셨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시간적 개념이 아닌 개인의 구원에 적용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연 개인의 구원을 미리 정해 두셨다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하셨다면 성경은 사람들에게 믿으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할 시간조차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계는 주님의 계획과 의도대로 믿기로 정해진 자들만을 골라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과 더불어 그분의 나라를 건설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호소하기를 지금도 선택된 자들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후3:9). 우리는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 계획 가운데 창세 전에 예정하셨다는 의미는 개인 구원의 차원이 아닌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 구원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 사역을 직접 시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선택되어진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 자들을 아들로 삼으시려고 결정하셨음을 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영속에 관한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로봇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한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것에 대한 선택은 오직 자신에게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친구가 있는데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없이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관계라면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좋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 주님께 순종하고 때에 따라서 깊은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정하셨다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그분께서 지옥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미리 준비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신다는 그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 즉 주님으로 불렀던 것과는 달리 신약 성도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래 죄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자녀됨의 의미는 법적 용어로 양자로서 입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양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양자됨의 의미가 단순히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 이상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롬 8:15; 갈 4:5). 우리가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모든 삶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활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함께 호흡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픔을 같이 나누고, 기쁠 때 함께 웃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그분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더욱 행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자가 된다는 점입니다(롬 8:17).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조만간 불로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 우리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아들의 신분이 된 우리는 그분의 나라에 상속자가 되어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엄청난 상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의 모습도 달라질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처음부터 완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롬 8:29).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그분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될 것입니다. 앞 서 말했듯이 구약 성도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여호와, 즉 주님으로 부름으로서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을 사는 우리는 아버지로 부름으로서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구원의 안전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분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실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방종해도 괜찮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보다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에베소서1:6)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매우 간결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목적에 관하여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데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더욱 분명하게 목적하고 있는 것은 죄인인 인간의 찬양을 받으시고자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단순히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너무도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대하여 엄청난 죄 가운데 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의 초기 인류의 역사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자들이었지만 죄악이 극도에 달해 결국 노아의 시대에 멸망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노아의 시대 이후로도 그들은 바벨탑을 지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구원하고자 했으며, 하나님에 의하여 언어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 이후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친히 나타나셔서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였지만 결과는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신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여전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심을 보여주고 계시며, 특히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참으심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벧후3:9,15).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그분에게로 오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원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경로로 우리에게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이 복음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은혜의 통로는 세상에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오직 단 한 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대가 악해질수록 사람들은 구원의 경로가 다양하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거짓 선생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들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복음을 종교로 둔갑시켜, 오직 사람들의 의지가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일들에 어떠한 공로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만드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이 풍성한 은혜에 관하여는 성경의 여러 곳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엡1:18,2:7,3:16,롬2:4;9:23, 빌4:19, 골1:27). 이러한 표현이 자주 사용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완전한 죄 사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넉넉히 은혜로운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매우 풍성하여 넘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 풍성한 은혜를 따라 주어지는 구속, 곧 죄들의 사함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먼저 구속이라는 의미는 노예, 즉 종들이 자유를 얻거나 죄수들이 석방되기 위하여 돈을 지불하는 속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노예(종)나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으며, 구속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자유케 하기 위하여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드려 값을 치루셨습니다. 사람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만을 기억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우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은 삼십에 팔리심으로서 값을 치르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구속을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는 구속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에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만나고 있는 구속은 바로 죄인의 신분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구속의 의미를 포함합니다(롬3:24, 고전1:30, 골 1:14).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치루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양자로 삼으셔서 자녀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놀라운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우리가 만나게 되는 구속은 더욱 놀랍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건져내고 장차 다가 올 천년왕국,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엡1;14절, 4:30, 눅21:28, 롬8:23).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의지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닌 오직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현재 죄 가운데서 멸망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이 죄의 자리에 서서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라면 주님이 주시는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할만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며, 이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엡1:8)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하나님을 통하여 얻는 선물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을 감격스러워 하며, 만족하고 살아가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죄의 유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 죄의 유혹으로부터 이겨낼 힘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죄를 이길 힘이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이 죄에 대하여 분별할 능력조차 가지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지혜와 총명(분별)을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지혜와 총명(분별)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은혜 안에서 공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초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게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났다는 표현은 곧 영적으로 갓난 아이가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이 아이는 어떤 형태로든 자라나야 합니다. 물론 유아기 때에는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부모의 손 아래서 자랍니다. 이것은 초신자가 사역자나 주변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영향을 받아서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자라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도 스스로 깨닫고 판단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사람이 성숙해 지면서 지혜와 분별의 능력을 더해가듯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은 믿음의 성숙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물들 가운데 지혜와 총명(분별)을 넘치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거짓 선생과 선지자들의 유혹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사탄의 노예가 되어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세상 밖으로 던져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분별)은 단순히 세상의 지식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책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과 조합되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말과 행동이 필요한지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우리의 머리에 담겨져 있는 것이라면 지혜와 총명(분별)은 우리의 생활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감스러운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한 지혜와 총명(분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사는 것과 유사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시행착오와 고통을 통하여 성숙해지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와 아픔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성숙해져 가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은혜 안에서 지혜와 총명(분별)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엡1:9~10)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분별)을 주신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비에 속한 것으로 그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 계획의 마지막은 민족과 국가, 빈부나 신분에 관계없이 구원받은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이해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 안에서 충성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에 걸쳐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지금도 여전히 그 계획을 믿는 우리들을 통해서 실현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모든 일들이 진행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개인의 구원 문제와 연관시켜서 한 사람의 구원조차도 예정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에 걸쳐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충만한 때의 경륜, 즉 주님의 날에 이르게 되었을 때 천사들을 포함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하나로 모아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로 모은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자들이 종종 사용하기 좋아하는 단어인데,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말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욱 발전하여 다원주의자들과 손잡고 모든 종교가 하나라고 외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현혹되기 좋은 말입니다. 그들은 현재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우상들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틀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그것은 주의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지금 유대인들과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는 우리와 약간의 교리적 차이에도 서로 분리되고 분쟁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성경 안에서 하나가 되기보다는 자신들만의 교리를 따라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이고 파당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주님의 오심을 고대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의 날에 비로소 믿는 모든 자들이 하나가 되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바라고 있습니까?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1~12)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 대한 구원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날 때부터 구원을 얻을 자와 지옥에 갈 자들을 구별해 놓으셨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하는 어떤 이들을 위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준비된 구원의 계획안으로 들어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그분 안에서 영광스러운 날에 함께 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 영광스러운 날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에게 상속 유업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기업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업의 본래 주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것을 입양된 자신의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기업은 결코 나누어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보심을 통하여 안전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상속유업을 주시는 목적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 이상의 어떤 목적을 덧붙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시지도 않으며, 결코 연약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에 충만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다 채우시고도 남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속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통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초신자들에게도 헌금을 강요하고, 각종 봉사활동이나, 다양한 헌신들을 통하여 상속 유업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매우 어리석은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의 분수에 맞게 행할 수 있어야 하며(롬12:3), 오직 믿음을 통하여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찬양을 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것과 같은 의식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이러한 의식이 중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에 따르는 신실한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의식들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혀 덕스럽지 못한 행위들을 일삼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외식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왕국의 속한 자들로서, 또한 그분의 자녀로서 모든 일에 품위 있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1:13~1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복음이 더 이상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상은 바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더 큰 의미에서는 이방인들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졌듯이, 이방인들에게는 진리의 말씀, 즉 구원의 복음이 주어졌습니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에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을 제시함에 있어서 특별한 표적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고, 병 고침을 받고, 세례(침례)나 만찬과 같은 각종 의식들이나 특별한 체험들이 구원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진리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머리에 기억되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반드시 믿어야만 합니다. 이 믿음의 행위는 영접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는 그분 안에서 거룩하신 영, 즉 성령으로 봉인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봉인되는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녀, 즉 양자로서의 신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 대하여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결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나라에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일이 있기 전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즉 값 주고 사신 소유물이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은 그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서 더 이상 믿는 우리에게 죄 값이 전가되지 않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는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그분의 자녀로서의 삶을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보증”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업적으로 거래를 할 때 보증인을 두고 거액의 돈이나 특혜를 받는 경우를 봅니다. “보증”은 일반적으로 어떤 계약을 할 때 확실하게 보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을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받을 상속 유업의 보증이 된다는 의미는 우리가 장차 부활하게 될 터인데, 그 증거들을 거룩하신 영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안에 두시고 확신하며 살아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장차 영광스러운 날들을 바라고, 그 날들을 주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감사함으로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머지않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영광스러운 날들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엡1:15~16)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함에 관한 논쟁은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논쟁은 구원의 문제까지 연결하여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고 주장을 하는가 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 때문에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을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행위구원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구절을 통하여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라는 표현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서 이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일하게 활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는 약속의 말씀대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문제와는 관계없이 그들은 서로가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가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신분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연히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그들에 대하여 기도할 때에 이 일들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매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인정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에베소 성도들의 자랑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마귀들의 활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 곳에서 수많은 거짓 전도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그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리되고, 분별력 있는 삶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가령 오늘날 서로 다른 내용의 성경이 얼마나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이방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의식들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고, 어떤 이들은 지식으로 복음을 이해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리된 삶을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헌금과 봉사, 주일성수와 같은 것들을 충실하게 행하면 구원받을 것처럼 말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교회나 목사가 구원을 대신해 주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워낙 교묘한 사탄의 속임수에 많은 이들이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형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칭찬을 받을만한 것입니다. 