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요르단 경계에 이르러 거기서 요르단 옆에 한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보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맞은편 요르단 경계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니는 길에 한 제단을 쌓았다,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이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함께 모여 그들과 싸우러 가고자 하더니』(여호수아 22:10-12)
우리는 믿음의 삶을 통해서 자그마한 오해가 자칫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해의 발단은 언제나 상대방의 의도를 알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분쟁은 없습니다. 오늘날 끊임없이 교회가 분쟁하고, 분열이 되는 이유를 추적해 보면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사안에 대하여 고집하고, 오해하는데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었던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서편으로 건너와 전쟁에 참여하고 돌아가는 중에 쌓았던 단을 통해 생긴 오해와 해명을 통해 더욱 돈독해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하여 교회의 과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형제애를 보이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이 날까지 이렇게 여러 날 동안 너희 형제들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주 너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책무를 지켰도다.』(22:3)
이들 세 지파는 요단 동편의 땅을 분배받은 지파로 이미 땅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단 서편의 땅으로 건너와 아직 땅을 차지하지 못한 다른 지파의 백성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를 완성하고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협력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완성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이 온전해 질 때는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일 것입니다. 자신이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더라도 만족하지 않고, 이웃의 형제가 안식을 누리기까지 도움을 주는 일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자들이 고전하고 있을 때 수수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어려운 영적 싸움을 싸우는 동료애를 보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당부
『부지런히 주의를 기울여서 주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모든 길로 걸으며 그분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을 굳게 붙들며 너희 마음을 다하고 너희 혼을 다하여 그분을 섬길지니라, 하고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들의 장막으로 갔더라.』(22:5,6)
여호수아는 자기 기업으로 귀환하는 자들에게 경건 생활에 힘쓸 것을 당부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고(수1:7), 하나님만을 사랑하며(출21:5,6), 모든 길로 행하고,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며(신10:12), 친근히, 즉 가까이 하며(시73:28),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신6:5 ; 마22:37-38).
여호수아의 이러한 당부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후 사사시대에 끊임없이 하나님께 범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제 싸움을 끝내고 돌아가는 그들에게 있어서의 과제는 지키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의 생활이 안일하고, 나태함 속에 있다면 더욱 큰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싸움이 끝났다고 잠시 방심할 수 있지만 사단은 절대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벧전 5:8-9)
싸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건 생활을 함으로서 계속되어지는 싸움에서 언제나 승리를 지속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요단 가에 단을 쌓은 이유
『다만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뒤를 이을 세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려고 세운 것이라. 그리하여야 우리가 주 앞에서 우리의 번제 헌물과 희생물과 화평 헌물로 그분을 섬길 수 있으리니 이것은 훗날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안에 아무 몴도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22:27)
세 지파가 귀환하면서 제단을 쌓은 이유는 지신들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증거를 삼고, 제단에 참여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훗날에 요단 서편에 사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할 수 없도록 증거를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비록 육신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 중 한 부분임을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이처럼 함께 영적 전쟁을 치르고 육신적으로 멀리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로 묵어 줄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세 지파의 사람들이 제단을 쌓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로 증거를 삼고,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 기도하며, 한 마음을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이며, 한 몸입니다. 서로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를 삼고, 하나됨을 확인해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평안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엡4:3,4)
요단 서편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보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맞은편 요르단 경계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니는 길에 한 제단을 쌓았다,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이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함께 모여 그들과 싸우러 가고자 하더니』(22:11-12)
요단 동편 지파 사람들이 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들은 서편 사람들은 매우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브올의 죄악과(민25장), 아간의 범죄로 인한 교훈을(수7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스라엘 전체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다 줄 것에 대한 결론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진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을 도와 싸워준 고마운 이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만은 용서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의지를 옅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시행착오는 사람을 더욱 성숙시키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도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세는 죄에 대한 분노입니다. 제 아무리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의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렇게 죄에 대하여 단호히 대적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정에 끌려 적당히 눈감고 죄에 동참하는 자세를 보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그마한 죄들이 우리의 삶을 죄고 들어와 결국 죄의 노예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오해에서 생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노였지만 죄에 대하여 단호한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을 반성케 하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된 이스라엘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이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이는 이 제단이 우리 사이에서 주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될 것임이라, 하였음이더라.』(22:34)
분노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표들을 보내서 자초지종을 듣고 오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보다 신중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결국 요단 동편의 사람들이 자기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로 그 일을 하였다는 것들 듣고 모두가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중함은 오해와 분열을 막는 도구가 됩니다. 만일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을 쌓았다는 이유만으로 싸움을 시작했다면 이스라엘은 찢겨져서 흔적조차 없어지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중함은 더욱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세상에 종교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사실 전쟁과 질병으로 인해 죽는 인원보다 종교분쟁으로 인해 죽어져 가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종교인들은 대부분 극단적입니다. 심지어 복음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특징입니다. 어떤 이는 이러한 극단이 교회를 성장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교훈은 절대 극단적이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편견에 대하여 자신을 통해 해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우리가 빚진 자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듯이 언제나 상대를 배려하는 심정으로 대하는 자세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동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과 언제나 함께 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더욱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화해는 사람들을 더욱 돈독한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삶에 더욱 활력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이 바로 화해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오해나 분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고 화해를 이루어 간다면 그는 언제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 되는 힘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푸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로 풀어 가는 것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도 땅에서 푸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바울도 경건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모든 사람들과 평화하라는 말을 합니다.
『너희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라.』(롬12:18)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화평한 삶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설령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발생이 되더라도 서로 신중하게 대처하여 분쟁을 막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단 동편과 서편 사이에 세워진 단의 이름을 '엣'(증거)라고 이름 지어진 사실을 통하여 서로의 하나 됨을 과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단은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고, 후손들에게 순수한 신앙을 전하는 열망의 표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 삼고, 그 믿음 안에서 교제하고, 하나 되는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모습을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줌으로서 언제나 동일한 믿음이 후손들에게 계승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요단 가에 세워진 단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부디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 된 모습 속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설계해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