그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러한 기초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은 오히려 경계해야만 합니다. 전통이라는 고정관념이 자신을 가두고, 단순한 열정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모습들은 특히 조심해야 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분에 대하여 알고 믿으며 순종하는 자세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엡1:17)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식만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는 단어의 의미가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개인적인 친분을 통하여 얻어지는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가 한 나라의 왕에 대하여 안다고 말할 때, 일반적으로는 그의 이름과 업적들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성경적인 의미로는 그와 접촉하고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 대하여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결코 공부를 통하여 지식을 가진 것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단순히 공부를 통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방법을 따라 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말하며(엡1:8,3:10,5:15), 계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비밀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것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 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3:16). 이 기록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분으로부터 온 영을 통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만 비교되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3). 우리의 내면에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 없다면 그분께서 친히 기록하신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거짓 영, 즉 마귀의 영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고,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데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넓은 길로 인도하며 십자가의 도를 멸시하는 자입니다. 오직 육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걸어야할 고난의 길을 피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안에서 사는 자들은 오직 그분의 명령,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모든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된 말씀이 인도 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때로는 그 길이 험난하고 고달플지라도 인내하면서 걸어갑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길이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소망이 우리 안에서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 안에서 사는 자는 오늘보다 미래가 더욱 행복한 꿈을 꾸는 자입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엡1:18~19)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눈(the eyes of your heart)은 지각의 눈(The eyes of your understanding)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로 KJV성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경들이 마음의 눈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칫 신앙상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나오는 마음의 눈을 밝힘으로서 오는 결과들에 대하여 성경이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그분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각의 의미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이해를 하는 것에 비중을 두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마음은 감정에 의해서 좌우되는 성질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서 전혀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듣고 믿음으로 알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마음, 즉 느낌으로 알게 될 것인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롬10:17)오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느낌과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얻어지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 말씀의 중요성은 몇 번이고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오늘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감정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달콤한 설교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가 움직여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진리의 내용보다는 그들의 무리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기적들을 더욱 신뢰하며, 자신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많은 지식들에 대하여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보다는 병자 하나가 자신의 눈 앞에서 치유되는 것을 더욱 신뢰하며, 제 아무리 훌륭한 성경 구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면 그것은 결코 진리로 간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손에 성경은 들었지만 그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표적에만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만일 자신의 신앙을 감정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미 사탄의 계획 아래 훈련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없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그분의 말씀 안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들과 참 목자들을 통하여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전달은 당연히 듣는 이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우리가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이유들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감정에 의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를 탐구하는데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0~22)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는 일에 대한 특별한 사역은 바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심으로 이미 죽음 가운데 놓여진 백성들을 살리시고자 하는데 있으며, 하늘의 처소들에서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심으로서 그리스도를 만물의 주인으로, 즉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이 일들을 지금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지고 있으며, 영원히 지속될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느 위치에 두셨는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사와 권능과 강력과 통치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리는 모든 이름보다 훨씬 위에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분의 발아래 두시며 그분을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사와 권능, 강력과 통치라는 단어는 현재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들, 즉 사탄과 마귀, 천사와 스랍과 그룹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당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향을 주고 있었던 영지주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것들보다 위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과 그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아래 두셨습니다. 그분은 현재도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도 여전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 제 아무리 탁월한 존재가 있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 위의 머리가 되신 분이십니다. 모든 세상은 그분의 말씀에 따라 복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관계없이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주를 포함한 온 세상은 그분의 말씀에 복종해야한 하며,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와 생명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를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유대인들의 손을 벗어나 이방인에게로 넘어오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들을 펼쳐 가십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의 머리로 그리스도를 두셨으며, 구원의 계획들을 완성해 가고자 하십니다. 이 교회는 감추어졌던 것이지만 이제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드러내고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들을 완성해 가고자 하십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계획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이제는 친히 그분의 통치 아래 주님의 교회가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사람들이 모여 교제하고 즐기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이 친히 다스리고, 계획하며, 장차 다가 올 세상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나의 생각과 계획, 그리고 나의 신념을 나누는 교회가 아닌 주님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순종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위해서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우리가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누구의 소유인가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관이 변질된 상황에서 이 문제를 먼저 이해하지 않게 된다면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의 주변에서 성행하고 있는 교회 매매 현상이라든가, 한 개인이 교회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과 같은 문제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교회가 그분의 몸이라는 사실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곳으로부터 교회가 주님의 소유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값을 치루고 사신 것입니다(행20:28,벧전1:18,19). 비록 교회가 특정한 사람의 희생으로 세워지고, 또한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성장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정상적인 교회라면 결코 그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여전히 소유를 주장한다면 그는 삯군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는 결코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소유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알게 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세워두셨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목사, 성경교사, 집사와 같은 직분을 가지고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질서를 세워가는데 매우 유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교회는 사람들의 가르침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어 세워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가르치는 자들의 말들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지를 점검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행17:11). 이것은 특히 현대교회와 같이 변개된 진리가 성행하는 상황에서 더욱 필요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가 듣고 행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는 구절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충만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치 교회가 주님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거나, 혹은 단순히 주님의 충만하심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주님의 교회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그분의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누리게 될 모든 풍성함과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 모든 것을 두셨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일지라도 그분의 교회를 떠나서는 풍성한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영적으로 더욱 궁핍한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건물이 아닌, 그리고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교회가 아닌 오직 주님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으로 충만한 삶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더욱 신실한 삶을 경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매우 예민하면서도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많은 곳을 통하여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많은 시간동안 혼란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먼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사망, 즉 죽음의 원인이 허물(범죄, 불순종)과 죄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죄의 뿌리는 아담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담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여전히 죄 가운데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죄의 속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매순간 그 죄로 인해 수많은 죄들을 저지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일들은 결국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죄들로 인해 우리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망하지 않는 것은 이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죄의 문제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 같은 행위로 된 것이 아니며, 오직 은혜로만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그분으로 인하여 의인의 신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죄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이미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를 짓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자신의 죄들(sins)을 자백하고 용서함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요일1:9).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모든 죄를 사해주셨으니, 더 이상 죄 문제로 인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조차 용서해 주셨으니 어떠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언제나 죄의 유혹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죄의 뿌리는 언제나 살아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 들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육신과 성령님이 서로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갈5:17). 그러나 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죄로 인한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의 용서가 있었고, 우리는 구원받게 되었으며, 우리의 신분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나간 때에는(엡2:2)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지나간 때, 즉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본문은 크게 두 가지의 모습으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걷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의 모습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이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걷는 모습을 통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결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 자신의 의지로 세상의 유혹을 따라 걷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특별하게 지도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세상은 언제나 물질과 명예, 권세와 같은 것들에 기준을 두고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길들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손가락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회개라는 말은 돌이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의 행로, 즉 길을 따라 걸어가다 다시 돌이키고 좁은 길,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순종의 자녀들과 같이 세상의 길을 걷고 있다면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결단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공중 권세를 잡은 통치자, 즉 사탄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탄은 인류의 창조 이후로 지금까지 그 활동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는 누구라도 사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르는 길들을 방해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통을 안겨다 주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입양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사탄의 권세를 능히 이길 수 있는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입니다. 사탄의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공격이 지속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승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불순종의 자녀들은 여전히 죄의 열매를 맺고 있으며, 사탄의 지배아래서 그들이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속히 회개하여 구원의 자리에 참여할 필요가 있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세상을 따라 살며, 사탄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주님의 구원하심에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입술을 열어 구원함으로 믿음의 길로 걸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2:3-5)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기 전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어떤 이들은 도덕적인 의로움만을 믿고 자신이 순수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은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 전에는 모두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진노의 자녀들,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은 육신의 욕심 안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그의 삶을 설계하고, 그들의 육신이 즐거워하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요약하여 설명한다면 성령 안에서 사는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며(갈5:19-20),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롬8:8).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 행한 모든 일들이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예정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은 이미 지옥에 던져지기로 예정된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갓난 아이일지라도 이미 진노의 대상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억측스러운 주장입니다. 이 진노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좀 더 풀어서 해석한다면 진노를 받기에 마땅한 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진노의 대상이 된 것은 본래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육신의 욕심을 따라 이 세상을 살면서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죄로부터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진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하시며(롬 1:18;2:5,8),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그 죄에 대하여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이지 사람들을 무조건 심판의 대상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죄 가운데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거룩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사랑으로 진노의 자녀들을 품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노력이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어진 선물입니다. 이 일을 주도하신 것도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구원의 길에 도달하려고 힘썼습니다. 가령 바벨탑과 같은 것은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심판으로부터 안전해지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입니다.
어디에도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속지 마십시오. 구원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도 않으며, 노력으로 얻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주어지며,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2:6~7)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그분 자신의 영광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하여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누시고자 하는 영적인 의미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또 함께 일으키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과 더불어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약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셨지만 그 사건은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여전히, 매일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놀라운 사건은 신분이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속하는 순간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생활권이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게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빌3:20). 이는 복음의 위대함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종교가 이 땅에서 누리게 될 풍성한 삶을 약속하고 있지만 복음은 하늘에 속한 신분을 가진 자로서 이 땅에서 얻게 될 복과 관계없이 장차 하늘에서 얻게 될 보상을 생각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더욱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땀을 흘립니다. 그들은 돈과 명예, 권세와 지식을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서 시간들을 투자하고, 자신들의 종교에 기대어 갈급한 마음으로 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할뿐더러 만일 얻었다 할지라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고백한 것과 같이 인생을 헛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것은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경험하게 될 놀라운 은혜는 다가오는 시대에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되짚어 보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난과 핍박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으로부터 오는 환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을 미워하고 있으며,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사람들까지도 유혹하여 죄 가운데 던져 넣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소망이 오직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장차 다가 올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 가운데 놓인 자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은 지옥으로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엡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구절은 은혜와 율법을 대표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은혜가 믿음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은혜만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얻게 되는 조건으로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일방적으로 은혜를 강조함으로서 믿음 없이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가령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장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모든 상황들이 선물로 주셨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가지는 특징은 그들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행위의 기본은 선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인 완전함과 구제나 선행을 통하여 자신들의 구원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더 이상 깨끗하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산으로 올라가고, 어떤 이들은 선행을 쌓아서 더러워진 육신의 죄들을 씻어내겠다고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며,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에게 종교인으로서 매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비난을 하거나 정죄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심과 헌신에 대하여 존경스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구원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일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결코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교인들의 선행에 대하여 마냥 칭찬만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구원과 연관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그들의 행동이 결코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완성되어진 것이었으며, 다만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기로 약속된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하시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인생을 자랑합니다(요일2:16). 만일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 당연히 그들은 자랑을 하려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게 될 것이며, 자칫 하나님을 대적하려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철저히 구원을 길을 공의로우시면서 완전하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차별이 없으시며, 또한 그분을 믿는 누구든지 은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보다 풍성한 삶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2:10)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 가운데 최초의 작품은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soul)이 되었는데(창2:7), 그가 바로 아담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몸이 만들어지고, 생명의 숨, 곧 영이 그 몸에 불어넣어 짐으로 살아 있는 혼을 갖게 된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소개하고 있는데(고전15:45),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첫 번째 아담과는 차별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도 역시 그 분, 즉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2:9)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세상 속에서 무리 속에 섞여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백성으로서 특별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들이 새로운 창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선한 행위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의인이 되었으며, 결코 지옥으로 가게 될 일은 없게 되었으니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한 행실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기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방인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이 볼 때 정직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딛2:14). 주님은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계십니다(빌2:13). 만일 우리가 선한 행위를 거절하고, 여전히 육신적이며, 부도덕하며, 죄와 상관하고 있다면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주님의 요구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그들은 넘어지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구원이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심각한 죄에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주님께 고백함으로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요일1:9). 그러나 만일 그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는 매우 위험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양심에 대하여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창조 목적에 맞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1-13)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이미 분리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을 분리된 사람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본다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분리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을 때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곧 아담과 가인으로 이어지는 범죄는 결국 에덴으로부터 분리된 그들이 더 이상 회복 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과 장차 다가 올 세상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주인은 바로 그리스도인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옥의 형벌에 던져질 사람들이 대부분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잠시 동안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분리되어진 것은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며, 오히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분리되어진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즉 분리되어진 자들을 다시 그분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라는 단어의 의미가 “'밖으로'라는 뜻의 에크(ek)와 '부르다'라는 뜻의 클레시아(klesia)의 합성어로 지난날 살던 곳에서 불려나와 새로운 현실로 함께 부름 받은 사람”을 가르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명백해 집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은혜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며, 이 공간은 마치 에덴에 아담을 두신 것과 같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교회가 사회봉사의 일을 하고, 교제나 선한 일을 하는 공동체쯤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어떤 대상과 친구가 되거나 사람을 고용하듯 종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매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난 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양자라는 말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들이 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 통로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이어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즉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로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고 있는 모든 시간동안 그들은 모든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합니까?
그분은 우리의 화평(엡2:14~15)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율법을 폐하시고, 화평을 이루시는 장면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완성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것이기도 하며(요17:5,엡1:4),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으로 완성되어진 것입니다(마26:39,막14:36,눅22:42).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와 화평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화평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분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그것도 틀린 대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하나님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증명이 되었고, 그 사실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며, 아직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하나님과 화평함으로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매우 거룩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정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명령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각종 죄에 대하여 규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율법 자체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오히려 하나님께 향하는데 있어서 중간 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율법을 육체로 없애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해질 수 있습니다.
화평과 관련하여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도 화평함을 좇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히12:14). 또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롬5:1). 환난의 때가 오게 되면 마귀는 땅에서 화평을 제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계6:4). 왜냐하면 모든 분쟁과 다툼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화평함을 추구합니다. 화평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의로움에 대하여 말하면서 분쟁을 주도합니다. 그들의 투쟁은 매우 선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분쟁이나 다툼을 통해서 그분의 의를 드러내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화평함으로 서로가 하나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에 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매우 단순하게 이해합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형틀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틀에서 생각해 보면 전혀 틀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피를 쏟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까닭에 십자가의 사건은 성경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십자가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건은 더욱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율법”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 안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는 사도신경에 의하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가 죽이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바로 어린 양, 즉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1:29).
이 희생 제물을 잡아 피를 뿌릴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제사장에게만 있습니다. 그 까닭에 성경은 그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마16:21,눅9:22). 이러한 면에서 보면 율법은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만을 두고 볼 때 율법은 예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율법의 역할은 결국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정하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처음부터 사람들과 율법의 관계는 결국 원수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율법은 예수님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원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비로소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해결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더불어 율법도 죽고, 그것이 결국 그분을 믿는 우리와 한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 또한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롬6:6).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더불어, 율법과 우리, 즉 옛 사람이 모두 죽음으로서 결국에는 한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일까요? 십자가의 사건은 결국 화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들이 먼저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히 모든 사람들과 화해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한 영을 가진 신자들은 세상과 분명하게 분리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라도 지옥에 던져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기도 하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품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엡2:17~22)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일차적인 목적은 화평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화평과 다음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화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선포하기를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한 성령님을 통하여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행1:3-8).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매우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사실상 성령의 활동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한데 가장 큰 목적이 있으며, 이러한 접근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서로 동료 시민이자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가족으로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의 몸을 완성해 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분 안에서” 완성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몸, 즉 주님의 교회를 형성해 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모퉁이 돌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보여지는 모습으로 있겠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건물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만일 모퉁이 돌이 부실하게 도니다면 건물이 붕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단순히 건물과 사람들의 모임으로 세워질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속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자, 기초가 되시는 분이심을 알고 다시 회복할 필요가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지 않는 교회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를 세워가는 모든 과정 역시 모든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바른 교리위에 세워져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딤전4:16,딛2:1). 일반적으로 교리는 답답하고, 실생활에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잘못된 교리들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바른 교리가 세워졌을 때 건물은 튼튼하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리가 건전한 교리입니까? 당연히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교리들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전통이 혼합된 교리는 결코 훌륭한 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교리들은 과연 오직 그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워진 교리인지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삶은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믿음의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다면 그는 거룩한 삶, 즉 성결한 삶의 본을 보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분,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마지막 때에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시간동안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을 때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처럼 성도 개개인의 거룩한 삶이 모여서 하나의 건물을 완성해 갈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분 안에서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과정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교회는 함께 세워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있고,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환경이 만들어 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삶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로서 온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믿는 성도들과 함께 완성해 가는 건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엡3:1~7)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에 관한 논쟁은 오랜 역사를 통해 있어왔던 논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논쟁의 핵심을 논할 때 교회의 시작과 연관 지어 설명하려 합니다. 일부 극단적 세대주의 자들은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시작이 바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반대로 이미 교회는 아담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모두 벗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와 경륜을 통한 비밀은 복음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논쟁에 대하여 마침표를 찍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 비밀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계획을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말하면서 일반적으로 구원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율법시대의 유대인들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이 오직 자신들의 민족들에게 국한 된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이웃 백성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조차도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모든 이방 백성들을 구원하시는데 있었습니다.
그분의 소원은 단순히 이방인들의 구원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료 상속자가 되고 같은 몸에 속하게 되며 그분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이는 복음이 가지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온전히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대인들 스스로를 고립시켰고(때로는 그것이 분리라는 이름으로 선하게 이용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대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단 복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누구든지 동일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엡2:19). 그것은 복음이 가지는 놀라운 힘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경우를 목격합니다. 자신들의 교리나 신념에 따라서 분리하는 것이 매우 신실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종 이단이나, 거짓 선생들로 분리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빈부나 지식의 많고 적음, 그리고 신분에 관계없이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 대하여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취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를 구분 짓는 이들이 주님이 아니라 믿음 안에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사역자가 된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의 뛰어난 재능과 배경이 위대한 사역자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고백하는 말에 의하면 그것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배설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빌3:4-9). 그가 복음 전도자로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복음이 자기 안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전도자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오직 복음의 능력을 통하여 활동하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13)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주께서는 바울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을 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교회입니다. 주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세워가는 일들을 바울을 통해서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바울은 이방인의 사역자로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위해서 사용되었던 사역자입니다(행9:15). 그는 이 일들을 훌륭하게 감당했고, 오늘날 성경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를 세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과 교회의 신비에 관하여 말하기에 앞서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자들에게 그분의 일을 맡기실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 해답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받는 자였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의 헌신에 의해 세워졌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는 최소한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내세우고 자랑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모든 성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말합니다. 어찌보면 그의 겸손은 지나칠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에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었던 힘이 바로 그의 고백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주님의 교회가 성장하기도 하고, 침체되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기도 하지만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능력 있는 바울이라도 그의 사역이 언제나 좋은 열매만을 가져왔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많은 장소에서 실패를 경험해야 했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놀라운 결과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종합해 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결국에는 자신이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딤후2:20-21).
그는 자신이 바르게 쓰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그는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고민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롬8:26,고후13:9,빌3:4-9). 그렇습니다.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일을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당하는 환난들을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에게 낙심하지 말도록 권면합니다. 그는 이 환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환난이 성도들을 위한 것이고, 또한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것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기 위해 심지어 목숨을 잃는 상황이 있었지만 오늘날 그 모든 것들은 영광스러운 것들로 남아있습니다. 만일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주님의 교회는 믿음의 삶에 충분한 가치를 전달해 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육체, 죽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롬16:4,빌2:30,살전2:8).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 또한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3:16). 바울의 낮아짐과 희생의 사랑은 주님께서 그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시도록 하는 자세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바울과 같이 철저히 낮아지고, 희생의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엡3:14-21)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기 단순히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로 소개되고 있는 구절에 KJV 성경은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표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겉으로 볼 때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 하나님이 모든 자들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아버지가 “마귀”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마8:44,요일3:10). 구원의 방법이 다양하다고 주장하는 다원주의자들에게는 각 족속, 즉 모든 자들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매우 반가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외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는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하시는 일들입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계시게 하십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을 사는 동안 행복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들은 많은 물질과 명예, 그리고 권세나 지식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기 고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속사람, 즉 마음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닮은 속성으로 변해가기를 소망하십니다. 심지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거하시도록 하시기를 힘쓰고 계십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풍성한 삶을 사는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겸손하고 온유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쓰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소원하시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 안에서 다양한 방법들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며, 터를 잡아 성도와 더불어 깨달아 가고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삶의 모든 기초가 사랑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는 최종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번 구원을 받게 된다면 그것이 결코 취소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더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더해져야만 합니다.
신앙은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반드시 성장하게 됩니다. 만일 성장을 멈추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기형적인 형태가 되고 말 것이고, 식물은 열매 없는 것으로 남겨져서 결국에는 주인의 손에 의해 뽑혀 버릴 것입니다. 즉 성장하지 못한다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성장은 언젠가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채워가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정신적으로도 성장해가듯이 신앙의 성장도 겉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지속적인 성장을 계속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라는 공간은 단순히 모이기만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또한 개인의 성장을 이루며, 나아가서는 모든 시대에 주님의 뜻을 바르게 세워가는 곳이 되어야만 합니다. 즉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실만한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결코 부끄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엡4:1~3)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이 글을 기록할 당시 로마의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갇힌 자가 되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앞부분(1~3장)에서는 주로 교리적인 측면을 말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기록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교리적인 가르침과 실행에 관한 내용이 거의 대등하게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균형 있게 기록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한 믿음의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식만으로 건강해질 수 없으며, 또한 지식이 없이 행함으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식과 행함에 있어서 균형 있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행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에 대하여 먼저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의 신분이 더 이상 이 땅에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 있는 삶을 살도록 하라는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형통함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많은 욕심으로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내버리고 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즉 품위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많은 돈을 벌고,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이라면 훌륭한 부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건강하고, 건전하며, 그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부모로서 매우 만족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많은 헌금과 봉사, 그리고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 없이 덕을 세우며, 경건하고 그 안에서 만족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을 때 가장 기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내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내는 용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바울의 이 권면은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지금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혀 있으며, 곧 사형을 당할 처지에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내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용서에 대하여 매우 인색합니다. 자신의 잘 못을 생각하거나 혹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남들이 사람들의 허점들을 지적하거나 비방을 하게 되면 덩달아 동조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모욕을 주는 사람에게는 어찌되었든 보복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경계해야할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마음 안에 겸손함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기도 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제 한 가지 더 소개하고 있는 것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교회를 찾는 모든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개성과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기업들이나, 학교와 같은 공동체들은 그들만의 방법(돈, 지식, 명예)으로 사람들을 묶어둡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서 어떤 것도 제공해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핍박을 받는 일입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방법은 세상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신자들, 즉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들과 매우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깨닫게도 하시며, 또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뜻을 따라 살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어주시는 역할을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거부하게 된다면 결코 교회 안에서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인내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안전만을 믿고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갈 수 없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성장해야 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시기를 바랍니다.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4:4~6)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 됨에 관하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수많은 분열을 경험하고 있으며, 분리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단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이 세상, 즉 육신의 정욕들로부터 분리에서 그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분열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 됨에 대한 강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깊게 들어야만 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한 몸,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침례) 아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여 설명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서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한 하나님 아래서 하나가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 안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결코 따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이며, 또한 그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한 하나님 안에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따로 나눌 수 없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교회와 관련하여 우주적인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역교회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모두가 하나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에큐메니컬 운동이 지극히 성경적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에베소 교회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즉 이 편지의 수신자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한 몸이며, 한 성령, 한 믿음, 한 세례(침례) 안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서로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이 서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한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한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 많은 분쟁과 다툼이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와 같은 곳은 파당이 나뉘어 서로가 다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몸의 지체들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면 그것은 곧 자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의 성도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 올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모든 교회, 즉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명령 아래 놓여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자신의 의지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웅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영광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실한 주님의 교회는 오직 한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되어지고, 온전히 하나 된 모습을 보이는 교회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엡4:7~10)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 안의 성도들이 착각하고 있는 사실 중에 하나는 그들 자신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곧 그들이 자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안에서 믿음이 자라거나 그리스도의 선물(은사)의 분량을 채워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만 하고, 그 이후에는 그것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들은 이미 달란트의 비유(마25:14-30)나 므나의 비유(눅19:12-28)를 통해서 경고한 것과 같이 악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믿음에도 분량이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롬12:3).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나 신념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나 전도, 봉사와 같은 행위로 믿음이 더욱 성숙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맞는 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자면 정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나 전도, 그리고 봉사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신실하게 임했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량의 문제는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이 모두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일한 기준 아래서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모두 같은 모습일 수 없듯이 믿음의 분량은 성도들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모두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서로 다른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즉 모두가 같은 선물로 봉사하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일한 선물을 가지고 봉사를 하게 되더라도 그들이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통해 놀라운 능력을 보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무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이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만일 모두가 같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마치 팔에게 다리의 역할을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교회 안의 성도들이 서로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다른 이들은 무시하거나 조롱하려 한다면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서로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선물들에 대하여 채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훈련하고 연단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동일한 모습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안정적이고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며, 더 나은 모습으로 주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를 낳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과 같이 성장하고,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지속적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선물로 채워가고 있는지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엡4:11~12)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은사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봉사를 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이 말은 곧 교회 안의 성도들이 같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모든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것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의 구조에서 팔이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눈이 입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몸과 같아서 각기 다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서로 존중받아야만 합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은사를 갖도록 하신 것은 먼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몸의 구조가 모두 팔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눈과 코와 입만으로는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기능들을 가진 지체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어서 완전한 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 여러 가지의 은사들을 가진 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봉사를 하게 될 때 완전한 몸, 즉 완전한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종교가 요구하는 것은 획일적인 신앙입니다. 그들은 많은 기도와 봉사, 그리고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매우 훌륭하게 보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다양함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각각 다른 사람들로 만드신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며 하나의 몸을 완성해 가는 것이 바로 성경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각자 다른 은사들을 주신 또 하나의 이유는 “섬기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몸의 지체들이 모두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상대방이 도움이 필요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곧 상대방과 내가 가진 은사들이 다를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있는 자들은 상대방을 지켜 볼 필요가 있는 자들입니다. 이 말은 곧 그가 나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상대방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자신이 가진 은사들은 철저히 섬기는 일들을 위해서 기꺼이 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때로 훌륭한 은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자제시키려는 자들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들의 은사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은사들이 주어진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자신을 위해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세상에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주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초보적이며, 유아적인 믿음의 모습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기만을 생각한다면 그는 결혼을 할 이유도 없으며, 자녀를 가질 필요가 없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면서 즐기는 인생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살지 않습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일들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을 갖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많은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헌신이 요구되는 것은 그 속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했다면 주님의 교회를 위해 더욱 헌신해서 온전한 주님의 몸을 세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람이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나와 성장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이후로 성장해야 합니다. 사람의 성장이 자연스러운 것이듯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성장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성경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버림받은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고후13:5). 물론 이 구절을 구원과 연관 지어 설명하게 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여부와 관계없이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입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구원을 받은 자이겠지만 때로는 구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며 사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즉 기형적인 상태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는 정상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부모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즉 어린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으며, 수동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들의 눈에 좋은 대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하고, 만족할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해로운 것들입니다. 자칫 커다란 올무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성장하지 않은 상태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보기 좋은 것이 신앙적으로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병 고침을 받고, 기적을 경험하며, 물질적인 복을 얻게 되면 그것이 곧 믿음의 승리가 주는 결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들은 오히려 믿음의 삶에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을 보십시오. 오히려 온유하고 겸손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교만해지는 경우들을 더욱 많이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숙한 믿음의 모양들은 결코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 , 즉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를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은 매우 정의롭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나 계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젊은이들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이 옳은 것이라면 젊은이들은 그 일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매우 옳은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정의로움의 이면에는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충돌하고, 결국에는 시위와 폭력으로 끝내는 경우들을 목격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정의로운 편에 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사랑이 기초가 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아픔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의 목적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몸이십니다. 몸인 교회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신의 의지나 신념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그리스도 아래 두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순종할 마음의 자세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 아래 믿음의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되지 않고는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알 수 없듯이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성숙한 믿음의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며, 바르게 양육 받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를 세우느니라(엡4:16)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구절 안에는 거듭난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무교회주의자들이나. 지역교회를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실상 이 구절이 크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구절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즉 모두가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받으면 모두가 같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믿음이 분량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2:3,고후10:13,15). 이것은 교회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어른들의 일을 하도록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아이가 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도들을 분별해서 그들에 맞는 위치에서 가르치고 바르게 양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을 때 자녀들이 혼란을 겪게 되듯이 올바른 분별이 없는 상태에서 성도들을 양육하게 된다면 교회는 혼란이 끊이질 않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성도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심각한 염려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파당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고전3:3-5). 그들이 이처럼 분열하게 된 것은 한 몸인 교회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상대를 비난하고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손이 발에게, 입이 눈에게 잘 못하고 있다고 때리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점을 잘 알아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도의 약점을 공격하여 곤경에 빠뜨리거나 흠을 내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감싸고, 돌봐 줌으로서 건강한 모습을 갖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 안의 성도들이 서로가 자신이 맞는 자리를 알고 그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물론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부분들도 있지만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노력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가진 은사와 재능들을 알고, 그들에게 맞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하며, 각 지체인 성도들도 자신이 교회 안에서 어떠한 일들을 하는 것이 주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지를 알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자라서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는 주님의 교회 안에 지체로서 머물러 있을 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오랜 시간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주님의 교회를 멀리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겉으로 볼 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있는 몸입니다. 사람이 자라는 것이 눈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의 교회도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몸이 다 자랐다고 성장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정신까지 포함해서 지속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을 멈추게 된다면 그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으로부터 떨어졌거나 아니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항상 마음속에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몸, 즉 주님의 교회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성장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을 통한 은사가 개인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고, 또한 그것을 대단한 것처럼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더욱 뛰어난 은사들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 이유는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생각이 우선되어야 합니다(고전14:12).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남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경우들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을 향해 당부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자신이 가진 은사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고린도 교회에게 권면한 바와 같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3장 전체에 걸쳐서 사랑에 대하여 말합니다. 12장과 14장에는 은사에 관한 설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모든 과정에 사랑 안에서 세워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도, 교회도 성장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사랑 안에서 자랄 때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엡4:17~23)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은 착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신비롭고,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서는 이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대부분 좋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을 파괴시키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결과를 안겨줍니다. 그들은 대부분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단들입니다.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도 쉽게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복음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결국 지옥으로 던져지게 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헛된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각은 선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생각들은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23)로 번역되어진 이 구절이 너희 생각(마음)의 영 안에서(in the spirit of your mind) 새롭게(be renewed)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은 선한 것이고, 사람의 생각은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영지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각이 악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 즉 육체만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생각이 악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를 색욕에 내주고 탐욕을 내어 모든 부정한 것”을 행하려는 생각이 나쁜 것이지 생각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순간 새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신분이 바뀌고, 지옥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새로운 마음,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변화는 단순히 외형적인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몸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속했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육신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와 반대로 영에 속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생각의 영을 새롭게 한 사람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마치 목사나 성경교사, 혹은 전도자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 매우 영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훌륭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 한분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해야만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따르다가 낭패를 당했습니까?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의 말을 따르다가 좌절하고 낙심한 상태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문제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심지어 자신에게 전해진 말씀들을 다시 묵상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있듯이 생각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 생각의 차이는 스스로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자신을 훈련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영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매우 훌륭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주 안에서 생각하고, 그 일들을 행하는 것이 성경적으로는 더 지지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또한 지도자들로부터 전해진 말씀들을 묵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매 순간마다 생각의 영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힘쓰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수고해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25)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4:24~2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새로운 창조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이전 상태, 즉 옛 것들은 이미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과거의 습관을 따라 살려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고후5:17).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곧 이전에 있었던 육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롬6:4).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들은 새로운 것들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썩지 아니할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창조물은 단순히 다시 한 번 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작품이기도 하며, 또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기도 합니다(엡2:10). 이 새로운 창조물은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자들은 반드시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한 행위 가운데서 걷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작품이기도 하면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엡2:10).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선한 삶을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선한 것에 대한 기준을 어떻게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죄 가운데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누구도 완전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데 있어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죄에 대한 정의조차도 불분명합니다. 물론 우리는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 안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시는지에 대한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가지고 죄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가진 속성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매우 미워하십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마귀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골3:9). 또한 오직 진리, 혹은 진실만을 말하도록 권면하고 있기도 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는 이미 아나니야와 삽비라 부부를 통하여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행5:1-11). 거짓말하는 자들은 마귀가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듯이 반드시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거짓말을 버리고 각 사람이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권면하고 있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곧 지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하지만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몸을 구성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각자 맡은 역할에 있어서도 다양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더욱 분명하게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각기 다른 은사들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협력하여 하나의 몸을 구성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협력하고, 하나가 되어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단순히 이웃이 아니라, 곧 내게 속한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지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죄의 범위를 규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문화적인 배경이나, 관습들에 따라서 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공감하는 죄에 대하여 인정할 수 있습니다. 가령 살인이나, 강도, 강간, 혹은 절도와 같은 것들은 어느 민족에게나 적용되는 죄의 범주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거나 안식일을 포함한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죄라고 규정하지만 이방인들은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많은 민족들이 근친결혼에 대하여 죄악시 하지만 구약 성경 안에서 유대인들은 근친간의 결혼이 흔히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민족들마다 그들 스스로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법을 만들어 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했던 자들, 많은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문화적인 기준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죄의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복음과 함께 문화까지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을 봅니다. 가령 오늘날 한국의 교회 안에는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문화적인 전통까지도 지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추수 감사절이나 성탄절과 같은 경우는 매우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의식 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법까지도 그들의 문화에 기초해서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오류를 낳게 됩니다.
죄를 규정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면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시4:4). 이 말의 의미는 죄가 결코 문자에 기록한 것으로 정의하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전의 음식을 먹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막2:25-28). 간음한 여인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요8:3-11). 그들은 분명히 율법에 기록에 의하면 당연히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죄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그것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규정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필요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화를 내는 것은 죄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명백하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화를 내셨습니다(요2:13-17). 즉 화를 내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노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이나, 기분에 따라서 화를 내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심지어 화를 내도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자세를 가졌을 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진노하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가 지도록 진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음속에 미움이나 분노의 감정을 품고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도 형제와 대적하는 일이 생각난다면 형제와 화해한 이후에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하신 분입니다(마5:23~24). 분노의 감정이 마음 안에 남아있게 된다면 그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의 말을 하게 될 것이며, 스스로도 사랑의 감정들을 허물어뜨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와 미워하는 감정을 갖고 있다면 즉시 화해함으로 건강한 믿음의 삶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죄와 관련하여 가장 경계해야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지만(요일4:13), 마귀 역시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벧전5:8).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게 된다면 그는 결국 도망하게 될 것입니다(약4:7). 그러나 우리가 방심하고, 깨어 있지 않게 된다면 그 틈을 통해서 죄의 구덩이로 우리를 몰아넣게 될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스스로 깨어서 자신 안에서 마귀가 활동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마귀는 우리의 틈을 노리고 항상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더불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주님도 역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키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4:28~29)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종교에 대한 신념이 강한 자일수록 신비로운 능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그러한 행동들은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매우 위험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문제 앞에서 언제나 그들의 신에게 문제의 해결을 구하고 심한 경우에는 일상생활을 중단한 상태에서 온전히 신에게 모든 것들을 맡깁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종교인들의 모습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를 단순한 종교로 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으로 인식하면서 어떠한 노력도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게으른 모습으로 세상에서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도록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덕을 세우며 나누는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버는 방식은 나쁠지라도 선한 일, 혹은 의미 있는 일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래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도둑질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으며, 남을 돕는 일에 대해서도 노동을 통해서 정당한 방법으로 선할 일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일은 매우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돕는 도구, 즉 재물이나 권력이 부당하거나 남의 것을 탈취하고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방법은 더욱 중요합니다.
말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부패한 말, 즉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족하게 만드는 말들은 결국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들을 통해서 주님을 평가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지도 못하며. 관심조차 없는 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보면서 주님에 대한 평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덕을 세워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호소합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열심히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좀처럼 예수님을 영접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향기입니다. 즉 생활 속에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것보다도 훌륭한 전도 방법입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말을 할 때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좋은 말만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의로운 말, 혹은 정직한 말이라고 반드시 좋은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상대방의 입장을 보면서 그에게 적당한 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좋은 말은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도 듣는 자들에게 은혜가 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념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상대방을 무시하는 자세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려면 먼저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말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매우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서로 용서하라(엡4:30~32)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가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달라진 것은 신분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약속의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습니다(엡1:13).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놓여 있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하며, 또한 구원이 안전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며, 기쁨이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게 된다면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형제나 이웃을 향한 쓴 뿌리가 남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악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는 명령대로 악한 생각들은 완전히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통해 모두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신실한 삶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친절히” 대하는 일이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교회가 결코 신분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며, 친절함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친절은 사랑을 품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기도 합니다(고전13:4). 친절한 자세는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또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절함이 우리의 겉모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라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는 것은 우리의 심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행동이든지 마음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친절한 말과 행동이 마음으로부터 온 것이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위선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벧전2:1)고 말씀합니다. 즉 정직하게 행동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자세는 바로 용서에 대한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마6:14)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의 많은 곳으로부터 서로 용서하도록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고후2:10,골3:13,벧전3:8).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를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 중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용서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용서가 실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세상의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 달란트를 빚졌던 자가 탕감을 받은 후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결국 주인으로부터 악한 종이라고 여김을 받았던 모습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18:23-35).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용서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5:1~2)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세상은 인생을 질보다는 양으로 평가하려 합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부자가 되고, 명예와 권세를 가진 것으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속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은 결국 자신들의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종에서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것도 상속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능력이 없고, 연약한 자일지라도 자녀의 신분을 기지고 사는 자라면 그는 많은 것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 편에서 종인지, 자녀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이해하고 산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만큼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분수를 알고 인내와 절제를 통해서 덕을 세우는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롬12:3).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행해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스런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말 잘 듣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서로의 마음을 나누면서 대화를 통해서 서로가 원하는 것들을 온전히 행하도록 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많은 대화가 있는 가정에서 문제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집안일지라도 대화가 없는 가정에서 행복을 찾아보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사랑스러운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부모와의 대화를 쉬지 않고 귀를 기울이며, 또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수시로 알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때 가능합니다. 스스로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원한다면 그분과의 대화를 위해서 언제나 깨어서 기도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명령이기도 합니다(요13:34). 그리고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시기도 하시지만(마5:48),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기도 하십니다(눅6:36). 그리고 그분의 자녀들이 그 마음을 닮기 원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그들에게 있게 될 것이고, 많은 실패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구원,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는 과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배신을 했고, 사람들은 수많은 긍휼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모든 것을 참고 견디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께서 감당하기 쉽지 않았던 희생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 있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인내와 절제, 그리고 희생이 없이는 이 사랑을 얻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많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기에게 세상에 나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아기가 자라서 성숙해졌을 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온전한 사랑을 보이기까지는 많은 훈련과 연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잃지 않고, 더 큰 믿음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속 유업(엡5:3-5)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상의 목표는 상속유업을 받는 일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상속 유업을 받는 일과 구원의 관계를 동일하게 해석함으로서 죄를 지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구원의 안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더욱 많은 상속 유업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하며, 자칫 거짓말로 속이려는 자들의 꼬임에 넘어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얻지 않도록 경계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될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넓은 범위에서 소개한다면 음행, 부정함, 탐욕, 추잡함, 어리석은 이야기, 희롱하는 말, 우상 숭배자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겠지만 상속 유업을 얻지 못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로 요약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철저히 육신의 행위들에 근거한 것입니다. 육신의 행위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갈5:19-21). 상속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 육신의 정욕들을 절제하고, 오히려 주님의 일들을 위해 사용되어졌을 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음행은 육신의 행위가 언급될 때마다 가장 먼저 소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음행에 관한 문제는 세상에서나,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음행으로 인하여 실족되고 잇는 것이 현실입니다. 심지어 성경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음행의 문제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파멸하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 경우들을 목격합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강간함으로 우리야를 살인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며,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은 그의 양어머니와 동침을 함으로 장자의 명분을 잃었고, 넷째 아들이었던 유다는 그의 며느리와 동침을 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으며, 모세 역시 이디오피아 여인과 동침을 함으로서 가족과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자들로 가득 찬 도시로 천사들을 범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도시를 완전히 멸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은 곳에서는 자기 어머니를 아내로 취하면서도 우쭐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성적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기가 있습니다(고전5:1,2). 세대를 막론하고 음행의 문제는 경건한 삶을 유지하는데 최대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거짓말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상속 유업을 얻기 위해서 매우 주의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거짓말을 하는 자는 대화를 부패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전10:13).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덕을 세우는 데 쓸 좋은 것만을 말하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엡4:29). 만일 우리의 말로 인하여 상대방이 실족을 하거나 상처를 입게 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을 실족시키는 자들에 대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매우 엄격한 입장을 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18:6,막9:42,눅17:2). 어리석은 말들로 인하여 듣는 이들이 실족하거나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일반적으로 우상숭배를 타종교를 따르거나 혹은 어떤 대상(사물)을 놓고 절하거나 섬기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한 마디로 정의하기를 “탐욕”이라고 소개합니다. 탐욕은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지만 좀 더 적극적인 표현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갖고 싶어 하고 또 구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주님을 향한 마음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우리의 육신을 위한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물질과 명예, 혹은 권세와 지식(철학)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 대상들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은 우상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성경은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들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그것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생활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을 구하고, 건강한 생활과 만사형통의 삶을 마음에 두고 그들의 종교를 따릅니다. 그들은 결국 탐욕이 만들어 낸 종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당연합니다(마6:33). 우리의 마음 안에서 탐욕을 제거할 때 상속 유업을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6~9)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8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들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려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24:4)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많은 속이는 자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영에 대하여 성경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2:2)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순종하는 자녀, 즉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강력하게 권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속이는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속이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접근할까요? 그들의 접근 방식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통해서 사람들의 전통과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골2:8). 철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와 경제의 논리에는 반드시 철학적인 사고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헛된 사고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많은 거짓말을 합니다. 즉 세상의 모든 논리에는 철학이 필요하며,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접근을 하게 될 것이며, 매우 유치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사고로부터 시작된 철학은 결국 그들을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모습에 자신을 맞추지 말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벧전1:4).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흔하게 착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세상의 사람들보다 지혜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모든 소망을 둔 사람들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소망을 둔 자들로서 오히려 세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서툰 모습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 까닭에 많은 실패를 하게 될 것이고, 많은 손해를 입게 될 것이며, 심지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오직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 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어둠의 세력들은 언제나 그의 빛을 가려 더 이상 빛을 내지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 어둠이 다가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요12:35). 이것은 건강한 사람을 무능한 자로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몸은 건강한데, 정신적 장애를 가져다줌으로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평생을 어둠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어둠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더욱 치명적인 상황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선함과 의와 진리 안에서 맺을 수 있습니다. 즉 빛의 자녀로서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게 될 때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람들이 말하는 물질이나 건강, 명예나 권세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통해 맺을 수 있는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인격) 안에서 자라는 것들입니다. 물론 빛 가운데 걸었을 때 맺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빛의 자녀들답게 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시험하여 보라(엡5:10-13)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모든 사람들이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바로 시행착오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시간을 거치지 않은 사람에게 믿음의 성숙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스스로를 시험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경험하게 될 선한 것을 굳게 붙들고 나간다면 그는 반드시 승리하는 인생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살전5:21).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입니다(살전2:4). 그것은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욱 강건해지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들을 터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세상의 일들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들을 따라 살도록 권면하면서 그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스스로 입증할 수 있도록 힘써야만 합니다. 이것은 결코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믿음의 싸움을 통해, 많은 시험과 연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완성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스스로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열매와 관련한 권면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열매들은 곧 그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결국 그들이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물질이나 명예, 혹은 권세나 지식만으로 평가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열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맺을 수 있는 열매에 관하여는 이미 성경 안에서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갈5:22-23). 그것들은 우리의 성품과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들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물질이나 그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신실(godly)하게 성장시켜 가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죄에 대하여 당연히 멀리 해야만 합니다. 또한 그들과는 사귀지도 않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입니다(고전5:9). 만일 우리의 주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짓는 자들을 본다면 꾸짖어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딤전5:20).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을 입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합당한 자세가 죄를 멀리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엡5:3).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죄는 언제나 은밀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자랑스럽거나 떳떳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마음 안에 심어놓음으로서 결국에는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해야 하고, 또한 자신의 마음들을 서로 나누면서 지속적인 교제를 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비밀을 가지고 행동하는 자는 더욱 많은 죄 들로부터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교제를 나누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엡5:14~17)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잠자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깨어서 일어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깨어 일어난 자들에게 빛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즉 여전히 잠자고 있는 자들에게는 빛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빛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전통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방법대로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깨어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듣고 읽을 수 있지만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잠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깨어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은 매사에 주의하여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삶을 사는 자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마치 세상에서 지식의 많고 적음과 처세술과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하여 매우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바로 “주를 두려워하는 것”(시111:10,잠9:10)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무슨 일을 하든지 매 순간 주님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의식하는 자들이 죄를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선한 일들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결코 게으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되찾으라”(Redeeming the time)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 구절입니다. 어떤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에 대하여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그 시간들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때가 악하니라”(because the days are evil)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에 “왜냐하면”(because)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는 곧 시간을 되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날들(days), 곧 오늘 이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매우 악하기 까닭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간을 허비하고 결국에는 구원의 때를 잃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고백한 후 마지막으로 권면하기를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12:1)고 말한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주님을 기억해야 하는 때를 잃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는 결국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시간은 결코 멈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흘러가고 있으며, 그것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흘려보내고 있는 시간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후회 없도록 만들어 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후회 없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뜻을 알고, 그 안에서 신실한 삶을 사는 일입니다(롬12:2). 많은 이들이 주님의 뜻을 마치 새롭게 계시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성경은 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많은 부분에 걸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본적으로 거룩히 구별되는 것입니다(살전4:3).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이미 성경에서 기록하듯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서 감사하는 일입니다(살전5:16~18). 이는 매우 간단하게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생활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일들을 행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 스스로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로운 삶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며, 또한 모든 순간마다 주님의 눈을 의식하고,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간들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기 바랍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21)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세상에서 술을 대하는 문화는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이는 어느 민족이나 관계없이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성경 안에서도 술과 관련하여 많은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술과 관련된 사건들이 결국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 그의 아들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가나안의 저주를 낳게 되었고, 롯은 술에 취함으로 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 모압과 암몬이라는 자녀를 낳음으로 이스라엘과 원수의 민족을 만들었으며(창19:30-38), 삼손은 술로 인해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신실하게 지켜내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성경은 술에 대하여 지극히 부정적입니다. 술에 속는 자는 지혜롭지 못한 자라고 경고합니다(잠20:1).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지 말도록 권면하고 있으며(23:20), 바라보지도 말라고 합니다(잠23:31). 심지어 그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고전5:11). 오히려 경건한 삶을 위해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하나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눅1:15). 술이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엄히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이미 우리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무너뜨리기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술은 결국 그것의 과도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죄의 한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령이 충만한 삶입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술에 취한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한 자가 무의식적으로 죄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듯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신실한 삶의 한 가운데로 인도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이 마치 환상이나 계시, 그리고 각종 능력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령이 충만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하여 요약하여 설명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먼저 주님께 찬양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찬양의 입술이 멈추었다면 더 이상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노래할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행16:25). 성령이 충만한 자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찬양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힘겨울 때뿐만이 아니라 즐거울 때에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약5:13).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주님께 찬양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자는 언제나 감사하는 생황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감사하는 자세에 있어서 최상의 방법입니다(히13:15).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사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감사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골2:7) 드렸을 때 더욱 가치 있는 감사가 될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며(살전5:18),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사는 동안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질 때 삶은 그 자체가 고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의 모습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또 하나의 현상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라는 내용과 같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결코 남을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계급을 두어 사람들을 치리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서로 약속된 행동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 모든 것들조차도 서로를 섬기고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개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모두가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결코 그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족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들아(엡5:22~24)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역사적으로 보면 여성들의 위치는 언제나 소외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되어 남성들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활동하고, 또한 일부 영역에서는 더욱 뛰어난 능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도 여성들에게 불리한 사회적 구조가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와 비교한다면 현대 여성은 매우 좋은 여건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만 보더라도 여자들은 짐승들과 같이 집안의 재산 가치 정도로 여겨졌으며, 그 까닭에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남자들은 모두 죽이지만 여자들은 종이나 노예로 사고 팔았습니다. 또한 여성들은 가정에서도 언제나 남편을 돕는 배필로서 인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서 주장을 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죄악시 여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많은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진행하고, 가정에서조차 남성들보다 더욱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이끌어 가는 모습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자는 처음부터 남자를 돕기 위한 배필로 지어진 존재입니다(창2:18). 만일 세상이 남자로서 충분했다면 여자는 창조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일차적인 사명은 바로 부족한 남자들을 돕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여자가 남자보다 더욱 뛰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여자들에게 남자(남편)에게 순종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골3:18). 그것은 여자의 능력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하신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여자에 대하여 한 가지 더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식을 낳을 때 당하는 고통과 관련된 것입니다. 죄는 여자로부터 들어왔습니다. 물론 그 근본을 따진다면 마귀와 뱀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여자가 그들의 꾐에 넘어감으로서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여자들이 자식을 낳을 때 커다란 해산을 고통을 더해 주었습니다(창3:16). 뿐만 아니라 남편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게 되는 형편에 처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죄는 남편으로 하여금 여자를 다스리도록 만드는 빌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동안에는 여자들은 남자들의 다스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자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태도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내의 순종이 남편보다 부족하거나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게 합니다. 아내의 순종은 질서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작게는 가정의 질서, 그리고 교회의 질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영적 세계에서의 모든 질서에 관한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남편에 대한 순종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고전11:3)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의 믿음이 결국 남편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토록 여자에게 대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녀들의 믿음의 잣대가 바로 남편에 대한 순종으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로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언제나 남편에 대한 순종으로 모든 이들에게 덕이 되고, 또한 질서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남편들아(엡5:25~28)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아내가 남편을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앙의 척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결혼한 여자의 믿음은 그녀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을 평가함에 있어서 아내 된 여자에게만 그 기준이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남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즉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의 믿음을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의 믿음은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남편은 단순히 순종의 차원을 넘어서 희생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히 희생제물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엡5:2). 자신의 아내에 대하여 바로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사랑을 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의 아내에 대하여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3:7)고 명령합니다. 즉 아내 된 여자를 귀하게 여기고, 또한 자신의 생명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곧 남편의 신앙을 점검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매우 믿음이 좋은 것처럼 말하면서 자신의 가정에서 아내에게 함부로 대하는 모습들을 목격합니다. 성경은 그를 결코 믿음이 좋은 자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도자로서도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가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교회가 정결하게 될 것을 명령하시는데, 그 기초가 말씀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26)라고 말씀하심으로 교회가 오직 말씀을 통해서 깨끗해 질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으며, 결국 “거룩하고 흠이 없게”될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요15:3). 그리고 그것은 전쟁터에서 검(칼)의 역할을 합니다(엡6:17). 이 세상이 영적 전쟁터와 같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를 세우는 일들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교회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아래 놓인 것 같이 남편과 아내는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아내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이 남편에게는 희생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엡5:33). 아내에게 함부로 대하는 행위는 곧 자신을 학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남편 된 남자에게서 더욱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민족들은 여자들은 마치 노예나, 재산처럼 취급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남편에게 대한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남편들에 대하여 더욱 많은 희생과 헌신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비스런 결혼생활(엡5:29~33)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이혼율의 급증으로 놀라우리만큼 많은 가정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혼의 원인을 다각적으로 분석하지만 저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부부가 헤어지는 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결국 결손가정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보호시설에서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아이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어느 부모가 이런 아이들을 버렸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매우 무책임하게 보이는 이유는 어릴 때는 큰 문제없이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청소년기가 되서 사춘기를 맞게 되면 상황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보호시설을 가출하는 아이들이 생기기도 하고, 남아 있는 아이들조차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곳으로부터 떠나야 하기 때문에 막막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들이 건전한 사회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매우 기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일의 원인은 당연히 그들을 이러한 상황으로 내 몬 부모들에게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날 사회가 그러한 일들을 주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정보 통신 환경이 가장 좋은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하여 정보를 교환하고 자료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정에 치명적인 상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음란사이트들을 통하여 각종 성인물들이 범람하게 되면서 성적 윤리들을 무너뜨리고, 또한 영상매체를 통해 불법적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관계는 매우 신비스러운 관계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조용한 시간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밀한 시간들은 부부간의 모든 갈등과 오해들, 그리고 힘겨운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은 부부간에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의식과도 같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떻습니까? 수많은 음란물들은 이성들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들어 놓았고, 부부간의 관계들도 더 이상 은밀한 관계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와 있습니다. 부부를 서로 교환하는 일명 스와핑이라는 것이 등장하는가 하면 남녀가 집단으로 성행위를 일삼는 모습까지 알려지고, 각종 카메라나 비디오를 통하여 은밀한 부위들을 공개하고, 심지어 자신의 신체까지도 만인들 앞에 드러내는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결국 결혼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부부관계의 신비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부부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 교회는 신부로서 서로 정혼한 사이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부부간의 모습을 생각하면 매우 흥미로운 주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난잡할 정도로 복음을 파헤쳐서 더 이상 소중한 것으로 알지 못하고, 복음에 대하여 듣고, 그 증거들을 보면서도 믿지 않는 이들을 흔히 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고 믿으면 그들의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를 가도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또한 분명한 진리에 대하여 알고 믿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처럼 흔해진 복음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교회를 배반하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님을 믿고 분명한 영접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과 은밀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성경을 묵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이들은 결코 주님과의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이며, 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제대로 살기 원한다면 정상적인 부부관계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 확실한 간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내, 혹은 남편을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건전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자녀들아(엡6:1~3)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사람들이 이 땅을 사는 동안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오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서의 일들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겠지만 그들조차도 할 수만 있다면 풍요로운 삶과 건강하게 오래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사람들이 종교에 접근하는 이유도 그들이 장차 다가 올 세상에 대하여 대비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실상은 현실에서 행복하게 사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들로 성경에서 복을 받는 방법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잘 되는 방법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효도,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데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 땅에서 잘살게 하려는데 최종적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사람들이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분과 더불어 통치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 까닭에 성경은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복을 받게 될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으로 성경은 만일 형통하고 이 땅에서 장수하기 위해서 제시한 방법이 바로 효도하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고 하신 말씀을 근거로 가족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무시해도 괜찮은 것처럼 말합니다. 심지어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가족들과 결별하고, 아예 가출을 요구하는 경우들도 목격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원수로 말한 내용은 그 의미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내용이기도 하지만 만일 가족이 원수와 같은 모습으로 있다 할지라도 성경은 너무도 명백하게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이것을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부모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자세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결코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처럼 부모에 대한 순종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바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남편이 아내를, 또는 아내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듯이 자녀가 부모를 대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의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부모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기 때문에 전혀 존경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불효해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한 최소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양심을 가진 자라면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놀라운 사람을 베풀어 주시지만 우리는 실상 그러한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들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의 삶에 만족을 줄 수 없을지언정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들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는가에 상관없이 그분들을 공경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잘되고 이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들아(엡6:4)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한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건전하고 건강한 아버지 아래서 자란 자녀들은 바르게 자라겠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자란 자녀들은 바르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의 아버지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주님의 길을 따라 바르게 걷게 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창18:19,신4:9).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교육은 어머니의 몫입니다. 그것이 매우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결코 건강한 가정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아버지들에게 매우 부지런히, 심지어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걸어갈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양육할 것을 명령하고 있으며(신6:7,신11:19), 때로는 징계하고, 자녀가 운다고 불쌍히 여겨 자녀들을 그릇된 길로 가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잠19:18).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 할 수 있는 기간이 평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동안 아버지로부터 훈계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시간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주어진 시간이기도 합니다. 만일 그 시간들을 헛되게 보낸다면 자녀들은 결국 아버지와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믿음 안에서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바르게 훈련하게 된다면 그는 늙어서도 믿음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잠22:6).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고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삶에 있어서도 수많은 어려움들을 만날 것이며, 때로는 넘어지고, 심각한 영적침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바르게 양육을 받은 자녀라면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믿음을 통한 간증을 자녀들에게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인생을 통해 많은 지혜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신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이기를 힘써야 합니다(시78:4). 주님을 찬양하며, 자신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자녀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확신을 주는 것보다 좋은 가르침은 없습니다.
아버지 된 자들이 자녀들을 바로잡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녀들이 안식과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잠29:17). 자녀들이 누리게 될 행복은 곧 아버지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자녀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아버지의 삶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자녀교육을 위해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곧 자녀들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성경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누리게 될 행복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물질과 명예, 권세와 같은 것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바른 믿음의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교육하는 아버지라면 하나님의 말씀, 즉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게 하고(딤후3:15), 그 안에서 믿음을 통한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육과 훈계로 양육하기를 힘쓰는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종들아(엡6:5~8)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현대인들에게 주인이나 종의 개념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고, 주인은 오히려 종의 눈치를 보며 일을 시켜야 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물론 주인과 종의 관계는 자신들의 위치에 맞게 행동했을 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칙을 지키는데 어려움이 있으며, 관계가 깨졌을 때 깊은 갈등이 있게 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종 된 자들이 주인 된 자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단일한 마음(singleness of your heart), 즉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악한 자들에게는 대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인들에게 복종하되 선하고 부드러운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복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벧전2:18). 아무리 사악한 주인일지라도 그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종의 자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영적인 질서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패한 자들에 대하여 순종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하게 “육체의 상전에게”(5) 순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순종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애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1:10). 물론 이 내용이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육체의 일들을 행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위선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혹은 세상의 부패한 것들로 주인을 즐겁게 하려는 행위들은 아무리 주인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절제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에게 순종을 하되 그들 스스로 믿음의 선한 양심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종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주인에 대하여 주님께 대하듯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또 다른 척도입니다. 현대인들이 직장생활이나 각종 사회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속한 조직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신앙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대하여 언제나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육체 아래 있는 자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신앙양심과 상관없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모든 명령들이 매인 자든지 아니면 자유로운 자든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들에 대하여 차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들은 성경 안에서 매우 강조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갈3:28,골3: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이며, 그들은 결코 차별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각종 이단들과 거짓 선생, 그리고 가만히 들어 온 자들에 대하여 분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되었을 때, 성경의 원칙에 따라서 순종하고, 피차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시62:12). 지금 우리의 행위가 주님으로부터 온 선한 것인지를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전들아(엡6:9)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일반적으로 종들에게는 엄격할 정도로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말하는 것은 매우 불손하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은 종들에게 대하여 철저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대해서는 어떠한 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즉 종들이 순종하고 섬기는 만큼 주인들도 그에 걸 맞는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시는 시각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종이나 주인에게 대하여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한 영혼에 불과할 뿐입니다. 누가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님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직 그들의 자리에서 얼마나 충성스럽게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욥이 당대에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았던 이유는 바로 종들에게 대하여 멸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31:13). 성경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18:25)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처럼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대부분 주인의 자리에 있는 자들입니다.
종들은 낮은 자리에서 순종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행동이지만 주인은 일반적으로 권위적이어서 종들을 귀하게 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곧 주인의 자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데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청지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들로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나눌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인은 종을 대하는데 있어서 결코 협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25:43)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그들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인 된 자가 그분의 자녀를 업신여기거나 협박하고 함부로 다루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주인이 상대하는 종은 단순히 자신의 수하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과거에 그를 배반하고 떠났던 종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몬1:17)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들은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닌 동반자, 혹은 동역자로서의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다른 자리에서 일하는 자들이지만 결국 주님 앞에서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신10:17). 그들의 환경, 혹은 배경, 그리고 그의 능력은 주님께서 사람을 평가하는데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심지어 권세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한 영혼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아무리 존경을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눈으로 볼 때 신실하지 않다면 그는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아무리 세상에서 멸시를 당한다 할지라도 정직하며, 신실한 삶을 사는 자라면 주님께서 그를 의롭다 하시고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로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 중심에 얼마나 주님을 바라보며 신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주인 된 자들은 종들, 혹은 사람들에 대하여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주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0~17)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새로운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전쟁의 역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군사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고 있습니다(빌2:25,딤후2:3~4,몬1:2).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군사로서 전쟁을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군사가 언제나 전쟁만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전쟁을 항상 준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싸우는 대상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마귀와 대적하고 있으며, 그들과 싸우는 무기들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닌 보이지 않는 무기들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무기들이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무기로 진리, 의, 화평의 복음, 믿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기들은 사람들의 노력이나 결심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능력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강력한 자가 되기 위해서 주 안에서와 강력한 권능 안에서 얻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벗어나서는 어떠한 능력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을 가지고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더욱 큰 절망을 안겨 줄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마귀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이전에 욥을 참소함으로 모든 재산과 자녀, 종들과 심지어 육체까지도 파멸로 이끌었던 존재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같이 여전히 물질에 애착을 갖고 속이는 행동을 일삼게 된다면 그는 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 권세나 지식들은 허무하게 사라지게 될 것들입니다. 마귀는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목표는 그리스도인들의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육신적으로 더욱 많은 것들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있는 경건한 것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영적인 일에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자세는 먼저 악한 날에 능히 견디어 내는 일입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서 절제합니다(고전9:25). 세상을 사는 동안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재물과 지식, 그리고 명예는 그들이 이 땅을 사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목표가 될 수도 없으며, 때로는 멸망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경계하고, 돌아보면서 절제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마음을 열고 마귀들에게 틈을 보이는 순간 그 영적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전쟁에 임하는 군사에게 있어서 무기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방어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공격을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물론 강인한 체력을 갖는 것은 군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강인한 체력과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진리, 의, 화평의 복음, 믿음, 구원과 같은 것들로 무장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격무기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유일한 공격무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수비만으로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영적 싸움을 승리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욱 완벽한 군사로서 준비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6:18-20)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도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생활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로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대신하고 있으며, 일부 극단적인 자들은 기도를 마치 신비로운 것들을 체험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기도와 간구를 하는데 있어서 “성령 안에서”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마치 무속신앙과 연결하여 환상이나 계시와 같은 것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의 본질을 크게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신 후 승천하시면서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행1:4,5). 그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인격이며, 우리와 더불어 활동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곧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능력이나 계시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기도의 일차적인 대상은 자신이 아닌 성도, 즉 이웃에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을 축복하려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면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거꾸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을 더 낫게 여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필요하며, 때로는 간절히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화를 할 때 한 번 말하고 뒤돌아서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말을 하고, 때로는 큰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주님은 응답을 받기 위해서 때로는 귀찮을 정도로 구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눅11:5~8,18:2~5). 기도가 주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기도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우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언제나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막13:33,골4:2,벧전5:8~9).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자신이 한 기도에 대하여 응답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부분 자신의 정욕대로 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사는 동안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 속에서 만사형통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들은 매우 초보적인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자신이 더욱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해서, 혹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더욱 담대히 전하도록 기도하는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편지를 보내는 목적(엡6:21~24)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이 편지의 전달자인 두기고는 바울의 훌륭한 동역자이자 신실한 일군이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그를 보낼 때에도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골4:7)라고 소개한 바 있으며, 에베소로 보내면서도 역시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시아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행20:4), 바울의 사역을 소개하고 교회와 사역자들의 사이를 왕래(딤후4:12,딛3:12)하며 부지런히 사역을 했던 자였습니다. 그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분명히 특별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역의 방법은 한 가지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많은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했고, 베드로는 수많은 회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그가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디모데와 디도는 훌륭한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돌보는 일들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역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서 교회를 이끄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소개되고 있는 두기고는 교회를 순회하면서 교회의 소식들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서로 기도하도록 권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두기고를 보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기고를 에베소 교회에 보낸 목적이기도 합니다. 결국 바울은 앞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지만 최종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교제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은 그가 얼마나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장소는 로마의 감옥 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22)라고 말합니다. 그는 에베소 성도들이 자신으로 인해 더 이상 힘들어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교회와 관련된 교훈과 실행에 관하여 가르치면서도 결국에는 그들을 위로하고 은혜와 사랑이 그들 안에 머물도록 기도합니다. 이것은 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미 성경 안에서 많은 부분들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들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법과 원칙 안에서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이 없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어느 것도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두기고를 통하여 에베소에 편지를 보낸 목적은 결국 서로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처한 상황들을 알게 하고 에베소 성도들에게 기도하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두기고가 돌아왔을 때 에베소 성도들의 상황에 대하여 듣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이처럼 믿는 자들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이웃들을 위해 더 많은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믿는 자들을 위해서는 서로의 소식들을 나누고 기도할 수 있기를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각자 교회 안에서 섬기겠지만 장차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는 함께 서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